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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기억하기,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기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우리는 모두 슬픔을 느끼면서 산다. 채울 수 없는 무한한 욕망을 가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이 빈자리는 항상 우리에게 슬픔이라는 정서를 강요한다. 그 슬픔을 우리는 잠시의 즐거움으로 다만 잊고 지낼 뿐이다. 하지만 슬픔을 잊어버릴 때 우리의 삶은 방향을 잃어버린다. 슬픔은 내가 채우지 못한 나의 욕망과 나의 꿈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잠시의 쾌락에 몸을 맡기면 이 슬픔은 사라지지만, 그 슬픔과 함께했던 나의 시간도 그 슬픔의 원천인 나의 욕망과 꿈도 역시 사라지고 만다. 세상의 진실이나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찾는 길은 우리의 삶에 각인된 이 슬픔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김양숙의 시들은 슬픔이라는 우리의 근본적인 정서를 불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로 변화시켜 다시 기억 속에 각인시킨다. 그래서 슬픔과 함께했던 과거의 시간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든다. 그가 시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가 되어서 슬픈 첫눈과
누구에게는 상처로 남는 눈밭에 찍혀있는
발자국의 뒤편을 그린다
다시 시라고 읽었다
시는 오래된 골목에서 태어나 골목에서 자란다는 말
시는 캄캄한 풍경으로부터 온다는 말
끝내는 그 풍경을 딛고 일어선다는 말을 모두 믿기로 했다
- 「시여서 슬프고, 시가 되지 못해서 슬프다」 부분
“오래된 골목” 같은 그리고 “캄캄한 풍경” 같은 슬픈 기억의 미로 속에서 시인은 시를 찾고 있다. 시여서 슬픈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끝내는 그 풍경을 딛고 일어”서는 그 힘을 얻는 것 역시 그 슬픈 기억 속에 존재한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시를 쓴다. 그의 시 세계에 좀 더 다가가 보자.
2. 기억과 슬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무엇인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 있다. 존재를 증명할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는 항상 없는 것으로 증명되고, 그것은 영원한 거짓말이 된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사막의 비유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사막에서 시간이라는 말은 덫이다
걸려들면 무엇이든 삼키는 것이 사막의 본능이다
더 이상 삼킬 눈물이 없을 때
언제나 같은 거리를 두고
지구 밖의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미라지도
거짓말의 범주에 속했다
태어나지 못한 행성의 계절에 달이 뜨고
잎이 변하여 가시가 되는 시간에도
사막의 비밀은 영원히 거짓말로 지속될 것이다
룩소르에서 후루가다까지 가는 길
오래된 미래의 시간을 꺼내어 펄럭이는 모래바람은
기억의 단층 속으로 4시간 남짓의 시간을 유린해 버린다
- 「사막과 거짓말 사이」 부분
사막에서 시간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는 사막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시간 그 자체가 거짓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바로 이 사막의 시간을 “오래된 미래의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를 소멸시킨 오래된 시간이 사막을 만들었지만 지금의 시간 역시 미래에는 이 사막의 시간과 같은 사라진 것들의 시간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억의 단층”이다. 사막에서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 단층처럼 선명한 기억을 구성하고 있다. 김양숙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바로 이 삭막한 사막 속에 남아있는 기억의 단층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기억은 모두 슬픔을 함유하고 있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우리의 삶은 욕망의 좌절의 연속이고, 그 좌절은 슬픔이라는 정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신이 베어낸 파도를 등에 지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고래가 비취색 살냄새를 그리워하오 피가 도는 비린내를 찾아 떠난 극지의 바다 떠돌던 유빙의 행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소 바다 위에 종족의 문양을 그리는 고래의 꼬리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를 끌고 가오
- 「고래, 겹의 사생활」 부분
시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의 향기처럼 고래의 기억이 과거 속으로 시인 자신을 이끈다. 그 기억 속에서 고향집 해변, 바다와 함께했던 아버지, 어머니의 삶, 그리고 4.3 때 죽은 외삼촌 등을 다시 만난다. 하지만 그 기억 속에서 본 과거는 안온하거나 행복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기억 속에는 고통과 슬픔이 스며있다. 그 기억과 슬픔의 관계에 대해 다음의 시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대를 따라가다 그림자를 놓치고서야 오랫동안 디뎠던 어둠이 그대였음을 알았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견뎠던 어둠의 집
...(중략)...
