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목사는 MBC <뉴스 후>의 ‘목사님, 우리 목사님’을 보고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 현 교회들의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며, ‘사회적 기준’으로 잴 수 없는 교회들이 이번 기회에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에 대한 ‘성경적’ 비평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교회들이 무조건 서로를 부축해주고 일으켜 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순수한 형제우애는 가상한 일이지만,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는 ‘더 깊은’ 영적 고찰이 필요하다. 죄는 철저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모델 지망생이 절룩거리기에 ‘그렇게 걸어서 무대에 서겠느냐’며 바로 고쳐 잘 걸으라고 전문가적 시각에서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더니, 대뜸 동료 지망생들이 나서서 ‘남의 약한 모습을 가지고 그러면 되겠느냐’며 서로 뭉쳐 함께 걷기 시작했는데 전부 절룩거렸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디자이너가 자신의 노작을 선보이는 귀한 행사에 그런 절룩거리는 이들을 세울 것인가? 교회를 대표한다는 목사들이, 또는 그들의 교회가 죄를 짓고 간증을 잃어버린 것이 명백하여 죄를 지적했다면, 죄지은 이들의 입장과 그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상대적 특수성을 배려하여 영적 차원에서 깊이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도,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밖으로 드러나는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마 7:17).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일을 영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열매가 나쁘게 드러난다면, 분명 숨겨진 악한 일이 있는 것이다.
소목사가 지적한 교회의 ‘대물림’ 문제에 관해 보면, 그는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 빌리 그레이엄, 로버트 슐러 등과 같은 이들을 예로 들어 ‘성공적 대물림의 사례’를 소개하고, 이를 문제 삼는 한국의 왜곡된(?) 시각을 비판했다. 그가 ‘성공적 대물림’의 예로 든 인물들은 심리학적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며, 로마 카톨릭과 동침하는 배교자들이다. 이들은 주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이 아닌데, 소목사는 이들이 교회를 대물림 하고도 아무 문제없다는 외국의 경우를 들어 국내의 비판 현상을 꼬집고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신실한 종이기에 『형제들아, 너희는 모두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으로 삼은 것같이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주시하라』(빌 3:17)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으나, 위의 세 목사들은 전혀 본받을만한 위인들이 아니다. 그들의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며 그들의 사역은 일종의 ‘가업(家業)’이기에 대물림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분이 세우시는 목자를 통해 운영된다. 주님이 쓰신다는 증거가 없는 이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강단을 내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양심이 깨끗지 못한 목사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해 보았을 리 없고(히 9:14), 죄들에 대해 팔팔하게 살아있는 목사가 의에 대해 살아있을 리 만무하다(벧전 2:24). 각종 부정과 불륜으로 죄를 짓고 간증을 잃은 이들을 강단에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성도들이 그를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며, 그의 말을 어떻게 신뢰하겠는가? 주님은 그분의 양을 삯꾼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그 목사들이 여전히 강단에 서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 위에 군림하는 우상목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보다 권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마귀와 치르는 영적 전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를 지었으면 성경으로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바른 자세인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피흘려 죽으셔야 했던 그 심오하고 처절한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죄를 죄라 말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특수성을 감안해 서로 감싸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서 ‘더불어 함께 서는 공교회 공동체’를 이루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들이 뭉쳐서 함께 절룩거린다고 뒤로 물러설 분이 아니시다. 주님의 관심은 상대적 특수성이 아니라 ‘성경적 절대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의 종들은 성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측정하며 결론을 내린다. 죄 짓고 십자가의 원수들로 살아가면서 강단에서 교인들을 호리는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라 마귀의 일이다. 죄를 죄라 하지 않고 “상황윤리”를 내세워 그것을 희석시킨다면 결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내 입장’과 다르기 때문에 판단하면 오류가 많지만, ‘성경의 입장’과 다르기에 성경으로 판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