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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순, 염제의 고장 중국 중원 산서성 답사기
글·사진 고(옛)조선유적답사 회장 안동립 202311 starmap7@hanmail.net
고(옛)조선유적답사회 회원 28명은 우리 민족의 원류를 찾아서 중국 중원 최대 역사, 문화의 보물 창고인 산서성을 2023년 11월 20일(월)부터 11월 30일(목)까지 10박 11일간 답사하였다. 우리 답사회는 25여 년 전부터 수십 차례 중국 몽골 등지를 답사하였는데, 코로나19로 4년간 중국 비자가 나오지 않아 답사를 포기하다가 최근 비자가 원활하여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석가 장, 태원, 임분, 원청, 영제, 영락진, 제원, 신농산, 여화궁, 한단, 북경으로 돌아오는 약 3,300km 중국 오지 마을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현지를 체험하였다. 특히 이번 답사에서 연나라 장성 동단의 토성을 확인하여, 기존의 학설 뒤집는 큰 성과를 거 두었다. 답사 일정별로 느낀 점을 글로 남긴다.
2024년 2월 28일 안동립 씀 * 고구려는 고구리로 표기하였다.
# 답사 1일 차, 2023년 11월 20일 (월) 집결 6:00, 아시아나항공 OZ331, 인천 제1 공항 출발(8:20) ~ 베이징 도착(9:45), (운행 시간 9시간 18분, 이동 거리 12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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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5년여 만에 중국에 온 것 같다. 북경은 현대도시로 탈바꿈하여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하였다. 예전에는 공항에 내리면 매캐한 석탄 냄새로 불쾌했는데, 공기의 질도 좋아졌고, 현대식 빌딩과 중형차들이 거리에 많아졌다.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찾은 유적지는 중국 최초의 성당 남당(南堂天主堂, 北京教区宣武门)을 찾았다. 내부 수리 중인지 문을 닫았다. 청나라 4대 강희제 때 마테오리치 신부의 발자취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무 척 아쉽다. 유리창 거리로 이동하였다. 우리나라 인사동과 비슷한데 그 규모는 엄청나다. 옛날 조천사, 연행사를 갔던 조선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서책을 사고 신문물을 보았던 장소로 많이 기록돼 있어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유리창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초입에 있는 영보제 (榮寶齊)에서 고미술과 서예 작품을 감상하고 왕부정(王府丼) 거리로 이동하여 동당(東堂)과 서점 등 베이징 거리를 둘러보았다.
<남당(南堂)과 동당(東堂) 천주당을 찾은 이유 : 서양에 전해진 독도의 명칭이 천산도(千山島, 천 센따오)이다. 독도는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문서와 기록에 우산도(于山島)로 기록돼 있다. 우산 도(于山島)를 천산도(千山島) 자산도(子山島), 간산도(干山島)로 잘못 써서 '간' 자를 '가' 자로 음 역하여, 가산도라고도 불렀다. 우산도를 여러 가지로 기록된 것은, 목판에 글자를 조각하거나 필사 과정에서 우(于) 자를 천(千), 자(子), 간(干) 자로 읽어 발생하였다.
1) 조선왕국도(朝鮮王國圖, 프랑스 당빌, 1737) : 고지도 상에 나타난 우산도(于山島) 명칭을 최 초로 서양에 알려진 조선 지도이다. 이 지도(地圖)는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칙령으로 이탈리 아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 신부)들이 1700년~1717년까지 중국 전역을 측량해 편찬한 최 초의 실측 지도인 중국전도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가 프랑스에 전해진 것을, 지도 제작자인 - 5 - 당빌이 북경 중심으로 백리척 좌표로 조선왕국도를 그려 출판하여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지도에는 만주어로 표기된 지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되었으며, 지도 제목 밑에 그 려진 조선 사람의 옷은 중국식 복장이고, 손에는 담비(모피 무역)를 들고 있다. 지도상에는 울릉 도 좌측에 표기된 우산도(于山島)를 천(千)자로 잘못 썼기 때문에 천센따오(Tchian-chan-tao)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이후 제작되는 서양 고지도에서 계속 지명이 잘못 표기되는 계기가 되었 다.
2) 신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 1530) 지도에는 백두산, 제주도, 대마도,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 가 지명으로 표기돼 있다.>
# 답사 2일 차, 11월 21일 (화), (운행 시간 9시간 52분, 이동 거리 30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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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정 호텔에서 조식, 점심은 현지식으로 운행 시간을 단축한다. 아침에 흐렸으나 남쪽으로 내려오니 쾌청하고 날씨가 좋다.
