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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초기 시의 구조적 통일1 / 김명옥 엘리엇의 시는 『황무지』 The Waste Land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시와 그 이후의 시의 주제와 기법이 확연히 구별된다. 엘리엇에 의하면 시인은 경험을 산문으로 직접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느낌이나 정서로 표현하되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여 일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한다.1) 여기서 특수한 느낌과 정서를 독자가 공감하도록 전달하는 방법은 엘리엇의 초기 시와 후기 시에서 각각 다른 방법으로 모색되고 있다. 시인으로서 엘리엇이 중점을 둔 기법은 객관적인 표현 방법으로 ‘객관적 상관물’ objective correlative을 중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서를 유발하는 ‘상황’이나 ‘일련의 사물’ 혹은 ‘사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술에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을 찾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특수한 정서의 공식인 사물들, 상황, 일련의 사건들이다. 감각적인 경험으로 종결되는 외적인 사실들이 제시될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유발되는 그런 것들이다.2) 바로 이러한 객관적인 상관물들이 주제의 맥락에 따라 연결사를 생략한 채 주로 병치의 기법으로 나열하는 표현이 그의 초기 시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엘리엇은 표현의 객관성을 위해 시 속에서 극적 상황이나 극적 장면들을 제시하고 이들 단편적인 장면들을 모자이크처럼 연결의 맥락없이 나열함으로써 자연히 발생하는 시의 모호성 내지는 난해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그의 또다른 기법의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아나바시스에 부친 서문」 Preface to Anabasis에서 자신의 시가 갖는 모호성에 대한 변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의 모호성은 일련의 연결들, 설명하고 연결하는 부분들을 생략하는 데서 기인하며 이는 결코 맥락의 부재나 암호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생략법의 사용을 두둔하자면 연속적인 심상들은 서로 일치하고 집중되어 하나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독자는 그 순간 각각의 타당성을 순간마다 묻지 말아야하며 오직 그 심상들이 그의 기억속에 연속적으로 남아 있도록 허용하여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효과가 생겨나도록 한다.3) 바로 이러한 엘리엇의 발언은 자신의 어려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그 감상법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의 시의 기법에 관해서도 중요한 힌트를 주고 있다. 즉 시에 반복되어 표현되는 심상들이 서로 연결될 때 독자의 마음 속에서 이들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통합된 인상을 낳게 된다. 이처럼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직접 표현하는 대신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극적 장면이나 상황을 제시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느낌이 유발하도록 할 뿐 아니라 동일한 혹은 유사한 심상들을 반복 제시함으로써 그로부터 자발적인 감정적 반응이 일어나도록 유도하여 단절된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된 효과로 묶어주게 된다. 엘리엇의 극에 대한 관심은 주로 객관적인 시 표현의 필요성에서 온 것이었다. 왜냐하면 극에서는 극작가가 의도하는 주제와 느낌을 극 중의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표현하기에 극의 장면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가 의도하는 감정적 반응을 야기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엘리엇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에서 객관적 표현의 방법을 발견하였고 이를 자신의 시의 기법으로 응용하여 그의 시 이론의 근간을 마련하고 있다. 