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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의 수필세계]
사유와 해석을 통한, 미로찾기 그리고 허물벗기
-이은희의 신작수필을 통해 본
한상렬
1. 들어가며
움베르토 마투라나 (H. R. Maturana)는 생물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인식의 나무》에서 색그림자 실험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똑같은 회색 고리라도 녹색 바탕에 놓이면 흰색 바탕에 놓은 것에 비해 담홍색을 띄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 색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구성한 색체를 지각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또 있다. 마루투나 역시 공간을 본다는 것은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들의 시계(視界)’를 체험할 뿐이라고 했다. 이들의 언술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자연 세계의 색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색체 공간’을 체험할 뿐이라는 말이겠다. 이처럼 사물에 대한 감각은 시각적 관습에 사로잡힌 이들의 눈으로 보면 언제나 동일하게 느껴진다. 구름에서 구름을 보고 바위에서 바위를 보며, 풍경에서 풍경을 보게 한다. 그렇기에 지각의 상투성에 사로잡히면 사물을 제대로 인식해낼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때로는 어린이와 같은 시선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일종의 문학적 상상일 것이다. 이는 에코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과 같이 도서관을 미로로 형상화하게 했다. 하여 미로 찾기는 일종의 암호를 푸는 것과 흡사하다. 에드거 앨런 포는 날카로운 추리력과 논리를 바탕으로 현대 탐정소설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반면, 비정상적인 심리와 초현실적인 현상을 묘사하기를 즐기기도 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거대한 숨은 그림이라면, 그 안에 진실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말이겠다. 작가는 마땅히 이런 세계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한 미로찾기와 허물벗기의 시선을 가져야 할 일이겠다.
이은희의 수필을 살펴보면 다분히 이런 상상의 세계에 대한 안목을 감지하게 한다. 그의 수필쓰기는 그저 자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뭔가 새로움을 찾아 나선 예리한 촉수를 체감하게 한다. 대상에 대한 뒤틀기라 할까, 역지사지의 사고, 현미경으로 대상을 살펴보듯 미시적인 안목을 발견하는 것은 그의 수필 읽기의 재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의 변화를 보이는 시계(視界))의 확대라 할까. 아니 수필을 위한 개안(開眼)이지 싶다.
이은희는 검댕이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의 대상을 거머쥐고 찬란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동서커피문학상 제정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그의 수상은 소설이나 시부문을 제치고, 최초로 수필로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데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한국의 수필문학이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입증할 만한 수작이라는 평가”가 그렇다. 70년대 이후 중앙지의 신춘문예에서 수필부문이 사라진 이후, 그는 가장 영예롭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처녀수필집 《검댕이》를 상재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냈으며, 곧이어 <망새>를 펴냄으로써 입문과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그의 창작열망은 활화산을 능가한다. 마라톤을 하듯 그는 수필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평가가 주례사식인가. 아니다. 최근에 창작된 작품들만을 보아도 이는 헛말이 아님을 증명한다.
2. 미로 찾기 그리고 허물벗기
이은희가 취택하고 있는 수필의 소재는 다분히 일상적이다. 그저 어디서든 보았음직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그게 아니다. 그의 착상은 일상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사뭇 그 발상이 낯설다.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는, 시선의 변화, 착상의 변화가 돋보인다. 그의 수필은 전통적 문법이나 통상적인 언술의 구조를 뒤틀어보거나 아니면 미시적 관찰을 통한 해석과 의미화로 존재 파악에 천착하고 있다. 사유의 깊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진지함이다. 이는 하이데거Heidegger의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 그의 수필은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문제를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본래적 자신’으로서 실존할 수도 있고, ‘비본래적 자신’으로서 실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단히 의미 있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삶의 해석과 존재 파악의 문제는 수필문학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항로일 것이 분명하다.
수필 <버선코>를 보자. 이 정도의 소재라면 그리 낯설지 않다. ‘한국의 미’를 진술하면서 버선코의 ‘선’의 미를 진술한 이도 있다. 독자는 아마도 여인의 버선코쯤 떠올리겠지만, 그게 아니다. 이 수필은 경주 불국사 기행이다. 평범한 담론이려니 싶지만, 예사 기행수필과는 전혀 이질적이다. 여정과 견문이라는 도식에서 자유롭다. 바로 시선의 변화가 이 수필의 핵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쉽게 창작된 작품일 수 없다. 이렇게 동일한 사물이라도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작품의 성패는 갈린다.