화북성 보정시 안신현에 있는 연국장성유지(燕国长城遗址)를 찾았다. 시골길 농로 좁은 길로 진입하니 넓은 사과밭을 지나는 제방길이 도로포장이 되었다. 자세히 보니 제방처럼 보이는 토 - 6 - 성으로 이어진 길이다. 연나라 장성 동단을 표시하는 표지석에 십리포(十里铺)라고 쓰여 있는데, 역참‘포(铺)’자이다. GPS로 고도를 측정해 보니 –3m이다. ‘서승 원장은 이곳이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황하의 범람으로 유로가 변경되어 육지가 된 곳으로, 해수 간만의 차를 평균해수면 으로 계산하면 –3m 정도가 맞을 것 같다고 한다.’이곳이 고(옛)조선과 진나라, 한나라, 연나라 의 경계 및 고구리와 중국과의 경계 지역이라는 표석이다. 우리 답사회가 여러 번 답사했던 화북성 진황도의 노룡두(老龙头)가 연나라 장성의 동단이고, 갈석산碣石山)은 난하(滦河) 옆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답사한 지역은 노룡 두에서 서남쪽으로 350km,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100km 지점에 있다. 이번 답사에서 연진 장 성의 동단이 보정시 안신현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큰 성과를 이루었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 중국의 고도(古都) 정정현(正定縣)을 찾았다. 이 지역에는 천녕사 능소각, 용흥사, 개원사 종루, 징령탑, 흥룡사 등 중요문화재가 있어 중국 최대의 고건축박물관이다. 거 리에 물청소하는 차량이 다니는 것을 여러 지역에서 보았다. 거리에서 중국의 변화를 볼 수 있 다.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상산 조자룡의 사당을 찾았다. 그의 활약과 도원의 결의, 제갈공명의 지 략 등 소설과 드라마를 보면서 이들의 활약을 현실처럼 느끼며, 간신 동탁, 조조 등을 미워하 였는데, 전쟁의 신인 조자룡을 직접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석가장시(石家莊) : 허베이성의 성도(省道)로 인구 1,100만 명 대도시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중산국(中山國), 한나라 때 지명은 상산으로 조자룡의 고향이다.> 하북성박물관(河北省博物馆)을 찾았다. 하북성 일대의 고대부터 명요 도자기, 원나라 청화백자, 명청 시대 서화와 항일전쟁 시기 문물들이 전시돼있다. 한나라(전한)의 중산정왕(中山靖王, ? ~ 기원전 113년) 유승(劉勝, 유비 조상)과 아내 두관(竇綰)의 만성한묘(滿城 漢墓, 보정시 만성구 능산(陵山)) 묘실에서 금실로 꿰맨(황금 수의) ‘금루옥의(金縷玉衣, 玉衣, 玉柙, 玉具)’, ‘장신 궁등(長信宮燈)’수많은 장신구와 등(燈)불, 옥기, 청동기 등이 출토되어 전시하고 있다. 고대에는 옥(玉)이 시골불멸(尸骨不滅)을 믿었고, 고귀한 예기로 신분의 상징으로 삼았다. 사람 이 죽은 후 옥의를 수의로 입을 때는 신분 등급으로 황제는 금실 매듭으로 지어 '금루옥의'라 고 하고, 귀족은 은실과 동실을 사용하여 '은루옥의'와 '동루옥의'라고 한다. 하북성박물관의 화 려한 문화유물을 한자리에서 관람하여 무척 감동적이었다. 위왕 조조(曹操)는 당시 풍습으로 금루옥의로 수의를 입어야 하나, 유언으로 ‘평상복으로 수 의를 하고 금은보화를 일절 묻지 말라’ 하였다. 조조는 간웅이지만 옥의를 만드는데 백성의 피땀으로 수년간 만들어지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 답사 3일 차, 11월 22일(수), (운행 시간 15시간 03분, 이동 거리 374km, 고도차 1,37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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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석가장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임제사(臨濟寺)를 답사하기 위해 정정현으로 왔다. 