한편 그의 시의 표현이 주로 말의 음악성에 의존하게 된 후기 시 이후에는 그의 극에 대한 관심이 자연히 ‘시극’ Poetic Drama으로 발전하여 시보다는 극 창작에 몰두하게 되었다. 특히 엘리엇은 시의 극적 상황에서 유발되는 정서를 ‘구조적 정서’the structural emotion4)라고 부르고 이러한 정서로 구조적인 맥락이 이루어질 때 이를 ‘정서적 구조’ the emotional structure5)라 명명하여 주로 단편적인 부분들을 병치하는 자신의 초기 시에 시적 이론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엘리엇 자신이 제시하는 시 이론에 근거하여 그의 초기 시들이 어떤 구조적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프르푸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와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그리고 「서시들」 Preludes을 포함하는 『황무지』까지의 시들이 어떤 구조적 맥락으로 전개되어 연결사없는 시의 단편들이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지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나아가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엘리엇의 대표시인 『황무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어떠하며 이러한 시각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를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엘리엇이 1917년에 쓴 「프르푸록」은 주인공의 내밀한 독백이 그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단편적인 장면들과 병치되어 전개된다. 일련의 유사한 심상들과 장면들이 야기하는 공통된 정서들을 기억 속에 담고서 시를 읽어가는 독자는 주인공의 감정적인 갈등의 맥락으로 전개되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추적해 갈 수 있다. ‘당신과 나, 그러면 갑시다’로 시작되는 화자의 첫 제의는 곧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에 비유된 저녁과 함께 길고 복잡한 길의 묘사로 이어지고 있어 주인공이 처해 있는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6) `당신과 나, 그러면 갑시다, 지금 저녁은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를 지나고 싸구려 일박 여관의 안식없는 밤 중얼거리는 골목을 거쳐 굴 껍질이 널린 톱밥의 식당을 통과해 갑시다. 음흉한 의도을 띤 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져 그대를 엄청난 문제로 끌어가는 길을 갑시다. 아, ‘무슨 일이냐’고 묻지 마세요. 우리 가서 방문합시다. 방 안에서 여인들이 왔다갔다 하며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한다. 유리창에 등을 비비는 노란 안개 유리창에 주둥이를 비비는 노란 연기 저녁 구석구석을 혀로 핥고서, …… 테라스 옆으로 슬쩍 빠져 껑충 뛴 다음 아늑한 시월 밤임을 알고서 집 주위를 한번 빙 돌고난 후 잠이 들었다. 흐름의 맥락을 추측하기 힘들 만큼 단편적인 장면들과 독백으로 구성된 이상의 처음 부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자’고 제의한 화자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독자로 하여금 행동으로 옮기기 힘든 상황임을 짐작케 한다. ‘마취된 환자’에 비유된 저녁 시간, 길고 지루하게 뻗어 있는 ‘길’, 서서히 움직이다 정지한 ‘노란 안개’ 등은 화자의 그러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객관적 상관물’들이다. 그리고 ‘거리’는 ‘여인’, ‘노란 안개’와 함께 반복 등장함으로써 시의 맥락을 추측케한다. 즉 ‘거리’ 심상은 주인공 프르푸록의 외롭고 소외된 환경을 암시하는 심상으로 반복 등장하고 ‘굴껍질’로 대변되는 ‘음식’ 심상은 ‘토스트’와 ‘차’로, 나아가서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으로 변형되어 반복, 등장하여 화자의 주된 관심이 신체적인 허약함을 극복하는 일이며 또한 ‘여인’이 있는 방은 그의 방문의 목적과 성격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준다. 