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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탈리아의 국민적인 영웅이었던 가리발디는 “내가 만일 조국을 위해 싸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청년을 향해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찬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작가로,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던 남궁 억 선생은 모진 고문 끝에 죽어가면서도 “내가 죽으면 시체를 불살라 곱게 가루 내어 무궁화나무에 거름으로 주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가리발디나 남궁 억 선생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당시 웃시야가 다스리던 남유다는 블레셋과 에돔과 암몬과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 역시 수리아를 이기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갖가지 불법과 불의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한 방법으로 억눌렀습니다.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습니다. 상인들은 값을 속여 물건을 팔았습니다. 공정해야 할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그릇된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였습니다. 거기다 종교적으로는 각종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벧엘과 브엘세바와 길갈에서 우상을 섬기며 복을 구했습니다. 바로 그때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b-6a)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치 도깨비처럼 변해버린 나라와 민족의 영적인 개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는 국가적인 번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지적했습니다.
거기에 장단 맞춰 태평 세월을 노래하는 도깨비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을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대한 민국의 현실 역시 인간은 사라지고 자본의 권리와 자유만 남아 있습니다. 경제적인 효율성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거기에 교회와 그들을 이끌어 가고 있는 영적인 지도자들마저 물질적 풍요만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처럼 덩달아 놀아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79편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양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 곧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시79:13a)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어지는 80편에서도 목자와 양의 관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의지할 자와 의지하는 자, 통치하는 자와 통치 받는 자, 왕과 백성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시는 내용상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슈산”(shooshan')의 복수형인 “소산님”(shoshanneem')은 잎이 여섯 장 달린 백합화들을, “에둣”(aydooth')은 “언약 또는 증언”을 뜻합니다. 그래서 “소산님 에둣에 맞춘 노래”는 “백합화 언약에 맞춘 노래 또는 백합화 증언에 맞춘 노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백합화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교회와 성도를 상징합니다. 또 백합화에는 언제나 “가시나무 가운데”라는 수식어가 따릅니다. 거기다 가시나무 가운데서 핀 백합화가 가장 아름답고 진한 향기를 발합니다. 고난을 딛고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당시 혹독한 고난 속에 몸부림치고 있던 나라와 민족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백합화로 회복될 수 있는 은혜를 부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도움을 호소한 하나님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목자이셨습니다. 1-3절입니다.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용력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일부로 구성된 유다와 나머지 열 개 지파와 베냐민 지파 일부로 구성된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종을 앞둔 야곱은 요셉을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48:15b)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보호하시고 양육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도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서모 빌하를 범한 르우벤을 대신해 장자에게 돌아갈 두 몫의 권리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또 그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이끌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예언대로 요셉 지파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한편 “주의 용력(勇力)”(게부라 : ghebooraw')은 “힘, 용맹, 승리, 능력”등의 뜻으로, 직역하면 “당신의 힘”(your might : NIV)입니다. 또 “내사”(우르 : oor)는 “분발하다, 일어나다, 자극하다”등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일어나사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를 소원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를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을 비취사”(let thy face shine : RSV)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크신 능력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유다와 르우벤이 이끄는 두 개의 진(陳)에 이어 세 번째 진에서 함께 행군(行軍)하던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는 선두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원수들을 얼마나 두렵고 떨리게 만들었는지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야영(野營) 할 때마다 진(陳) 가운데 세워진 장막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까지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백성들의 마음에 아무리 어렵고 힘든 난관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또 비록 어리석고 악할지라도, 당신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는 백성들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B. C.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해 버린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함께 하셨던 과거를 회상하며 간절히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라와 민족이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 친히 크신 능력으로 일어나셔서 구원의 능력과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영광 중에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인도하실 때 비로소 나라와 민족은 모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분노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 앞에 당혹감(當惑感)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잠8:17)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철저히 외면하셨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기도에 노(怒)까지 발하셨기 때문입니다. 4-7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여기서 “노하시리이까”(아솬 : awshan')는 “연기를 내다, 분노하다, 격노하다, 노발대발하다”등의 뜻으로, “나의 기도(祈禱)가 주의 앞에 분향(焚香)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祭祀) 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등의 말씀에서는 분향단에서 나는 연기 곧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구원을 호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와 계속되는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 어떤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호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분노를 쏟아 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아직 만족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討索), 불의(不義), 간음(姦淫)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所得)의 십일조(十一條)를 드리나이다”(눅18:11-12)라고 말씀합니다.
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5-7),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하거나, 목적이 옳지 않거나, 의심하거나, 은밀한 죄를 품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응답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시인이 함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지 못한 죄가 있을 때에는 아무리 목이 쉬도록 소리쳐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 외면 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노를 자초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눈물을 양식처럼 먹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에게는 시빗거리가 되고, 원수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노를 거두지 않으실 때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합니다.
회개하지 못한 죄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야말로 철저히 회개해야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로 돌이켜야합니다. 여기서 “돌이키시고”(슈브 : shoob)는 “돌아가다, 회복하다, 되살아나다, 수리하다” 등의 뜻을 가진 히필형 동사로, 우리 스스로 절대로 돌아설 수 없지만, 돌아서기 원하는 마음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간절한 소원을 가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습니까?