임제 사에 도착하니 아침 햇살에 비친 거대한 탑이 아름답다. 우리나라의 조계종(曹溪宗)은 그 기원 을 중국 선종(禪宗)에 두고, 보화종, 임제의현 선사로 이어져 내려오는데, 임제종 본산인 임제사 를 찾았다. 당(唐, 860년) 태위 묵군하(墨君和)가 자신의 사택을 절로 만들었다. 임제 의현(臨濟 義玄)이 867년 입적하자 제자 혜연(惠然)이 사리탑 징령탑(澄靈塔, 30.7m)을 벽돌로 8각 9층 탑 을 건조했다. 탑의 조형이 화려하고 정교함에 감탄했다. 탑 뒤로 돌아가니 여러 전각이 있는데 양식을 살펴보니 중국 절과는 다른 것 같았다. <중국의 탑 : 층과 각을 살펴보면, 수직으로 2층~14층 등으로 짝수로 층을 이루며, 처마의 각 (모양)은 홀수로 5각, 7각, 9각, 11각 등으로 홀수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의 탑은 수직으로 3 층~13층으로 홀수로 층을 이루며, 처마의 모양은 짝수로 4각, 6각, 8각으로 짝수로 만들어진 다. 만약 훌수로 만들어진 탑을 보면 우리 민족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중산국 유적 발굴 전시장 중산국 유적(中山古城遗址, 石家庄市平山县中山古城遗址) 전시관과 왕릉 발굴지를 찾았다. 중 산국은 신농의 증손 곤(鯀)의 후손들이 다스린 국가였다고 한다. 화북성박물관에 전시된 화려한 유물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1974년 평산현 영수현(平山縣 靈壽縣) 농민이 중산국 왕릉(中山國王陵)에서 유물을 발견하여, 출토된 ‘중산왕 3기 명문(中山王三器銘文)’은 묘의 주인이 중산왕이고, 당시 청동 예기(靑銅禮 器)에는 잘 보이지 않던 명문(銘文)에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중산왕정(中山王鼎)은 높이 51.5㎝, 정(鼎)의 덮개에 있는 세 개의 발 사이에 77행 467자의 명 문이 새겨져 있다. 중산왕 3기는(中山王 정(鼎), 中山王 방호(方壶), 中山王 원호圆壶) 세 가지 기물로 제작 시기는 B.C. 321년부터 B.C. 314년이다. <중산국(中山國, B.C. 414년 ~ B.C. 296년)은 상(商) 나라 시대 제후국으로 주나라 중엽 백적 (白狄)의 선우부(鮮虞部)가 태항산 너머로 이주하여 세운 제후국이다. 중산국의 원래 이름은 선 우국(鮮虞國)이었다고 한다. B.C. 507년 ~ B.C. 489년 선우국과 진(晉) 나라는 4차례 전쟁하였 다. 선우국은 B.C. 489년 무렵에 주의 제후국이었던 진나라와 41년 동안 8차례 전쟁을 벌였 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竹雨松風琴韻 茶烟梧月書聲 傅山書’
(죽우송풍금운 차연오월서성 부산서)
대숲에 비 내리고 솔바람에 거문고 소리 흐르고,
차 끓이는 연기에 오동나무 달 사이로 책 읽는 소리
석가장에서 태원시로 이동하는데 깊은 산속으로 버스는 달린다. 고도를 점점 올리는데 태원시 에 도착하여 해발 고도를 재보니 약 770m로 태항산 한가운데 있는 고산도시이다. 엣부터 군사 요충지역으로 북방 흉노족의 침투로이며, 진(晉)의 수도로 3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이다. 태원 시내에 최근에 조성한 비림 공원(碑林公园)을 찾았다. 입구에서 정부의 방역 정책으로 단 체관광객은 출입 금지라는 공문이 붙어있다. 손 사장이 한국에서 보러 왔다 하여 특별히 입장 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중국식 정원을 여러 개 꾸며놓고 그 사이로 오솔길을 만들어 명, 청대 문인들의 글을 모아 비석을 세워두었는데, 중국 서예의 대가 부산(傅山, 1606~1684년) 선생의 작품과 석상을 전시하여 비록 작가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을 보면서 선생의 사상과 인품 이 그려진다. 그런데 비석을 오석이나 원석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시멘트에 글을 새기고 바탕 에 검은 칠을 하여 명문장을 감상하는데 조금 아쉬웠다.