한편 ‘노란 안개’, ‘노란 연기’의 심상은 ‘마취된 환자’와 연결되어 행동력을 상실한 주인공의 무기력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알게 해준다. ‘가자’의 제안으로 시작된 독백이 여인들이 있는 방 그리고 나른한 안개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장면들과 병치되고 주저하는 주인공의 주요한 관심사의 하나인 ‘시간’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지고 ‘시간’에 대한 독백은 주인공이 의식하는 타인들의 반응으로 이어져 자의식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무기력한 상황을 극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정말 ‘한번 해 볼까?’ ‘해 볼까?’하고 망설일 시간이 있으리라. 머리 한복판에 대머리진 채 몸을 돌려 층계를 내려갈 시간은 있다-- (그들은 말하리라, ‘그의 머리가 점점 벗겨지네!’) 내 모오닝 코우트, 턱까지 빳빳이 치받친 칼라, 화려하고 점잖은 넥타이는 소박한 핀으로 돋보인다…… (그들은 말하리라, ‘허나 그의 팔다리는 가늘기도 해라!) 내가 감히 우주를 뒤흔들어 볼까? 한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한순간 뒤바뀔 결단과 수정을 위해. 주인공은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우주를 뒤흔드는 엄청난 일인양 과장하나 실제로는 발길을 돌려 층계를 내려가는 일임을 알 수 있으며 끊임없이 결단하고 또 취소하면서 망설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을 주인공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임을 그의 독백으로 알 수 있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타인의 반응과 ‘토스트와 차를 들기 전’ Before the taking of s toast and tea에 수없이 결단하고 수정할 시간이 있다는 변명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문제’를 앞두고 망설이는 주인공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단조로운 삶 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에서 탈피하고 싶은 욕망과 점차 가까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의식되는 여인들의 모습으로 목적을 행동으로 결행하려는 의지가 강렬해지는 반면에 자신의 신체적에 결함에 대한 여인들의 무자비한 반응이 그로 하여금 갈등을 증가시킨다. 나는 그 눈들을 이미 알고 있다. 그 모두를--- 틀에 박힌 말로 너를 꼼짝 못하게 하는 눈들, 내가 핀에 꽂혀 사지를 뻗은 채 꼼짝 못할 때 내가 핀에 꽂혀 벽 위에서 버둥거릴 때 그 때는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나를 이토록 어지럽게 하는것은 옷에서 풍기는 향수 때문인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혹은 쇼올을 걸친 팔, 그러면 해볼까? 그러나 어떻게 시작하지? …… 나는 차라리 침묵의 바다 밑을 어기적거리는 한쌍의 거친 게다리나 되었더라면. 그가 의식하는 여인의 시선과 무자비한 말은 마치 핀처럼 그를 벽에 못박아 마치 표본된 곤충처럼 꼼짝 못하게 한다. 반면에 매우 육감적인 여인에게서 풍기는 ‘향수’와 ‘팔찌를 낀 허옇게 드러난 팔’ Arms that are braceleted and white and bare은 그를 자극하여 조급한 마음을 갖게 하여 결행의 방법을 스스로에게 반문해 본다. 여기서 주인공의 의식은 잠시 소강 상태에 빠져 멈추게 되고 결국 주저와 행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의 심정은, 그로 하여금 바다 밑을 어기적거리는 ‘게다리’가 되고 싶어한다. 이는 바다의 ‘게’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상대방의 반응이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의식으로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며 주인공의 내밀한 염원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상관물인 셈이다. 