극락전 계단 앞이다. 무감각한 그에게 지인은 소맷돌을 살펴보라 한다. “선의 유형은 마치 할머니가 즐겨 신던 광목 버선의 앞코, 바로 그것이었다.”이는 경이로운 발견의 장면이다. 화자로 하여금 충격에 휩싸이게 한 동인. 착상의 동기는 여기서 단서를 떠올리게 한다.
“순간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걸작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내 머릿속엔 소맷돌에 새겨진 버선코만 압흔처럼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내내 선각(線刻)에 얽힌 상념이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필경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포목점에서 광목을 떠 손수 버선을 만들던 모습과 할머니가 버선목을 잡아당기던 자태가 떠올라 괜스레 슬퍼졌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기 두려운 장면, 병풍 뒤에 누워계신 할머니의 모습이었다.”(<버선코>에서)
화자는 여기서 잊고 지내던 할머니의 버선코를 떠올리고 소맷돌의 선각이 바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었음을 자각한다.
이렇게 인생과 삶의 진실에 대한 해석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사유의 깊이에 따라 그 모습이 사뭇 변용되게 마련이다. 작가의 사유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삶의 해석을 위한 실존적 의미 해석에 따라 삶은 얼마든 달리 진술된다. 이 수필은 일단 소재 선택에서 성공하고 있다. 소재에 따라 그 의미화와 주제 구현이 가능한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그저 산만한 정서의 나열에 그치는 경우도 있는 바, 그가 취택한 소재는 일상성을 벗어나 미로를 찾듯, 생경하고 낯선 세계를 독자를 인도함으로써 그만의 발상과 기법으로 작품을 소화해 냈다는 데 있다. 그의 탁월한 창작기법을 보게 한다. 아무리 소재가 남다르다 하여도 이를 부리고 내적감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작가적 소양이나 장인정신이 결여될 때에는 작가가 소망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움에도 그가 탁월한 작가임은 이런 소재의 부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는 에코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과 같이 도서관을 미로로 형상화한 것과 같이 작가는 마치 미로를 찾아가듯, 일상의 허물을 벗듯, 불국사를 기행한 것은 아닐지 싶다.
이은희의 작품에 원천은 미상불 어머니이다. 앞서의 <버선코>가 소맷돌에서 할머니의 버선을 상상하였다면, <등대지기>는 그의 문학의 지주요, 반석인 어머니이다. 그의 작품을 눈여겨본 독자라면 쉽게 그의 수필의 중심 인자인 어머니와 만나게 된다. 모성(母性)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요, 창작의 샘이 된다.
화자는 파란집을 찾아간다. 초록물결 위에 외로이 떠 있는 파란 지붕의 집이다. 마치 들녘을 지키는 파수꾼과도 같은 그런 집. 화자는 파란 집의 저물녘 풍경을 무시로 그려본다. 화자의 상상이 시작된다. “칠흑 같은 밤길에 빛이 되는 집-어둠과 두려움을 일순간에 거두어간 그 집은 파수꾼이 아닌 등대가 아닌가. 검은 바다를 홀로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그는 파란 집에 머무는 외로운 등대지기일 거다. 그는 분명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세상만사 넌더리가 나 잠적한 은자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파란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지만, 주인의 무심한 눈빛을 읽고 그도 말없이 잠시 쉬었다 가리라.”(<등대지기>에서)라고. 은자는 다름 아닌 화자가 된다. 이런 동일시는 수필창작의 단초가 된다. 여기서 그는“내 삶에, 나를 지켜준 등대가 있기나 한 것일까?”라고 자문한다. 답변은 쉬 이루어진다.“돌아보니 나의 등대지기는 친정어머니였다.”라는 자각이다.
