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개없는 영역-사물,그리기,체험
The Least Mediated area - objects?drawing?experiences
윤은정, 최용석, 정은유, 이태호, 안희숙, 박영대, 이종목, 이강욱, 박승순
이영준 (큐레이터)
박승순
윤은정
최용석
정은유
이태호
안희숙
박영대
이종목
이강욱
최근 부산시립미술관에는 매개없는 영역-사물,그리기,체험展(2004. 4.27-6.15)이 열리고 있다. 윤은정, 최용석, 정은유, 이태호, 안희숙, 박영대, 이종목, 이강욱, 박승순의 작품 91점이 전시되고 있어 개별작가들의 독특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전시가 주는 긍정적인 의미는 물론 많지만 매개없는 영역-사물?그리기?체험展은 전시개념과 작가선정에 몇 가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제목도 대중적이지 않다. 물론 반대중적인 것이 지탄의 이유가 될 순 없지만 정확한 개념사용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언어로 구사하는 것이 옳다. 가뜩이나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는 일반 관람객을 생각해 보면 전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시제목은 지양해야 한다.
이 전시를 기획한 강선학은 기획의도를 “不二而二, 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대상이자 주체인, 주체도 대상도 아니면서 일체를 감싸고 서로 스며들어 세계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매개없는 그리기이며 이 전시가 찾고자하는 바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전시라는 것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또한 전시기획이라는 것이 개념을 줄 세우는 일이 아니라 할 지라도 적어도 맥락이나 방향이 무엇인지는 기획의도에서 읽히게끔 해줘야한다. “주체도 대상도 아니면서 일체를 감싸고 서로 스며들어 세계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세상 사물이나 인간 모두에 적용되는 것 아닌가? 다시 강선학은 미디어의 확장을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예시하며 “전위란 이런 세계에 대한 부정정신이자 이를 타고가는 타협이나 수긍”이 아니기 때문에 “매개없는 만남을 꿈꾼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모든 미디어를 이용하는 작가들은 전위가 아니며 현실에 수긍과 타협을 일삼은 작가라는 추론이 가능한데 그럼 백남준, 제프쿤스, 신디셔먼, 바바라 크루거, 부루스 노먼, 빌비올라 등이 미디어나 매개를 이용한 현실타협적 작가라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강선학의 기획의도가 “그리기”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근거하면서 제목에서처럼 최소한의 매개를 사용하는 작가들로 꾸며진 전시라고 가정하더라도 선정된 작가들 중 납득하기 힘든 작품들이 많다. 강선학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매개없는 만남을 꿈꿀 수 있는” 그런 작가가 선정되어야 한다. 필자가 기획의도를 정확하게 읽었다면 이 전시에 가장 걸맞는 작가는 이종목과 안희숙 그리고 박영대이다. 물론 이 판단은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성취 여부나 그 깊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단지 강선학이 이야기하는 그 “최소한의 매개”를 떠올린다면 이 작가들 외에는 “매개없는 만남”을 꿈꾸긴 힘들다. 왜냐면 너무도 많은 매개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두 가지의 층위의 매개가 존재한다. 하나는 작가와 그림사이에 존재하는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의 의식을 실어 나르는 ‘물질적인 매개’ 혹은 ‘수단’이 있을 수 있다. 최소한의 매개라고 했을 때 우선 대상을 지워나가는 작업, 혹은 대상을 의식하지 않는 작업을 염두에 둘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미디어에 경도되지 않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그린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강선학의 주장대로 이러한 작업들 속에서 즉, 대상과 수단을 최소화하여 작가의 내면적인 흐름이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발산된, 마치 자동기술법의 그것처럼 이성이나 개념, 논리가 개입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의식의 내면을 탐구하려는 전시로 이해할 수 있다. 강선학이 그토록 미디어의 과잉을 비판한 것을 미루어보면 최소한의 매개로 ‘소통’의 가능성을, 그리고 그 소통이 ‘정보’나 ‘미디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표현대로 “세계와 주체에 대한 자각이며 매개없이 처음으로 대상을 지각하고 표현하는 것에로 환원”할 수 있는 작품이 등장해야한다.
그렇다면 이종목과 안희숙은 기획자의 의도에 가장 근접한 작품들이다. 의식의 흐름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붓질과 형상들이 화면의 질서를 만들어가고 주체와 대상사이가 너무도 밀착되어있어 그 어떠한 매개도 개입이 불가능한 “최소한의 매개”라는 필요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그리고 박영대의 등장도 참을 만 하다. 회화의 가장 최소한의 단위인 점과 최소한의 재료인 먹으로 만들어진 회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영대의 작품은 개념적인 측면이 강하다. 한국화의 현대적 해석의 문제나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대한 탐구 그리고 현대미술의 방법론에 대한 치열한 자각이 숨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박영대의 회화는 매개가 없는 것이 아니라-외형적으로는 그렇지만-다른 층위에서 살펴보면 의식의 치열한 개입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영대의 등장은 오히려 전시의 맥락을 풍성하게 만든다. 이처럼 단순한 수단으로 이만한 개념들을 드러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머지 작가선정에 있다. 최용석 정은유 이강욱 그리고 윤은정은 외형적으로 드로잉이란 점에서 “매개가 없는” 쪽으로 속할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매개의 다른 층위 즉, 작가와 화면사이에 존재하는 대상이란 관점에서 보면 분명 한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태호와 박승순의 등장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적어도 최용석?정은유?이강욱?윤은정은 형식적으로 최소한의 매개라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지만 이태호와 박승순은 이 전시의 개념과 뚜렷한 접점을 찾을 수 없다. 이태호의 작품도 일반적으로 봐왔던 회화가 아니라 드로잉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너무도 선명한 네러티브가 존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이 비록 대상을 지시하고는 있지만 작가의 육필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정이 가능하지만 이태호의 작품은 대상에 심지어 강한 서사적인 내용이 점철되어있는 작품이다. 뿐 만 아니라 박승순의 회화는 비록 드로잉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구축적인 화면구성과 다양한 재료로 이루어진 평면회화가 아닌가? 필자는 이들 작품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한 점의 의구심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작가들이 선정된다면 이 전시 컨셉에 들지 못할 작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선정된 작가들이 매개없는 그리기의 원형은 아닐지라도 그 치열한 의식의 한 단면이라도 보여줘야 하는 건 아닐까? 전시를 준비하는 시간의 문제였는지, 매개에 대한 개념해석의 차이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 전시는 주제에 대한 집중력이란 관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어렵다.
미술관의 전시는 당연히 공공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국공립미술관이 지자체나 국가에 의해 운영된다는 주체의 문제와 더불어 문화 민주화라는 시대적 임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전시는 개념과 의도를 명확히 해야한다. 그래야만 작가선정에 대한 잡음도, 문화권력이라는 의구심도 떨쳐버릴 수 있다. 이제 부산시립미술관도 개관한지 6년이 넘었다. 그간 수많은 전시들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몰라도 그 전시들에 대한 공론의 장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학예사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지만 전시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여론수렴의 장치는 시급히 필요한 부분이다. 분기별 혹은 반기별로 전시에 대한 자체평가를 확대해서 예산과 전시진행 전반에 대한 공개적인 공청회를 마련해야한다. 이는 학예실의 기능을 위축시키기보다 전시기획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시해석의 풍요로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 미술관을 아끼는 많은 시민들은 전시진행과 관련된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편 부당한 “매개가 없는” 전시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