화자는 결국 ‘엄청난 문제’의 결행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자신의 무기력한 성격적 결함과 자신의 목적 자체의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자신은 목숨을 각오하고 뜻을 관철시키는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 같은 선지자도 아니며 자신이 결행하려는 일이 죽음을 각오할 만한 큰 일도 아님 I am no prophet--and here’s no great matter을 솔직히 고백하게 된 지금 자신의 일을 ‘우주를 뒤흔드는’ 일로 과장했던 이전의 자세와 상반되는 태도를 보인다. 나아가서 자신을 ‘광대’ the Fool로 까지 비하시키는 프르푸록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극복하려는 소극적인 시도를 체념의 어조로 독백한다. 나는 늙어간다… 늙어간다… 바지 아래를 걷어올려 입어보련다. 뒤로 머리를 가를까? 복숭아를 먹어볼까? 흰 플란넬 바지를 입고서 해변을 걸어보자. …… 우리는 붉은 갈색의 해초를 두른 해녀 옆에서 바다의 방에서 서성거리다가 인간의 소리가 우리를 깨워 물에 빠졌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초조하여 자신의 복장과 용모를 바꾸려는 뜻을 표명해 보지만 이것 역시 그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독백이기에 행동으로 실행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망설이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주인공의 우유부단함과 용모와 복장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에 대한 지나친 자의식에서 나온 프르푸록의 독백임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제 주인공의 독백이 막을 내리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답답한 실내의 장면은 시원한 바닷가의 장면으로 바뀌어 프르푸록의 의식 속에 떠오른다. ‘방’ ‘찻잔’ ‘안개’ ‘연기’ ‘좁은 거리’ ‘램프 불’ 대신 ‘파도’ ‘바람’ ‘바닷 처녀’ ‘해초’ ‘해변가’ 심상의 등장은 주인공이 갈등의 상황을 노출시킨 무의식 속에서 벗어났음을 말해준다.7) 최종 행은 지금까지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갇혀 드라마를 연출했던 ‘너와 나’라는 극적 인물들이 인간의 소리에 자극을 받아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고 주인공 프르푸록의 극적 독백이 막을 내림을 보여준다. 끝까지 주인공은 자신의 ‘엄청난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구나!’ It is impossible to say what I mean!라는 안타까운 진술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모든 것을 적나나라하게 고백할 수 없는 심중을 짐작하게 된다. 여기서 시인 엘리엇은 프르푸록의 전체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객관적 상관물’을 이 시의 첫머리에 제시하고 있다. 즉 단테의 『지옥편』에서 인용된 몬떼페뜨로 Guido da Montefeltro의 이야기가 이 시의 ‘서구’ epigraph로 소개된다. 현생의 지은 죄로 지옥 속에서 고통받는 그는 자신이 저지른 수치스런 죄목을 창피해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지만 지옥에서 살아 돌아갈 자가 아무도 없기에 단테에게 고백하겠노라는 내용이다. 우리 독자는 이러한 몬떼페뜨로의 고백 장면을 통해 프르푸록이 그 누구에게도 고백하기 힘든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 즉 지나친 자의식으로 목적지를 향해 한걸음도 내딛지 못한 ‘겁장이’ I am afraid의 고백을 엿들은 셈이다. 「프르푸록」이 주인공의 내적인 갈등을 독백과 그의 의식속에 떠오르는 단편적인 장면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은 중년 여인과 젊은 청년 사이에 진행되는 미묘한 갈등의 이야기를 여인의 대사와 청년의 독백으로 보여준다. 이 시는 청년이 여인을 방문하는 계절에 따라 3부로 나뉘고 여인이 청년과의 은밀한 관계를 제의하나 청년이 여행을 구실로 그녀의 제의를 거절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특히 이 시에는 서로 상반되는 생각으로 팽팽히 맞선 두 사람의 감정적 갈등이 배경 장면과 ‘음악’ 모티프 그리고 문장의 종류에 그대로 반영되어 표현되는 만큼 이들은 시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객관적 상관물’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1부의 첫 연은 12월 안개낀 오후 여인이 청년의 방문을 위해 꾸며놓은 방에 대한 청년의 묘사로 시작된다.8) 연기와 안개가 자욱한 어느 12월 오후 ‘제가 당신을 위해 오늘 오후를 비워 두었어요’라고 말하며 당신은 그 장소를 마련했다--마치 우연인 듯 보이도록-- 어둑한 방에 네 개의 촛불 머리 위 천정에 동그란 네 개의 불빛 말할 것이나 안 할 것이나 모든 것이 준비된 쥴리엣의 무덤같은 분위기였다. …… ‘이 쇼팽은 너무 친근해서 그의 영혼이 바로 친구들 사이에서 소생할 듯 생각되요. 