지난 시안(西安) 비림 공원 답사에서 고지도 비석을 못 본 것이 아쉬워, 이곳에도 걸작이 있을 것 같아 답사하였는데, 아름다운 중 국식 정원과 문인의 귀한 정신을 배우고 간다. 산서박물관(山西博物院)이 휴관하여 답사하지 못하고 호텔로 이동하였다. 외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호텔이 별도로 지정돼 있다고 한다. 호텔 로비에서 외국인은 개인별로 비자와 여권 대조 와 이름까지 확인하면서, 얼굴 사진을 일일이 찍어 공안에 보고하는 절차를 거치는데, 직원 4 명이 작업을 하는데 1시간 30분을 호텔 로비에 세워놓아 무척 불쾌했으나, 가이드 손광희 사장 이야기로는 코로나 이후 산골 도시에 30여 명의 외국인이 여행 왔으니 비상이 걸린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반공 교육으로 동네에서 수상한 사람을 신고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제 아침 홍 선생님이 보온병에서 물을 따르다가 손등을 댔는데 부기가 올라 호텔 직원의 안 내로 병원에서 화상 치료하고, 부득이 진양고성은 야경을 보기로 하였다.
밤에 진양고성(晉陽古城)을 찾았다. 며칠째 따뜻했는데,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을 웅크리고 버스에 내려보니, 고성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화려한 조명이 해자에 비추어 일렁이는 물빛에 마음이 설렌다. 무지하게 큰 성문을 들어서니 찬바람이 골목길을 휘몰 아치고,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이들이 몇몇 보인다. 음산한 조명이 자동으로 색이 변하여 고성의 옛 정취와 쓸쓸함이 느껴진다. 고성 중앙대로를 걸으면서 진나라 취객이 칼을 차고 홍등가를 갈지자로 걸으면서 영웅처럼 활보하는 것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 진사(晉祠) : 주 무왕의 둘째 아들 희우(姬虞)를 당후(唐侯)에 봉하여 진(晉)의 시조이다. 당나라 이연이 거병하여 출병하기 전에 진사(晉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장안을 점령 당(唐)을 개국하였 다. 당비정(唐碑亭)의 비석은 이세민이 세운 것이다. * 일부 학자들이 이곳을 졸본성으로 추정하고, 태원시 서북쪽에 높은 언덕이 고주몽의 장지(葬 地)인 용산(龍山)이라고 한다.
# 답사 4일 차, 11월 23(목), (운행 시간 9시간 45분, 이동 거리 26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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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후 태원시(太原市) 시내에 있는 쌍탑사(双塔寺, 1608년)를 찾았다. 영조사(永祚寺) 경내에 있는 쌍탑은 먼저 세워진 문봉탑과 나중에 세운 사리탑으로 중국 탑 중에 가장 높다고 한다. 상서(祥瑞,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 문을 지나 호수공원으로 들어섰다. 호숫가로 운동하 는 시민들이 많다. 쌍탑은 13층 홀수 전탑이다. 중국의 탑은 짝수이고, 우리나라 탑은 홀수(기 수)로 탑을 만든다고 윤승룡 박사님이 설명해 주셨다. 쌍탑을 중심으로 호수가 있어 크기와 규 모에 놀랐다. 우리가 탄 버스가 태원에서 40km 남서쪽 천룡산 입구를 들어서니 나선형으로 두세 바퀴 돌 고 돌아 올라가는 고가도로로 마치 놀이기구를 타고 빙글빙글 오르는 느낌으로 어지럽고 무섭 다. 버스 창으로 아래를 보니 천 길 낭떠러지를 돌아 올라가니 산 중턱에 매표소가 있다. 답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면서 산 아래 천룡사 주차장에 버스가 대기하여 편하게 내려가면서 볼 수 있다. 천용산석굴(天龙山石窟)은 동봉과 서봉 깎아지는 직벽에 25개의 석굴이 조성돼 있다. 석굴은 북위에서 시작하여 동위, 북제, 수, 당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1,500년의 역사로, 500여 개의 조각상과 부조, 탱화, 초상화가 있다. 9 굴의 십일면관음 상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중 국 불교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21 굴은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리, 백제의 유장(遺將) 흑치상지 장군의 둘째 딸 낙랑군 부인 과 남편인 순 장군(707년, 고구리 유민으로 추정)이 유민(遺民)을 이끌고 이곳에 와서 석굴을 뚫 었다고 한다. 