응답되고 있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죄를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서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십시오. 무엇보다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외쳐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모든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구원과 자비를 간절하게 요청한 시인은 다시 한번 지나간 이스라엘의 과거의 영광을 회상했습니다. 8-13절입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팔레스타인은 포도나무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가진 곳으로, 포도 열매는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는 과일 가운데 주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영적인 열매를 풍성히 맺으라는 의미에서 자주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곧 극상품 포도나무를 옮겨심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의 바로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내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존재하는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하신 후에는 깊고 넓게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심어주셨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하고 강해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더욱 번성하여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과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그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가나안 북쪽 경계에 위치한 레바논까지 지배할 정도로 힘과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그들을 보호하셨던 당신의 손길을 거두셨습니다. 그 결과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며 가나안의 맹주(盟主)를 자처하던 이스라엘은 한순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물론 모든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완전히 멸망하여 수풀의 돼지 곧 할례 받지 않은 부정한 이방인들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들과 동맹한 국가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14-19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여기서 자극과 간청과 애원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불변사(不變詞)인 “구하옵나니”(나 : naw)는 “제발, 청컨데”등의 뜻으로, 시인이 정말로 간절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했음을 의미합니다. 또 “권고하소서”(파카드 : pawkad')는 “방문하다, 감독하다, 보살피다”등의 뜻으로, 시인이 하나님께 이스라엘 가운데로 오셔서 보살펴 달라고 간청했음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포도나무 이스라엘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자른 자들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능력의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제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희미하게 꺼져 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보여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정말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개인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민족과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극작가 이대영씨는 모 일간지를 통해 “우리 나라, 도깨비 나라”라는 글을 썼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이웃 일본에 36년간 국토 무상 임대해주니 친절한 나라.
38선 금 그어 미, 소 양국에 나눠주니 공평한 나라.
금 밟았다고 대판 싸웠으니 동심의 나라.
줄줄이 군인을 지도자로 모셨으니 충성의 나라.
체력이 국력이라고 몸 약한 지식인 죄다 붙잡아 육체 훈련 시켜주니 튼튼한 나라.
이역만리 강남 땅에서 제비 잡아 부자 되니 행운의 나라.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하니 동화의 나라.
외환위기에 실업자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맞서니 사람이 최고인 나라.
분단 반세기 기념으로 노벨 평화상 받으니 평화의 나라.
코 묻은 돈 돼지 저금통으로 노무현 정부 출범하니 돼지의 나라.
우리 나라의 미래는 더욱 밝아서, 줄 안 서면 혼쭐나니 선진 질서의 나라.
뱉을 곳이 없어 제 얼굴에 침을 뱉으니 공중도덕의 나라.
단돈 29만원으로 호의호식하니 사회보장 끝내주는 나라.
돈이 넘쳐 차 떼기로 실어 나르니 세계 최고 부자 나라.
어디 그것뿐이랴.
대통령 짓도 못 해먹겠다 하니 직업 귀천 없는 나라.
나이 오십에 편히 쉬라고 등 떠미니 경로 우대의 나라.
해외 영토 개척하려 이민을 부추기니 글로벌한 나라.
대형사고로 인구밀도 조절하니 과학의 나라.
일 자리 없어 대학원에 가야 하니 교육의 나라.
영화 한편에 1000만 명이 달려가니 문화의 나라.
에덴동산처럼 누드 광란이니 낙원의 나라.
얼짱 몸짱 강도까지 다 예뻐 보이니 관용과 미학의 나라.
그리하여 내 조국은 이상하고 신비로운 도깨비 나라.
또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돈, 돈, 돈, ‘돈 사회’가 도래했다.”는 글을 통해 “돈, 돈, 돈. 돈의 돈, 돈. 악마의 금전. 바야흐로 우리는 돈이 지배하는 ‘돈 사회’에서 살게 된 것 같다. ‘돈 사회’는 단지 돈이 지배하는 사회만을 뜻하지 않는다. ‘돈’이라는 말은 ‘미쳤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돈 사회’란 ‘미친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돈은 단지 돌고 도는 것이어서 돈이 아니라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돈이다. 그러니 돈이 지배하는 사회는 미친 사회이다.”라는 말로 오직 돈만을 추구하는 백성들의 도깨비 같은 심리를 꼬집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도깨비 같이 변해버린 나라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프랑스의 드 토크빌은 후에 “나는 미국의 위대성을 발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항구, 비옥한 토지, 광산이나 상업이 번창하고 있는 곳에서는 내가 찾고 있는 것들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미국의 한 교회에 가서 그 교회 목사가 외치는 정의로운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미국의 위대한 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깨비 같이 변해버린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외치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야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한 도깨비 같은 나라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 정말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물질에 사로잡힌 우리의 현실을 냉철하게 돌아보십시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십시오. 무엇보다 이 시대의 영적인 파수꾼이요, 제사장으로 세워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도깨비 같은 세상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도깨비 같은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분배의 문제를 성장의 문제로 둔갑시켜 백성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만드는 데에만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도깨비 같은 정치 지도자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 온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도깨비 같은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