연주실에서 손으로 비벼 문제를 일으킨 꽃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을 두,세 친구 사이에서지요.’ ---이렇게 이야기는 가벼운 욕망과 조심스레 느낀 회한 사이로 약해진 바이올린 가락을 지나 아득한 코오넷 소리와 뒤섞여 흐르다가 다시 시작된다. …… ‘이런 장점들을 가진 한 친구를 알게 되다니 우정을 키워주는 그런 친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정말 얼마나 드물고 기이한 일인지요. 제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이러한 우정이 없이―인생은 악몽같겠지요.!’ 여인이 촛불을 밝히고 영혼을 울리는 쇼팽의 음악을 틀어놓아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면 청년은 그러한 분위기를 비극의 주인공인 쥴리엣의 ‘무덤’과 유사하다고 묘사하여 두 사람의 비극적인 관게를 은연중에 암시한다. ‘줄리엣의 무덤’으로 소개된 죽음의 모티프는 2부에서 한 그리스인의 살해 장면으로 이어지고 3부의 최종 구절에서 영원한 결별을 암시하는 여인의 죽음으로 등장하여 여인과의 관계를 끊고 싶은 청년의 심정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음악’ 심상은 특히 여인과 청년의 미묘한 심리적 대결을 반영한다. 배경 음악으로 분위기를 북돋우려는 여인의 의도를 알고 있는 청년은 오히려 정반대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여인의 의도를 묵살코자 한다. 쇼팽의 음악을 영혼을 소생시키는 감흥으로 표현하는 여인의 반응에 대해 청년은 쇼팽을 ‘머리털과 손 끝으로 서곡을 연주하는/ 최근의 폴란드인’ the latest Pole/ Transmit the Preludes, through his hair and finger-tips이라는 매우 해학적인 반응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코넷의 소곡을 ‘변덕스럽고 단조로운’ capricious monotone 곡조라고 표현하여 매우 경박한 반응으로 응수한다. 한편 고상한 음악이 흐르는 방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청년의 심정은 실외로 나가 평범한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자는 제의로 부각되어 있다. ―담배 연기에 취했으니 바람이나 쐽시다, 기념비를 찬양하고 최근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대중 시계에 우리 시계를 맞춥시다. 그리고 반 시간쯤 앉아서 맥주나 마십시다. 여인이 ‘우정없는 인생은 권태로우며 당신이야말로 우정을 나누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내용을 주로 감탄문과 복문을 사용하여 매우 우회적으로 표현한다면 청년은 자신의 심정을 주로 간단한 서술문의 단문으로 표현하여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적 대립을 매우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계절적 배경이 가을에서 다음 해 봄으로 바뀐 2부에서는 여인이 계절에 어울리는 라일락꽂으로 방 안을 장식하고 다시 청년을 초대하여 ‘청춘’과 ‘소생’에 관해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여인은 ‘인생을 손에 거머쥔’ who hold it in your hands 청년이 ‘그것이 흘러가도록 버려둔다’ let it flow from you, you let it flow고 청년의 무심함을 은연중에 일깨우고 ‘자기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흘러가는 인생을 붙잡을 수 있다’는 숨은 뜻을 매우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청년과의 좀더 적극적인 관계를 가져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인의 간접적인 제의에 말없는 미소로 대응하는 청년의 초연한 태도는 여인으로 하여금 점점 대담한 접근을 유발케 하지만 그럴수록 청년의 반응은 냉담해진다. 행복했던 과거를 애상적인 어조로 회상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청년은 ‘팔월 오후의 깨어진 바이올린에서/ 집요하게 울리는 불협화음’ the insistent out-of-tune/ Of a broken violin on an August afternoon에 비유하여 자신의 짜증스런 불쾌감을 솔직히 표현한다. 