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1.주일. 창 5:28~31. 관심과 유예 (猶豫).
건강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타인으로부터 관심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지나치게 병적인 수준에 이르면 위험해 집니다.
즉 관심 병에 걸리면 상식적인 생활이나 행동에 문제가 발생하기도합니다.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부류를 관심종자 즉 ‘관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상식적으로 판단하기에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가집니다.
요즈음은 SNS와 유트브 발달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관종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억지로 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결국 자기울타리를 높이 쌓아 자신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본문 5:28 -31절에는
인류의 최장수자 므두셀라(969세)가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182세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그 유명한 노아입니다.
4장16절 이하는 인류최초살인자 가인의 후손들이 나오는 반면 5장 전체는 가인에게 죽은 아벨대신 하나님이 아담에게 셋 이라는 아들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그 셋의 족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4장 족보기록방식은 ‘누가 ~을 낳았다`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4:18절 읽어 봅니다.
그런데 5장에 나오는 셋의 족보는 ‘누가 ~을 낳았다. 낳은 후 ~년을
지냈다. 다른 자녀를 낳고 ~세까지 향수하였다. 죽었다.’
라고 자세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차이를 느끼고 있습니까?
‘ ~ 낳고 ~낳고 ~~ ’란 형식과
누가 ~ 을 낳았는데 ~ 년을 살다가 또 다른 자녀 ~ 을 낳고 잘 살다가 ~ 살에 죽었다 란 식으로 자세히 기록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범죄인 집안에 대해서 별 관심 없이 ~낳고 ~낳다 식으로 썼지만 구속사의 맥을 이어가는 언약의 후손에 대해서는 매우 큰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 - 셋- 노아까지 10명의 족보를 보다가 본문에 나오는 라멕의 경우는 특이하게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은 이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족보형식으로 기본 틀을 깨고 성경저자의 특별한 해설이 들어가 있습니다.
5장에서는 에녹의 경우(21~24절)에도 또 한 번 나타납니다.
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 채셨나요?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여겼는데 에녹과 라멕의 경우에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자세히 문장구조에 대해서 설명은 피하겠습니다.
복잡해지니까요.. 단 족보기록형식이 두 인물의 경우에는 특이하다는 것만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즉 ABCDE구조형식 - ACDB구조로 변형)
10명의 족보 가운데 에녹과 라멕만이 특별한 구조로 기록된 것은 이들의 생애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경우에 있어서는 에녹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또한 죽음을 당하지 않고 직접 승천한 인물이라는 특별성이 있습니다.
반면 라멕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특별하기 보다는 그가 인류의 제2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노아를 낳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인의 삶도 잘 살아야 하지만 자식을 잘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면 그 부모가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됩니다.
어느 동네 길을 가다보면 00의 손자 사법고시 합격, 서울대 합격 등
조부모 이름까지 이용하며 현수막 자랑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노아 같은 인물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노아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믿지 않는 사람도 알지 않습니까?
본문을 보더라도 앞으로 노아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라는 것을 미리 암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꼼꼼하고 자세히 분석해 가면서 읽어 가면 성경읽기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말씀에서 주시는 은혜가 크고 깊고 오묘한 기쁨이 있게 됩니다.
이런 진리의 맛을 알게 되면 절대 성경을 손에서 놓을 수 없지요..
자, 여러분들은 성경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좀 더 깊은 맛을 더해 드릴까요?
5:28절 ‘아들을’(뻰,ןב) 보시기 바랍니다.
한글에는 단순히 ‘아들’ 이라고 했습니다만 원문에는 정관사 없이 단순명사형으로 되어 있어서 ‘아들’을 ‘한 아들’(a son)으로 번역하면 됩니다.
지금까지의 계보에서는 자녀란 복수형으로 썼지만 본 절에서는 단수형으로 특별히 ‘한 아들’을 낳았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사용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등장할 ‘노아’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홍수대심판으로 완전히 멸망시키고 인류시조 아담에 이어 제2시조라 할 수 있는 노아를 등장시켜 단수형으로 사용한 모세는 노아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받은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첫 번째 인물이 바로 노아입니다.
29절 -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여기서부터 노아의 위대한 생이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3대 조상을 말한다면
1) 인류의 조상 - 아담. 2) 믿음의 조상 - 아브라함
3) 홍수이후 새 역사를 여는 조상 - 노아를 말합니다.
노아 (누아흐에서 유래 - 쉬다, 앉다, 휴식하다).
노아는 타락한 인류를 물로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예언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즉 택함 받은 노아의 8가족만 구원받은 것입니다.
가족과 짐승들에게 생명을 준‘ 안위의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안위의 사람을 든다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세상 끝날 불로 세상을 심판 하실 때에 구원받은 사람만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아는 예수그리스도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훗날에 하나님의 관심을 받은 사람만 살아남습니다.
지금 이 시간 함께 예배드리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관심을 받아 택함 받은 백성들입니다.
2024년 3월 31일 기준 세계 인구가 81억 명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관심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말1:2-3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약탈, 유린, 정복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들을 사랑 하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적인 것과 자신들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사랑은 바로 창세전 택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창세전 택한 자들에게만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계심을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만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 외에는 관심이 없듯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녀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역사학자들이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발굴해 보니 거의 인구 십만 명 정도가 거주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 십만 명의 사람 중에 하나님은 오직 아브라함에게만 관심을 가지셔서 그에게 그곳에서 나올 것을 종용하시고 결국 그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십니다.
* 행7:2-4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렇다면 21세기 81억 명의 사람중에 하나님의 관심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바로 교회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각계각층 인기스타들이 아니라 창세전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습니다.
* 롬1:6-7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러니 지금 나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창세전 우리를 택하심을 믿으신다면 주님의 관심은 우리에게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노아를 택하셔서 온 지구 멸망 속에서도 7식구들과 짐승들을 구원하시기전 당시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120년간의 심판유예기간을 주셨습니다.
현대의 입장에서 120년이면 4세대쯤 됩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긴 세월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로 돌아올 기회를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의 물결에 휩쓸린 인간들에게는 노아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사람들의 죄악은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 인간들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가 예전만 해도 마약이 별로 없는 청정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술을 구하듯이 마약을 구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앞으로의 세대가 큰 걱정입니다.
죄악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는데도 우리 믿는 사람들조차 정신 차리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에 역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29절에 노아 라 이름을 붙이시고 땅을 저주하셔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주라는 단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3:17- 저주 (아루라. 단순형)하고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의 저주(에레라흐. 강의형 완료)는 - 이미 내려주신 땅에 대한 저주가 돌이킬 수 없는 엄중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언은 빼도 박도 못한다고 보면 되지요.
그런데 그걸 해결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죄에서 속량하실 때입니다.
* 요일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의 방주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올바르게 믿고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을 받은 사람이고 노아와 아브라함과 같이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택함 받았으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예수님의 빛 가운데 살아야 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인내하며 세상의 죄악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며 살아야 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근신, 경성, 깨어있으라!
말을 지나치게 해도 부족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 막1:15 -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심판의 유예기간 중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