칠흑 같은 밤길에 빛이 되는 집 그게 파란집이라면, 그 집은 바로 등대다. 등대는 화자에게 있어 어머니의 비유적 상징이다. 그런 어머니의 상실감은 등대의 소멸이요, 흔적지우기다. 하지만 이로써 끝이 아니다. 이은희의 등대지기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나서듯“그러나 든든한 등대지기는 내가 스스로 인정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 등대가 되어준 실체는 아마도 자연과 문학이 아닐까 싶다. 무시로 자연으로 달려가고, 산야에 피어난 개망초 무리에 그리움을 토하며, 한유한 시골 풍경 사진에 흠뻑 빠져 이렇듯 글을 짓고 있지 않은가.”라는 자각은 바로 존재의 확인이다. 미로에서 벗어남이요, 허물벗기일 것이다. 그래“대문을 열자 내가 원하던 풍경이 펼쳐졌다. 나만을 위하여 걸어놓은 사진인 양. 오로지 초록의 물결이 일렁이는 들녘에 외따로 떠있는 파란 집. 그 집에 내가 머무는 양 일상의 번뇌를 떨쳐버린 듯 호젓함과 평화가 전이되었다.”라는 존재의 해석과 각성이 이루어진다. 비로소 등대지기는 생명을 얻게 된다.
이렇게 이은희의 수필은 그가 바라보는 ‘눈’을 통해 피사체의 다양한 특성을 조감하고 있다. 문학은 모름지기 이런 일상에 대하여 타자가 발견하지 못하는 사물에 예민한 촉수를 가하여 내재한 진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로부터 받은 정서와 지성 그리고 상상을 직조하여 삶의 진실에 눈떠야 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이런 상상력의 동원은 그리 용이하지 않다. 이은희의 창작태도는 비약하면 문학적 낯설게 하기에 가깝다.
자, 다음의 수필 <은어>를 보자. 그의 수필에서의 낯설게 하기의 예를 보게 한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파드득, 파드득’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탄력 있게 두어 번 솟아올랐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녀석의 힘찬 꼬리 짓은 주기적으로 두 시간째 계속되고 있다. 아이가 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 탈출을 꾀하려는가. 달아나 봐야 물속도 아닌 차안, 양동이 안에서의 몸짓이다.”이 수필의 서두이다. 서두부터 이 수필은 독자를 낯설게 한다. 이어서 섬진강에서 살고 있는 은어가 하필 양동이에서 탈출하려하는지에 대한 연유를 서술하고 있다. 은어의 생태를 적당히 알고 있는 화자는 아이의 욕망을 잠재우려 하지만 쉽지 않다. “아이는 일정을 챙기며 검질기게 고집을 부렸다.”그래 화자는“에둘러 댄 말이 거짓말로 탄로”날까 하여 그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한다. 서사적으로 서술한 이 수필의 전개는 아들 아이의 소망에 따라 은어가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결말이 비극적이다. 은어의 죽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한 편의 삽화. 배불뚝이 구피가 산란 후 자신의 분신을 꿀꺽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이 수필은 주제로 보아 자연 친화, 환경보호를 일깨우고 있지만 그 구조가 사뭇 낯설다. “은어의 고향은 섬진강이다. 내 집의 수조가 아닌 끼리끼리 어울려 관계를 맺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걸 은어의 희생이 말하고 있잖은가. 강 밑바닥에는 먹고 먹히는 비애와 평화가 있다. 시원의 순결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작은 생명을 도외시하거나 책임을 회피하고 있잖은가. 상대가 먼저 생명을 포기하기 전에는, 내안에 들어 온 이유만으로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은어의 기질과 구피의 생태를 진작 알았더라면, 이런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이제야 뒤늦은 후회를 한다.”이렇게 이 수필은 생명공경의 사상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일상적인 수필의 경우와는 사뭇 차이가 있다. 대상을 보는 작가의 시선의 차이다. 수필 <몸시(詩)>에서 설천봉 고사목과 오대산 전나무 숲길에서 만난 고사목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추적하려 한 발상과 흡사하다. 고사목을 통한 삶의 해석,“내 남은 생애엔 외양이 화려하거나 미끈한 시(詩)보단, 울퉁불퉁하지만 앞품이 넉넉한 나무를 닮은 몸시(詩)를 쓰며 흘러간다면 더없이 좋겠다.”는 화자의 언술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은희의 미로찾기와 허물벗기는 수필 <괘릉>에서 구체화된다. 이 수필은 발화자가 능 주인, 나그네, 경주소나무, 무인석, 사자석, 12지신석으로 되어 있다. 이름 없는 능과의 대화를 통해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왜곡된 세태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이 수필은 전통적 분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을 보여준다. 구조나 기법이 주제 발현을 위해 마치 미로를 찾아가듯 독자를 낯설게 하면서 습관화된 시선에서 허물을 벗듯 자유롭게 전개되고 있다.