여기서 여인은 도저히 회유할 수 없는 청년을 그리스의 장군 ‘아킬레스’ Achilles로 격상시키는 반면에 자신의 위치는 연민의 상황으로 비하시켜 상대방의 동정을 얻고자 한다. ‘당신은 불사신이에요. 아킬레스의 발꿈치가 없어요. 당신은 계속 전진할테고, 승리할 때마다 말할테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실패했다고. 그러나 내 친구여, 내가 무엇을, 그러나 내가 무엇을 당신에게 주며 당신은 내게서 무엇을 받을 수 있겠어요? 인생의 여정을 거의 끝낸 사람으로 우정과 동정만을 줄 수 있을 뿐. 나는 늘 여기 앉아서 친구들에게 차나 대접할 거에요…’ 인생의 종점에 다다른 여인이 ‘인생을 두 손에 쥐고 있는’ 무적의 용사같은 청년에게 ‘우정과 동정’을 제의하는 너그러움을 보여 청년의 비정함을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청년과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여 ‘너와 나’의 화제를 이어가는 여인의 대화에 휩쓸리기 싫은 청년은 주로 ‘영국 백작부인’ an English countess, ‘그리스인’ a Greek, 그리고 ‘은행 체납자’ another bank defaulter 등 타인에 관한 기사를 독백으로 전하여 자신과 무관한 일에 일부러 관심을 표명한다. 주로 신문에 기재된 타인의 장면을 전하는 청년의 독백은 그의 도피하고 싶은 심정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면 청년과의 은밀한 관계를 시도하는 여인은 자신의 의중을 우회적인 대사로 직접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냉정을 잃지 않던 청년이었지만 2부의 후반부터 그는 여인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하고 점점 자제력을 잃어간다. 3부에서 청년은 자신의 난처해진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여인을 방문한다. 임의적인 도피를 계획한 청년은 여인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마치 손과 무릎으로 기어오른 느낌’ feel as if I had mounted on my hands and knees으로 묘사하고 있어 해외 여행을 구실로 여인과의 결별을 시도한 청년의 어색한 느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여인의 대화에 일방적으로 미소와 독백으로 응수하던 청년은 해외로 간다는 구실을 내세움으로 입장은 유리해졌지만 오히려 그의 미소는 전과 달리 ‘무겁게 가라앉는다’ falls heavily. 더구나 해외 여행을 구실로 여인과의 결별을 시도한 청년의 유리한 입장을 짐작이나 한 듯 여인은 곧 편지를 쓰도록 권유하면서 끝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마 내게 편지를 쓸 수 있겠지요.’ 나의 침착함이 순간 확 타오른다. 이것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다 ‘나는 요즈음 자주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작은 결코 어떻게 끝날지 모르지요!) 왜 우리가 친구로 발전하지 못했는지’ 나는 미소짓고 몸을 돌리면서 갑자기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처럼 느낀다. 나의 침착함이 녹아 내린다. 우리는 진정 어둠 속에 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는 여인의 제안에 더욱 난처해진 청년은 순간 냉정을 잃게 되고 그러한 청년의 상황은 순간적으로 타오르고 녹아내리는 ‘불’ 심상과 ‘어둠’의 서로 대조적인 표현으로 극화되어 두 사람사이에서 느끼는 청년의 암담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 두 사람 사이를 못내 아쉬워하는 여인의 대사는 보다 솔직하고 대담해지면서 복문 대신 단문으로 바뀐다. 여인이 ‘어쨌든 당신은 편지를 쓸테지요,/ 아마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지요./ 나는 여기에 앉아 친구들에게 차를 대접할거에요.’ You will write, at any rate./ Perhaps it is not too late./ I shall sit here, serving tea to friends.