서봉 절벽에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굴에 얼굴 없는 삼존불이 있는 데, 이중 두기는 얼굴이 훼손되어 붉은 천을 씌어 놓아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나는 운강석굴, 용문석굴, 천용산석굴 세 곳을 답사하였는데, 이곳이 규모와 크기는 작으나 암 질이 단단하여 뚫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진중시(晋中市)로 이동하여 평요고성(平遥古城, 세계문화유산, B.C. 827~B.C. 782년, 명(明) 3 년 1370년 재건)을 찾았다. 성의 총 길이 6,142m, 높이 12m, 남북 680m, 동서 380m, 면적 2.25㎢로 성의 해자는 깊고 너비가 4m이며 축성은 고구리 성에서 보이는 옹성과 치(雉) 방식으 로 만들었다. 평요고성의 특징은 중국 고건축 양식과 도시 계획의 진화를 보여 주며 건축, 종 교, 상업 거리, 주거지, 민속 예술 등 풍부하고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고대 중국 도시의 살아있는 표본으로 현재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성내 들어서니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지는데 거리를 둘러보면서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평요현 서(현청), 문묘(유교 사원), 관제묘, 성황당, 사찰, 천주당 등 여러 종교가 성안에 있어 흥미로웠 다. 고건축과 상점을 둘러보느라 해가 지고 있었다. 초겨울 밤바람이 쌀쌀해졌다. 붐비던 관람 객들이 사라지고, 화려한 조명이 하나둘씩 켜져 고성 거리 곳곳이 어둠과 함께 고색창연한 풍 광을 보여 주어 감동적이었다. 고성에 사람이 살고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시간을 더 지체하면 저녁을 먹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식당으로 이동 하였다. * 마을에 있는 성황조(城隍廟, 성황당)은 ‘성’(성벽)과 ‘황’(해자) 즉 성벽과 해자를 뜻하며, 성황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상이 모셔진 곳이나, 신당이기보다는 도교 사원에 더 가깝다. 우 리나라의 성황당은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민속 신앙의 일종이다. 서로 성격이 다르다. * 신당서 동이전에 압록수 동쪽에 고구리의 도읍지가 있다고 하였으니, 일부 학자들은 평요고성 을 고구리의 국내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림 52. 평요고성 남문 그림 53. 평요고성 안내도
# 답사 5일 차, 11월 24(금), (운행 시간 13시간 22분, 이동 거리 504km)
숙박 : 襄汾定陶国际大酒店
오늘은 운행 거리가 멀어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광성사 비홍탑(飞虹塔, 13층 누각, 팔변형 불 탑이고 높이 47.3m) 산서성 임분시 홍동현 곽산(山西省 临汾市 洪洞县 霍山)을 찾았다. 중국의 4대 명탑으로 현존하는 가장 크고 완전한 유리탑(琉璃塔)이다. 동한 원년(东汉元年, 147년)에 지어졌으며, 명무종(明武宗, 1516년)에 재건하여 가정 6년(1527년)에 완공하였다. 탑신은 유리로 된 처마와 연화문이 오색찬란하여 무지개와 같다고 하여 '비홍탑'이라고 한다. 중국의 탑은 무지하게 크고 위용이 대단하며, 왕도나 도심지에 있어 등대처럼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비홍탑은 산 입구 주차장에서 보아도 산 중턱에 우뚝 솟아있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가파른 도로를 올라가니, 탑 1층은 목조건물에 부처님이 모셔 져 있었고, 탑신은 붉은 벽돌 위에 여러 부조물을 만들어 유약을 발라 빛이 나고, 탑의 각층은 유리로 장식된 처마와 녹색 기와에 주황색, 청색, 미색 유리로 만들어져 화려한 광채에 눈이 부신다.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탑은 처음 보았다.
