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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역사와 법궤의 이동 경로
A. 성막의 역사
1. 광야 생활 동안의 성막의 역사 :
이 성막은 시내산에서 애굽을 떠난지 2년째 되는 해, 곧 제2년 1월 1일 유월절 2주전에 완성되었다(출40:2, 17).
세워진 성막 주위에 레위 자손들이 진을 쳤는데 고핫 자손은 남쪽에, 므라리 자손은 북쪽에, 게르손 자손은 서쪽에 진을 쳤고, 동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그들은 통례적인 예배(제사)가 드려지지 않았다(암5:25).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서 행진케 하셨고, 둘째는 대적들과 전쟁 중에 있었고, 셋째는 성막을 정상적으로 건립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막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제단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2. 가나안 정착 후의 성막의 역사 :
그곳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고 사람의 무덤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장소였기에 성막의 임시 정착 장소로는 적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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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사 시대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배교를 거듭하였고, 성막 예배는 형식적으로 수행된 적이 많았다. 그 당시 사무엘은 4대 성읍(라마, 미스바, 벧엘, 길갈)을 순회하며 통치하였다(삼상7:15-17). 이는 곧 지성소가 비지역화됨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신앙생활의 큰 혁명이었다.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사울을 피하여 요나단의 도움으로 망명해 온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자다(삼상21:1-6). 이 사실로 볼 때 사울 시대에 성막이 놉땅에 있은 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기브온에 있었던 성막은 모세 생존 시대에 만들어졌던 성막과 동일한 것으로 추론된다(대하1:3).
3. 성막과 성전의 수난사
성경에는 이러한 전쟁과 재화가 백성들과 함께 성전에도 미친 흔적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대하12:9; 28:24) 성전은 두 번 탈취 당했는데 첫 번째는 여호야김 왕(대하36:7)때이고, 두 번째는 여호야긴 왕(대하36:10)때이다.
(대하36:19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이것은 솔로몬성전의 최후도 되고, 모세의 장막의 최후도 되지만 모세 성막의 최종이라고 할 수 있다.
B. 법궤의 이동 경로
성막이 실로로 이동하여 정착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성막이 분해되고 제단이 새로이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성막이 분해되고 제단이 새롭게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레위자손이 분산됨에 따라 새로운 제단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제단 분립의 시작이 되었고(삿19:1-31) 벧엘에 법궤가 이동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삿20:27).
1. 실로 : 엘리 제사장 때 법궤가 실로에 있었다(삿18:31; 삼상4:3).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가 존재하고 있는 실로의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무시하였다.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들은 이방의 풍속과 우상숭배에 쉽게 물들게 되었고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마저도 잊어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사사기의 전체 흐름(범죄→하나님의 심판→회개→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악순환이 거듭 반복)이기도 하였다.
1-1 벧엘 : 삿20:25-27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벧엘로 올라가서 화목제와 번제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법궤도 거기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수18:1에서는 실로에 성소가 세워졌다고 나와있고 삼상1:3; 2:14; 3:21; 4:3에 의하면 법궤가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기게 될 때까지 실로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삿21:9에는 여호와의 절기가 매년 실로에서 열린다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여러 사실을 종합해보건대 성소와 법궤는 원래 실로에 있었으나 삿20장에서의 이스라엘의 심각한 내전(內戰)이 수행되는 동안만 법궤가 벧엘로 옮겨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에벤에셀 : 암울했던 사사시대 말기의 블레셋과의 전쟁은 법궤를 에벤에셀로 옮겨간 배경이 되었는데(삼상4:1) 사울 왕 당시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와중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법궤를 미신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며, 결국 법궤는 빼앗기게 된다(삼상4:1~11).
※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앞세우고 나아가 전쟁에 임한 예는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한다(수6:12~16,20; 섬성4:3,4). 그러나 법궤는 그 임재의 상징일 뿐이고 그 궤 자체에 어떤 신통력이 깃들어 있어서 전쟁에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보다 법궤를 더 의지함으로써 종종 전쟁에 패하는 쓰라린 경험을 하였다(삼상4:5,11,17~22).
3. 아스돗 : 에벤에셀에서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아스돗으로 가져다가 다곤의 신상 앞에 두게 되는데 그 일이 있은 후 다곤의 신상은 부서지고 독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원인모를 고통을 당하게 된다(삼상5:1-7).
4. 가드 : 하나님을 모독하던 블레셋인들에게 하나님은 연속적인 징계를 통하여 그들을 공의로 징벌하시는 심판자이심을 밝히셨다. 이로인해 블레셋 다섯 방백들은 긴급대책회의을 열어 법궤를 다곤 신당이 없는 가드로 보내는 것으로 결정한다(삼상5:8). 그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독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자 또 다시 에그론으로 옮겨지게 된다(삼상5:9-10).
5. 에그론 : 에그론 지방의 사람들 역시 앞서 당한 동일한 고통을 그들로 당하게 되자 법궤를 이스라엘의 본국 벧세메스로 돌려보내게 된다(삼상6:2-12).
※ 이렇게해서 언약궤가 이방 땅인 블레셋 지방에 머물러 있었던 기간은 7달이었다(삼상6:1).
6. 벧세메스 :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제사도 드렸지만 법궤를 들여다 본고로 (오만)칠십인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삼상6:13-19).
법궤의 최종 귀착지는 옛날 법궤가 위치했던 실로에서 가까운 기럇여아림으로 결정되었다. 법궤는 이곳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보관되었다고 기록되었다(삼상6:20-7:2).
8. 오벧에돔의 집 :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20년을 머문(삼상7:1-2) 하나님의 법궤는 또 한 번의 블레셋과의 전쟁 때에 사울 왕의 명령에 따라 법궤를 기럇여아림에서 베냐민 기브아로 옮겨와 전쟁을 치르게 되고 여기서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둔다(삼상14:16-18). 그 후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다윗으로 바뀐 뒤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는 다윗성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 때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예루살렘(다윗성)으로 옮기는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는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뛰므로 법궤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법궤를 붙들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웃사는 법궤를 만지는 실수를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그 일로 인해 웃사는 그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삼하6:1-7). 이 사건으로 인해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다윗성)으로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 거기서 3달을 지내게 되는데 법궤로 인해 그 집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삼하6:9-11).
9. 예루살렘 다윗성 : 오벧에돔의 집이 법궤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자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기쁨으로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다윗성)으로 옮겨와 자신이 준비한 장막가운데 안치하게 된다(삼하6:13-17a). 다윗은 법궤를 무사히 운반한 데 대해 감사하고 아울러 법궤를 모신 장소를 성별하기 위한 봉헌식을 드렸다(삼하6:17b-19).
※ 이렇게 하나님의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진 후 다윗에 의해 다윗성(예루살렘)으로 옮겨지기까지 사실상(삼하6:3,12,17) 약 40년간 실로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10. 솔로몬 성전 : 솔로몬 왕 때에 성전이 건축되고 법궤와 기타 거룩한 기구들도 성막에서 성전으로 옮겨졌다(왕상8:1-4; 대하5:3-5).
출처 성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