역사의 주요 페이지들을 장식해 온 화장품 광고를 보면 그 시대의 문화, 트렌드 그리고 당대 최고의 미남 미녀들이 한눈에 보인다.60년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광고와 모델에 얽힌 흥미진진한 뒷얘기들을 사진과 함께 준비했다.
스포츠서울닷컴│김효진기자 kimmy@sportsseoul.com
●촌스런 카피와 단조로운 일러스트,1940년대
1940년대 이전의 광고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는지.일본 식민지 시절이었던 때이니 만큼 광고를 하는 화장품은 온통 일본 제품들이었다.립스틱이나 샴푸,크림과 비누를 겸한 클렌저 등 종류는 제법 다양했지만 광고 내용은 고작 한자와 한글이 뒤섞인 카피와 일러스트 뿐.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광고에 모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이 한 병으로 빛나는 살결'이라는 다소 촌스런 카피를 내세운 헤치마 코롱인데,간지러울 만큼 애교스럽게 웃고 있는 모델(실제로는 한국인 김소영)에게서 일본적인 냄새가 물씬 난다.1920년대에 비해 디자인이나 레이아웃이 세련됐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서툴고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민자 최무룡의 모델 데뷔,1950년대
화장품 광고에 낯익은 얼굴이 속속 모델로 캐스팅되기 시작했다.1959년 여자배우로서는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민자가 'ABC 백정제(화이트닝)' 광고에 처음 등장한 것.그 인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人氣女俳優 李民子 孃(인기여배우 이민자 양)'이라는 한자가 사진 옆에 화려한 필체로 쓰여 있는 것이 흥미롭다.표정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증면사진처럼 정직한 포즈가 어색하고,'검은 얼굴이 눈송이처럼 희고 아름다워집니다'라는 광고 카피 또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과장된 것이다.얼마 후 이민자는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인 최무룡과 함께 'ABC 비타민 크림' 광고에 커플로 등장했는데,두 인기 톱스타가 한 광고에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장안의 화제였다.과감한 노출로 시선을 집중시킨 광고도 선보였는데,파라솔을 배경으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비키니 차림의 모델과 가슴의 굴곡을 드러낸 글래머 배우 이민화의 광고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우아한 여성과 터프한 남성의 활약,1970년대
태평양화장품이 메이크업 제품 개발을 가속화하면서 1970년대부터 메이크업 광고가 눈에 띄게 늘었다.경직됐던 모델들의 포즈가 이때부터 한층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먼저 샛노란 바탕이 눈길을 끄는 광고를 보자.강렬한 웨이브 퍼머를 한 신인모델 신숙이 깜짝 놀란 듯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어색해 보이기도 하지만,시선을 집중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었다.최초의 메이크업 캠페인인 '오 마이 러브'도 마찬가지.제법 세련된 메이크업과 우아한 표정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주인공은 요즘 MBC드라마 '인어 아가씨'에 중견배우 심수정 역으로 나오는 한혜숙이다.당시 KBS 탤런트 출신이자 우아한 마스크로 주목받던 그녀의 매력을 잘 살린 광고로 지금 봐도 어색하지만은 않다.
남성 화장품 모델로는 가장 남성다운 모델로 꼽히는 남궁원이 전격 기용됐다.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터프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헬리콥터,경비행기 그리고 승마를 총동원하는 등 비주얼 작업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조각 미인의 전성시대,1980년대
컬러TV의 대중화,시장 개방,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 등 개방과 변화의 물결이 해일처럼 일었던 1980년대.서구적인 마스크의 속칭 '조각 미인'들이 신세대 여성상으로 떠오르며 화장품 모델로 등극한 것도 이 즈음이다.금보라,황신혜,옥소리가 대표적인 예로 이 세명의 미녀들은 현대적인 미모를 바탕으로 스킨 케어와 메이크업 광고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다.금보라는 브랜드를 옮겨가며 전성시대를 누렸고,황신혜와 옥소리 역시 각각 대표미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짙고 굵은 눈썹,핑크와 브라운 컬러가 과장돼 보이는 아이 메이크업,새빨간 입술이 당시의 촌스러운 메이크업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지만,전에 비해 의상이나 포즈는 한결 자연스러우면서도 화려해졌다.배경도 계절에 맞게 봄에는 꽃밭, 여름에는 바닷가,가을과 겨울엔 각각 단풍과 설경으로 옮겨가며 변화를 시도했다.황신혜가 립스틱 컬러에 맞춰 세 가지 헤어스타일로 변신한 나르랑 핑크 광고는 지금 봐도 흥미롭다.
●X세대 대표미인을 찾아라,1990년대
깎아놓은 외모의 모델들의 자리를 이른바 신세대 모델이라고 불리는 참신한 얼굴들이 차지하기 시작한 시기다.다양한 얼굴 표정으로 X세대의 심벌로 떠오른 신은경과 당시 꽃미남의 대표격인 이병헌과 김원준이 그 예다.과거에는 여신(女神)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어필했던 것에 반해 이 시기의 모델들은 못난이 인형처럼 과감하게 찡그리기도 하고 다리를 벌린 포즈로 X세대의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대변했다.카피도 훨씬 더 감각적인 것들로 바뀌었다.'나, X세대?' 라든가 '내 나이 20과 2분의1' 등은 신세대들을 타깃으로 한 감각적인 카피로 꼽힌다.그런가 하면 커리어 우먼으로 등장해 가장 현대적인 미인상으로 떠오른 이영애를 비롯해 중성적인 이미지의 김지호 역시 영화를 패러디한 광고를 통해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예쁘기만 한 모델의 시대에서 끼와 개성을 지닌 모델이 각광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밀레니엄 시대의 미녀,2000년대
화장품 모델은 곧 브랜드의 이미지로 직결된다.많은 브랜드들이 모델 선정에 고심하고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2000년대 N세대의 대표 주자는 이나영, 김민희, 이요원, 송혜교 등이다.컴퓨터 미인 황신혜나 옥소리가 지닌 완벽한 이목구비와는 거리가 멀지만,깜찍한 표정과 끼로 승부하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미모를 대신해 발랄한 끼로 당당히 화장품 모델이 된 박경림도 밀레니엄 시대의 파격적인 모델 전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모델의 비중이 높아지다 보니 모델에 맞춰 브랜드의 이미지 전략이 바뀐 사례들도 있다.M화장품 브랜드의 경우 '산소같은 여자 이영애'에서 2001년에는 '빛이 되는 여자 황수정',그리고 2002년에는 '봄은 닮은 여자 박주미'로 모델을 교체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했을 정도니 말이다.광고 모델의 연령이 다양해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1990년대 후반부터 전인화나 김희애,이미연 등 성숙한 아름다움을 지닌 30대 모델들이 미시층을 공략한 브랜드의 대표 모델로서 주가를 높이고 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화장품 광고 또한 언제까지나 우리들 생활과 함께할 것이다.다음 시대 미(美)를 선도해 나갈 화장품 모델들은 과연 어떤 유형이 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자료제공│(주)태평양 '광고로 보는 한국 화장의 문화사'
사진│스포츠서울 사진DB,(주)태평양 광고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