임분시 동쪽 30km에 있는 요제릉(堯帝陵, 임분시 곽행향 곽리신림(臨汾市郭行鄕郭里神林)은 중 국 삼황오제 중 요임금이 묘와 사당 누각이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 들어서니 정기휴관인지 문 을 닫아놓았다. 경내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먼발치에서 전경만 보고 나왔다. 이곳은 동이족의 혈통인 요(堯) 임금의 평양(平陽)은 지금의 임분시(臨汾)이고, 순(舜) 임금의 포 판(蒲板)은 지금의 영제시(永濟), 우 임금의 안읍(安邑)은 지금의 하현(夏县)이다. 요순시대를 태평 성대라 칭송받고 있다. 임분시 중심지 분하(汾河) 변에 있는 임분시 박물관(临汾市博物馆)을 찾았다. 시에서 운영하여 엄청난 규모이나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 도자기, 불교관 등 여러 가지 홍보 위주의 영인본이나 사진이 전시되어 많은 자료는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이일걸 박사는 이 지역에 금성 터가 있어 평양성터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임분시에서 고속도로 130km를 달려 2시간 만에 황하 호구폭포(黄河壶口瀑布)에 도착하니 오 후 5시경이다. 날이 흐리고 산 그림자와 물안개로 어두워진다. 황하의 길이 5,460km로 강 중 류 진산 대협곡은 강폭이 좁아지고 바위 협곡처럼 파인 골로 급류가 흘러내리는데, 초대형 주 전자 모양을 닮은 병목으로 홍수처럼 물이 쏟아져 내리는 황색 폭포이다. 황하의 큰 물이 병목에 모여 물이 끓듯이 부글대며, 물결이 용트림하듯 넘실대고, 물소리가 귀가 먹먹하니 굉음으로 하늘과 땅을 진동하며 물보라를 일으켜 장관을 이룬다. 만화 영화 같 은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니 정신이 없다.
* 매년 3월 9일은 '중국 어머니의 강 보호의 날'이 다.폭포를 나서서 밤늦게 양분현까지 이동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긴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 답사 6일 차, 11월 25일(토), (운행 시간 11시간 40분, 이동 거리 376km)
- 숙박 : 永济希尔顿惠庭酒店
어제 일정상 금성(金城)을 답사하지 못하여, 숙소인 양분현에서 임분시로 50km 정도 되돌아가 기로 하였다. 임분시 우요도구 류촌진 금성보촌서(临汾市于尧都区刘村镇金城堡村西) 마을에 도 착하여 주택가 골목 언덕길을 10여 분 올라가니 흙벽돌로 만들어진 반쯤 폐허가 된 고성이 나 타난다. 성문 안을 들어서니 성벽에 연결된 흙벽돌 건물 20~30여 채가 보이며 주민들이 살고 있다. 남서쪽 성벽은 잘 보존되고 있다. 성문을 지나 이어지는 골목길을 걸어가니 북동쪽으로 나가 는 성벽이 나오는데 상단부 아치는 무너지고 폐허가 되어 너덜거리며 반쯤 무너지고 뚫려있다. 성문이 아니고 중간 격벽이 무너진 것 같다. 실제 금성의 길이는 동서 500m, 남북 300m라고 한다. 성(城)을 둘러본 이일걸 박사는 옹성으로 치가 있어 고구리 성으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임분시 로터리에 있는 대중루를 고구리 평양성(平壤城)으로 장수왕이 천도한 곳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 자들이 신라의 금성으로 추정한다고 하였으나 이름이 같다고 하여 신라의 금성과 연결하는 것 은 문헌적인 근거가 부족하여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홍 선생님의 손등 화상 치료차 현지 병 원에 들러 처치하고 곡옥현(临汾市曲沃县曲村镇北赵村)으로 출발하였다. 진국박물관(晋国遗址博物馆)은 상주(商周)시대 진후(晋侯) 묘역(B.C. 10세기 ~ B.C. 8세기, 춘 추 초기)은 진후(晉侯) 9명과 배우자 10명의 합장묘에서 청동기와 문화재급 유물 등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을 중심으로 전시한 곳이다. 특히 1호 거마갱은 제후의 장례 시 거마를 순장 형식으 로 말 105필, 수레 48승으로, 수레는 의례용, 전쟁용, 운반용, 생활용 등을 구분해서 매장했다. 당시의 마차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최신 무기이다. 마차가 다니는 도로가 건설되어야 하니, 도로 상황과 발전상을 엿볼 수 있었다. 114호 진후(晋侯) 묘역에서 종묘 예기(宗廟禮器)인 일좌조존(一座鸟尊) 청동기에 새겨진 그림은 궁중 생활과 수렵 장면을 정교하게 사실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새 모양의 머리는 봉황이고 몸은 통통한 가금류인 봉조형(鳳鳥形) 청동기에는 화려한 구름문 을 정교하게 새겨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수준 높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외에도 토기, 청동기, 마차, 천마 등 수준 높고 아름다운 문화를 유물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묘역은 동서 3.8㎞, 남북 2.8㎞, 면적 11㎢ 규모이다.