기행수필을 닮았으면서도 전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새로운 시선, 정물화된 무생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유의미화하고 있다. “답답하다. 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하는가. 시방 이 땅을 밟고 있는 후인들은 들어보라. 자네는 현실에 자족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사는 거니. 내로라는 사학자들 또한 이름만 내걸고 있는 거니. 누구일거라는 추측만 있으니 참으로 속이 탄다. 왕릉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 둘레돌 ․ 십이지신상 ․ 난간 ․ 석물들이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었지 않는가. 석조물의 조각수법이 신라인의 예술적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며, 후대 능묘의 중요한 본보기 자료가 된다면서….”(수필 <괘릉>에서) 창작의 단초는 이렇게 능의 주인의 언술에서 찾게 한다.
이어서 해석을 위한 대화가 서두의 능 주인의 대사-일종의 시놉시스-발제를 중심으로 나그네, 경주소나무, 무인석, 12지신석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그 얼굴을 드러낸다. 언어적 낯설게 하기의 방법일 것이다. 기하학의 도입이다. 중심적인 개념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난점을 벗어나기 위한 미로찾기와도 같은 무한소개념의 도입은 일견 독자를 당황하게 하지만, 고정화된 식상한 시선에서 사유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결미의 해석을 통한 의미화, ‘능 주인이여, 너무 서운히 생각마소.’ -후인이 당신을 몰라봤어도 괘릉 주변에 치장된 조각과 석물들은 당대의 가장 우수한 예술품이라 표기하고 있다. 그런 걸보면 당대 후인은 생전에 치국의 업적을 존경의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모신 게 분명하다. 변명 같지만 릉의 주인을 모르는 건, 역사적 어떤 연유로, 어느 대에서 분별없이 흐려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그네의 가슴에 불붙듯 일어나는 이 엄청난 힘,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꿰뚫고픈 의욕과 의문이 솟구칩니다. 그러나 …’(수필 <괘릉>에서)의 기교는 통상적인 문법에서의 정형화된 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을 대상을 바라보게 한다.
3. 나가면서
어떤 측면에서 우리의 일상은 지루하고 무료하다. 하지만 엔디・워홀이 허섭스레기에 불과할 재료들을 이용하여 일상의 미학이나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었듯이, 일상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새롭게 일상을 바라보게 되며, 삶 자체에 대한 경이를 맛보게 되는 경험을 문학을 통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은희의 수필은 다분히 새롭다. 그 새로움은 바로 해석과 낯선 기교에 있다. 같은 대상이라도 대상과 사물을 뒤틀어보거나 새로운 상(안티테제)으로 바라보는 미로찾기와 허물벗기에서 변화된 의식과 새로운 미적 감각에 예술적 감흥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에서 이런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보지는 않지만, 수필의 일상성을 뒤집기 위한 시도로 보아 일련의 그의 창작적 시도가 변화에 민감해야 할 수필작단에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움베르토 마투라나의《인식의 나무》, 에코의《장미의 이름》에서 보여준 미로찾기의 형상화를 그의 작품에서 보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그 기법이 새롭다하더라도 인간존재의 규명이라는 수필문학의 절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면 그건 공염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한 것은 이은희의 수필이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수필문학의 본질인 사유와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게 한다. 그의 행보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상렬 문학평론가<펌>
첫댓글 "일상에 대하여 타자가 발견하지 못하는 사물에 예민한 촉수를 가하여 내재한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이런 상상력의 동원은 용이하지 않다~
작가의 창작 태도는 비약하면 '문학적 낯설게 하기'~
작가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시각'을 압축한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