라고 말하여 ‘언제까지나 기다릴테니 반드시 돌아와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를 은연중에 내포함으로써 청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점점 솔직해지는 여인 앞에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겸연쩍어하는 청년은 ‘게다리’가 되어 괴로운 갈등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프르푸록처럼 여러 동물의 가면을 쓰고서 여인과의 거북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끝으로 청년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않는 여인 때문에 해외 여행이라는 구실로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서 여인과 영원히 결별할 수있는 그녀의 죽음을 상상하게 된다. ‘회색빛 안개가 자욱한 오후, 노랗고 붉게 노을진 저녁/ 어느 오후 만약 그녀가 죽는다면’ what if she should die some afternoon,/ Afternoon grey and smoky, evening yellow and rose 하고 여인의 죽음을 상상하고 그 죽음을 알고 난 후 여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어떠할 지를 가늠해 본다. 연기가 지붕 위로 내려오고 펜을 들고 앉아 있는 나를 두고 그녀가 죽는다면 …… 어떻게 느껴야 할지, 아니면 이해하는지 현명한지 혹은 어리석은지, 더딘지 아니면 너무 이른지도 모르면서… 그녀가 결국 유리하지 않을까?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지금--- 이 음악은 성공적으로 ‘서서히 끝나는데’ 나는 과연 웃을 권리가 있을까? 지금까지 말없는 미소와 내면의 독백으로 일관해 온 청년은 두 사람의 관계가 배경 음악처럼 성공적일 수 없음을 깨달고 새삼 여인의 죽음까지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 본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서로 엇갈린 생각으로 팽팽히 맞서 있던 두 사람의 심리적 대결은 청년이 해외 여행으로 외형적인 막을 내릴 수 있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여인의 미련으로 누가 유리한 처지에 있는지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여인과 청년의 심리극은 미완성으로 종결된다. 이상으로 살펴본 「프르푸록」과 「여인의 초상」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외적 혹은 내적 갈등이 대사와 독백으로 진행되는 유사성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 갈등은 주로 일관성있는 심상들, 반복되는 어휘 혹은 모티프의 사용으로 전개되어 전체 시로의 통일성에 기여하고 있다. 이상의 두 시가 주인공들의 심리적 갈등의 내용으로 시의 구조적 맥락을 이루고 있다면 다음에 살펴볼 「서시들」 Preludes은 설화적 맥락이나 연결사없이 주로 심상과 단편적인 장면들을 병치시키고 이들로 부터 유발되는 유사한 정서로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룬다. 엘리엇은 이런 유형의 단편시들을 여러 편 썼으며 「바람부는 밤의 광상곡」Rapsody on a Windy Night, 「창가의 아침」 Morning at the Window, 「보스톤 이브닝 트랜스크립트지」 The Boston Evening Transcript, 「사촌 낸시」 Cousin Nancy, 「헬렌 아주머니」 Aunt Helen 등의 초기 시가 이 부류에 속한다. 4부로 구성된 「서시들」은 1·2부에서 황량하고 누추한 도시의 단편적인 장면을 병치시키고 3부에서는 남녀의 연속적인 동작을 묘사하여 더럽혀진 영혼을 소유한 도시인이 무의미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4부의 마지막 연에서 작중 화자의 진술과 비전을 통해 종합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1부의 시간적 배경은 ‘겨울 저녁’ 6시로 한정되고 ‘스테이크 냄새’smell of stakes로 얼룩진 도시는 ‘그을린 날들의 타고 남은 끄트머리’ The burnt-out ends of smoky days로 그려져 있다.9) 돌풍의 소나기가 발치의 시든 나뭇잎과 빈 터의 신문지같은 누추한 쓰레기를 휘감는다. 소나기는 부서진 덧문과 굴뚝갓을 두드리고 거리 모퉁이에서 마차의 외로운 말이 입김을 뿜고 발을 구른다. 그후 가로등이 켜진다. 