외로움을 견딘다는 것은 기울기가 다른 저울 위에 올라 수평을 유지하는 일과 같아서 출렁거릴 때마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더 안쪽으로 휘어지는 엄지발가락 어둠의 시간은 저 혼자 저물어 밤은 낮으로 얼굴을 바꾸고 낮은 밤으로 배경을 바꾸었다
어둠이 그대를 지우고 나면 내가 남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지워진다는 바람과 물의 말이 가슴을 관통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상처가 굳어져 뼈가 될 때까지 휘어지는 엄지발가락을 그냥 두기로 했다
- 「무지외반증」 부분
우리의 삶은 무지외반증을 겪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항상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고통을 참기 위해 힘을 주며 살아오는 일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통의 근원인 발가락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과 슬픔을 지우기 위해 그것의 근원을 없애고 지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잠시 잊을 뿐이다. 시인은 그 고통을 감내하기로 한다. 그것이 주는 고통을 그대로 기억하고 받아쓰기로 한다. 이렇게 고통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시인은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까치발을 하고 누군가 들어설 것 같은 기다림의 골목
깊은구지에는 집집마다 밖으로 낸 창이 하나씩 있다
그 창으로 700년을 살아온 느티나무를 본다
느티나무가 그리워하는 건
골목을 채우던 아이들 웃음소리인가
집집마다 피어오르던 굴뚝의 연기인가
역사의 모서리에 기대어 앉은
할아버지의 바튼 기침소리가 창을 넘는다
700년 동안 몸 안에 담아 놓은 일상의 기록이 역사가 되듯이
바람의 쇄골은 여러 개로 분절되어 골목마다 숨어 있고
수많은 천둥과 벼락을 삼켰던 기억과
빛을 가둔 어둠이 더께가 되어
딱딱하게 등을 내밀고 있다 해도
텅 비어 있는 너의 그림자를 증언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죽은 자의 말을 듣고 산자에게 침묵하는
너를 본다 그냥 침묵을 본다
- 「기픈구지의 느티나무」 전문
시인은 이 시의 느티나무에 두 개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없는 것과 떠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과 “천둥과 벼락을 삼켰던” 공포와 광란의 기억과 “빛을 가둔 어둠이 더께가 되어” 간 절망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자신의 몸속에 그 기억을 새겨넣고 있는 느티나무를 시인은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기억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느티나무에 시인은 답답해 하고 있다. “텅 비어 있는 너의 그림자를 증언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진술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죽은 자의 말을 듣”지만 “산자에게 침묵하는” 느티나무의 침묵에 시인은 조용히 항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하는 느티나무로 하여금 그 슬픈 기억들을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영매로서의 시인의 역할이라고 김양숙 시인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 숲에 가면 머릿수건 깊숙이 눌러 쓴 어머니가 생솔가지 태워서 만든 잉걸위에 무쇠솥뚜껑 뒤집어 올려놓고 가을 햇볕에 채 썰어 말린 생길이차 덖는 향기가 가득하다
덖는다는 것은 흉터를 지우는 방법일까 찢어진 목젖을 타고 올라온 4.3의 눈물이 무쇠솥뚜껑 위에서 천천히 말라가고 외로움의 족적이 등을 돌려 누울 때까지 덖는다
...(중략)...
다시 그 숲에 가면 어머니의 외로움은 굽은 등을 끌며 바삭거리고 나는 어머니의 외로움의 깊이가 궁금해져 생길이차를 마신다
- 「외로움의 보관법」 부분
이 시에서 무말랭이를 덖어 만든 생길이차를 마시는 행위는 바로 시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말랭이차에 녹아 있는 어머니의 그리움과 슬픔을 우려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묻어두지 않고 은은한 슬픔으로 다시 재현하는 일이야말로 시가 해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다. 어머니는 무를 기르면서 또 그것을 말려서 차를 만들면서 모진 세월을 이겨내 왔다. 그 세월 속에서 4.3의 고통과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겪으며 무말랭이처럼 말라가며 늙어가셨을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기록하여 그 기억의 봉인을 풀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어머니의 슬픔을 잊지 않고자 한다.
3. 부재와 사랑
우리는 나 아닌 다른 대상과의 결합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럴 경우 사랑은 소유로 변질되기 쉽다. 대상을 소유하거나 반대로 내가 대상에 소유되어 각자의 존재가 사라질 때 완전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마치 거품으로 사라진 인어공주의 사랑을 고귀한 사랑으로 생각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외이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부재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없는 존재를 사랑할 때 그 존재와 나의 간극이 더욱 큰 사랑의 깊이를 만들어 낸다.
