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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내게 철학 수업을 받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그런 분위기는 대학의 내 수업 시간에도 나타났다. 내게서 철학 수업을 받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대신에 전에 못 보던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럴 때마다 노동자들의 성향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운 노동자들은 유물사관보다는 주체사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급기야는 노동자 운동을 표방한 한 잡지에 내가 속한 그룹을 비난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고 그 그룹의 노동자들이 다른 그룹의 노동자들을 고발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는 내가 노동자들과 철학 토론을 하는 현장에 다른 그룹의 노동자들이 들이닥쳐 방해를 놓기도 했다.
대학에서 나는 논리학이나 철학개론 외에 사회철학을 담당했는데, 나의 사회철학 강좌는 인기가 꽤 높았다. 어느 때부턴가 출석부에는 70명이 등록되어있는데도 실제 수강 인원은 그보다 훨씬 많아지기 시작했다. 발표 토론을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내가 하는 일은 조별 발제에 약간의 논평을 한 다음 토론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토론은 두 편으로 나누어진다. 나는 양쪽 주장에 호불호를 밝히지 않고 어느 쪽이나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는 데 치중했다. 이런 나의 수업 방식이 학생운동에서 노선투쟁을 벌이고 있던 양대 진영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수업 시간마다 두 진영 사이의 논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논전은 종종 수업 시간이 지났는데도 끝날 줄을 몰랐다.
이러한 이상한 분위기가 이론적으로 구체화한 곳은 지연사회연구회였다. “식민지 반봉건(자본)주의론”을 내세우는 NL파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근거로 제시하는 PD파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대립은 처음에는 정치학과 손모 교수와 사회학과 정모 교수가 PD파의 대표 주자로 지역사회 사회운동가를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마오쩌둥과 주체사상에 바탕을 둔 사회운동 원로들이 세미나에 나타나 실천 경험을 내세워 교수들과 논쟁했다. 8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DJ 지지와 단일화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조선대에 이돈명 총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소년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 교수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을 전공한 김모 교수가 부임했다. 박현채 교수는 이미 창작과 비평에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질타하여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분들의 등장으로 광주의 이념적 분위기는 학계는 PD파가, 사회 운동계는 NL파가 지배하는 괴리가 발생했다. 노동운동계는 두 진영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활동하던 젊은 철학 연구자들은 동양철학 연구자라고 하더라도 마르크스・엥겔스나 레닌 혹은 마오쩌둥 원전을 연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6.25 전쟁 이후 금기시되던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철학 분야에서는 사회 성격과 관련된 “사회구성체” 논쟁보다는 당시 소련에서 논의되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논전이 벌어졌다. 동양철학 연구자들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에서 진영이 나누어지기도 했다.
89년 초였던가 지역사회연구회에서 조선대 김 교수가 누군가의 발제를 논평하면서 리영희 선생님의 심경 변화를 소개하고 비판했다. 최근 리영희 선생님이 자신의 8억인과의 대화를 저술해서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을 저널리스트로서 후회한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리영희 선생님이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표시하기도 했다는 소문을 전하기도 했다. 정치학과 손모 교수는 리영희 선생님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를 수정한 것은 사실일 수 있으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재평가는 헛소문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좌중은 술렁였다. 리영희 선생님이 누구인가. 선생님이 마오주의자인가 아닌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젊은 연구자들에게 사상적 침로(針路)를 제시하신 분 아닌가. 누군가 제안했다. 학술단체연합에 80년대 학술 운동을 총정리하는 학술대회 개최를 제의하고 거기에 리영희 선생님을 모셔 와서 심경을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제안은 받아 들여져 경북대학교에서 학술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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