누추한 심상들이 즉각적인 동작을 묘사하는 ‘감는다’ wraps ‘두드린다’ beats ‘입김을 뿜는다’ steams ‘구른다’ stamps 등과 결합하여 황량한 도시의 풍경이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다. ‘냄새’ smell ‘발’ feet ‘빈 터’ vacant lots ‘부서진 덧문’ broken blinds ‘거리’ street 등의 심상들은 2·3·4부에서 그대로 반복되거나 유사한 심상들로 변형되어 등장함으로써 누추하고 황량한 도시에 관해 유사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2부에서 시간적 배경은 아침으로 바뀌나 ‘김빠진 맥주 냄새’로 시작되는 아침 장면 역시 1부의 저녁 풍경과 다르지 않다. ‘흙묻은 발’ muddy feet들이 ‘이른 코오피 스탠드’ early coffee-stands로 몰려드는 모습은 ‘더러운 차일을 올리는 모든 손들’ all the hands/ That are raising dingy shades의 동작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되플이 되는 도시인의 일상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한편 신체의 일부인 ‘손’ ‘발’ 등으로 제유 synecdoche된 인간의 모습은 거리의 물상들과 나란히 열거되어 황량한 도시를 이루는 ‘생명없이 움직이는 도시의 부속물’ inanimate but mobile properties of the street10)으로 등장한다. 도시의 가식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심상이 ‘더러운 차일’ dingy shades, ‘가면극’ masquerades, 혹은 ‘부서진 덧문’ broken blinds, ‘덮개’ shutters 등의 유사한 심상으로 바뀌면서 등장하여 도시의 가식적인 특성을 보여주며 최종부의 ‘시커먼 거리의 양심’ the conscience of a blackened street으로 종합되어 전체 시의 구조적 통일에 기여한다. 시인은 마치 사진사의 카메라 렌즈를 조정하듯이 1·2부에서 도시의 저녁과 아침 풍경을 보여준 후 3부에서는 2부의 마지막 행인 ‘천개의 셋방’ a thousand furnished rooms 중에서 한 방의 모습을 클로우즈업시켜 그 속의 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신은 침대에서 담요를 차버리고 등을 대고 누워 기다렸다. 그대는 졸면서 지켜본다. 밤이 드러내는 그대의 영혼을 이루는 무수한 더러운 모습들을. …… 그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머리에 종이를 말거나 때묻은 두 손바닥으로 누런 발바닥을 움켜쥐었다. 여인의 연속적인 동작과 그녀의 영혼을 이루는 ‘더러운 모습들’은 일상의 굴레에 묶여 시달리는 한 여인의 모습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지닌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내린 덧문 사이로 기어드는 빛’ the light crept up between the shutters이나 ‘홈통의 참새’ the sparrows in the gutters의 자연 심상들 역시 누추한 도시의 물상들과 어울려 본래의 순수성을 상실한 모습들이다. 최종부는 1·2·3부를 종합하는 세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2·3부에서 객관적으로 묘사된 도시인의 모습은 고통받는 영혼의 모습으로 종합된다. 그의 영혼은 도시 뒤로 사라진 하늘에 걸쳐 쭉 뻗어 있거나 아니면 집요한 발에 짓밟혀 있다. 네시와 다섯시 그리고 여섯시에. ‘짧고 뭉툭한 손가락’ short square fingers으로 파이프에 담배가루를 채워 넣거나 눈으로 명확한 무엇을 확인하고자 신문을 읽어가는 일상의 무의미한 삶 속에서 영혼은 짓눌려 병들어 있고 ‘시커먼 거리의 양심’ the conscience of a blackened street은 감히 세상을 떠맡으려고 안달한다. 끝으로 작중 화자는 ‘무한히 부드러운/ 무한히 괴로워하는 것’ some infinitely gentle/ Infinitely suffering thing에 순간적으로 매달려 외형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려 했던 자신의 태도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대신 인간의 무의미한 삶의 모형을 제시한다. 그대의 손으로 입을 닦고 웃어라. 세상은 빈 터에서 땔감을 줍는 노파처럼 빙빙 돌아간다. ‘돌아간다’ revolve, ‘늙은’ ancient의 표현은 오래된 인간 역사와 더불어 반복되어온 생존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빈 터’ vacant lots에서 땔감을 줍는 늙은 여인의 무의미한 동작은 1·2·3부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준 도시인의 모습이자 세대를 이으며 반복되어 온 인간의 무의미한 삶을 종합하고 있다. 영혼의 상태와는 무관한 채 일상의 생존에 습관적으로 얽매어 있는 도시인들의 모습은 점점 황폐해 가는 도시 풍경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
첫댓글 대부분 스크랩이 허용되지 않네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차츰 열어놓으려 합니다...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