시인은 바로 이 부재의 존재에 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꽃을 보내고 난 뒤의 일이다
몸속에 달구지 못해 푸시시 거리는 불꽃이 더 있었다
불꽃의 허기를 잠재우려 뉴스 속에 접혀있던
무채색의 사내를 꺼내어 손끝으로 문질렀다
불에 덴 내장을 감추고 있던 사내
몸은 지워지고 펄펄 끓는 소문이
11월의 정수리에 둥지를 틀었다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분절된 구호는 조각조각 부서지며
바람 쪽으로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입에서 입으로 번지는 풍문에 막혀
수척해진 나뭇잎이 허공에서
마지막 남은 피에 불을 붙인다
몸을 태운다
아 풍문이 뜨겁다
- 「단풍제」 전문
시인은 꽃을 보내고 나서 오랜 기간의 그리움이 단풍으로 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이 불꽃처럼 피어나 몸을 태운 것이 단풍이라는 것이다. 이미 떠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체가 없고 그저 소문이나 풍문으로만 전해진다. 하지만 그 풍문이 사실이었음이 “마지막 남은 피에 불을 붙인” 단풍의 모습을 통해 확인된다.
시 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없는 것을 믿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확실한 것을 원한다. 우리 시대 그것은 바로 물질이다. 이 물질로 증명되지 않는 꿈과 믿음과 소망과 같은 가치는 소문으로만 들리거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시인은 이 꿈과 믿음을 다시 불러내는 사람이다. 그것을 통해서 아직 불꽃처럼 뜨거운 사랑의 존재를 믿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존재로서 시인이 느끼는 자신의 시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빗장이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일 년에 한 번씩 타오르는 저 불길
어디에 불씨를 숨겨두었을까
내게도 저런 불씨 숨어 있어
한 번씩 활활 타오를 때가 있다
- 「단풍·1」 전문
시인은 단풍을 숨어 있다 피어나는 불씨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활활 타오르는 격렬한 정서적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은 “빗장”을 풀고 숨겨둔 무엇을 꺼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 숨겨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김양숙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녀는 꽃과 함께 피었다 지는 생애
작두 위에서 오방색으로 피었다
하미를 입에 물고 작두날을 세운다
입에서 나가는 험한 말은 봉하게 해주시고
심장을 찌르는 날이 되지 않게 해주시고
가슴을 겨냥하는 돌이 되지 않게 해주시고
,,,(중략)...
아침에 지는 노을은 꽃으로 피어나게 해주시고
저녁에 지는 노을은 별의 배경이 되게 해주시고
공수 대신 포장지 번지르르한 시 제목 하나 받아들고
어디로 숨어야 하는 걸까
날개 봉한 철새들은 바람을 타고 철원의 빈들로 숨어들고
오래전 지인이 건네 준 작두콩 두 개 아직도
서랍 속에 숨어 마른 날을 세우고 있다
태어나지 못한 시를 위해
작두에 오를 날을 기다리는 나의 봄
뼈에서 발라낸 수식어를 버리려고
신명 오른 맨발이 작두 위에서 오방색 꽃을 피운다
- 「꽃, 작두를 타다」 부분
시인은 무당의 신명을 바라보며 시인의 역할을 생각한다. 먼저, 시를 통해 말해지는 말이 험한 말이 되지 않도록 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연에 있다. 아침에 지는 노을과 저녁에 지는 노을을 꽃과 별이 되도록 해달라는 말이다. 둘 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원이다. 그것들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다른 아름다운 구체적 사물로 재현되어 나타나길 바라고 있다. 시 쓰기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라지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을 감각적 이미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는 훌륭한 시인이다. 시인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시를” 기다리며 오늘도 언어의 작두 위에 맨발을 올려놓고 있다.
4. 맺으며
김양숙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 슬프다. 하지만 가슴 아프거나 애절하지 않다.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바꿀 수 있는 재능을 시인은 타고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의 시들에서의 슬픔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슬픔이 우리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나 없이 슬픔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 끊임없는 욕망의 좌절을 경험하고 살기에 우리는 이 슬픔을 피할 수 없다. 김양숙 시인은 이 슬픔을 과장하는 대신 그 슬픔과 함께 한 우리 삶의 기억들을 아름답고 선명한 이미지로 다시 재현해 보여준다.
골목어귀 돌담에 기대어 피어난
눈물을 닮은 꽃
그녀의 새끼손톱을 닮은 꽃
잠들지 못하고 달빛에 제 몸을 태우고 있다
- 「찔레 혹은 솔레비라 부르는」 부분
시인은 찔레꽃의 이미지를 “눈물을 닮은 꽃”이라 말한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자신의 시심이기도 하고 그가 쓴 시 자체이기도 하다. 새끼손톱처럼 작고 하찮지만 아름답게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이 찔레꽃은 어눌한 몇 마디 말로 우리의 기억과 정서를 환기해내어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일으키는 시의 비유이다. 이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슬픈 기억들을 감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준다. 김양숙 시인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으로 번져오는 이 아름다운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고 말하면서 해설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