* 진국(晋国)은 춘추전국시대, B.C. 770 ~ B.C. 221년) 이고, 진국(秦国)은 B.C. 221년 ~ B.C. 207년 진시황의 진으로 시기가 다르다. 일부 학자는 이 지역을 신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나는 길에 시골장이 열려 사과, 군밤, 대추, 월병, 땅콩, 배추, 양고기, 바나나 등을 사서 버 스에 실었다. 양고기를 썰어서 순대처럼 팔고 있어 조금 샀는데, 모두 기름이 잔뜩 낀 양고기 를 보고 먹기를 주저하여 몽골 여행하면서 된장이나 소금, 새우젓을 찍어 먹으면 된다고 하니 술안주로 맛있게 먹었다. 이 지역은 사과 생산지로 사과의 모양은 좋지 않은데 맛은 좋아 13kg에 20위안 하여 3 봉투를 사서 여행 내내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 양분현(襄汾) 분하(汾河) 계곡을 신성으로 추정하고, 분하 남쪽 계곡 사이 를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지로 주장하여 답사하려 하였으나 정확한 위치를 몰라 분하(汾河) 만 확인했다. 다음번 답사 때 자료를 더 조사하여 확인해 보아야겠다. 산서성 신강현 마을에 있는 탑 사진 한 장으로 현지인에게 물어보면서 찾는데, 버스를 두 번 회차하여 안시성이 보이는 장소인 규성각(奎星阁)을 찾았다. 여량산맥의 끝은 말머리 모양 마수 산(馬首山) 이고, 안쪽 산 정상 구릉지에 있는 말꼬리 같은 산이 마미산(馬尾山)인데, 이곳에 고 구리의 안시성이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 규성각(첨성대 기능) 망루는 안시성 전투에서 설인귀 가 30만 명의 해골을 모아 경탑(經塔)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경탑 자리로 추정한다. 고 구리 영양왕이 탑을 세우고 영류왕이 허물었다고 한다. 이후 청(淸) 대에 다시 망루로 만든 것 이다. 마수산 가까이 가보자고 하는데 시골길이라 무리한 운행으로 판단되어 복잡한 시내를 빠 져나왔다. 아직 갈 길이 먼데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시간이 지체되어 하진시의 설인 귀(河津市 薛仁贵寒窑故里) 고향은 가보지 못하였다. 중국 내륙에 염전이 있어 소금을 공급하는 운성시 염호(运城 盐湖, Salt Lake)에 도착하니 18 시 30분 해가 지고 밤이다. 운성시는 내륙의 소금 생산지로 염전을 놓고 다툼이 많았던 곳이 다. 염호는 염도가 높고 미네랄이 풍부하여 소금의 질이 좋다고 한다. 길이 30km, 폭 3~5km, 깊 이 6m, 면적 132㎢, 고도 324m이다. 호수를 한 바퀴 돌기에는 너무 크고, 어둠이 내려서 호 수의 생태를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둥근달이 호수에 비춰 아경 사진을 몇 장 찍고 호텔이 있는 영제시로 출발하여 20시에 호텔에 도착하였다.
# 답사 7일 차, 11월 26일(일), (운행 시간 12시간 35분, 이동 거리 351km)
- 숙박 : 济源世纪酒店
황하의 폭이 넓어 배를 대던 항구가 있었던 포주고성(蒲州古城)이 관작루 가는 길 도로에 있 다. 고성이 도로에 잘리고 연결되어, 예전 활발하던 모습은 볼 수 없고, 내륙의 도로에 둘러싸 여 반쯤 무너진 안타까운 모습이다.
登鸛雀樓 등관작루 (王之涣 왕지환 시)
白日依山盡 백일의산진 (해는 산에 기대 지고)
黃河入海流 황하입해류 (황하는 바다로 흘러가네)
欲窮千里目 욕궁천리목 (천리를 보고 싶다면)
更上一層樓 경상일층루 (다시 한 층 올라야 하네)
관작루(鸛雀樓, 높이 73.9m)는 황학루, 악양루 중국의 3대 누각 중 하나이다. 황새가 누각 위 에 둥지를 틀어 보금자리로 삼았기 때문에 관작루라 불린다. 누각에서 황하를 내려다볼 수 있 어서 역대 많은 문인이 관작루에 올라 풍류를 즐기며 시를 남겼다. 지금도 사람들이 시인을 회 상하며 관작루에 오른다. 나도 시 한 수 읊으려고 누각에 올라 멀리 황하를 바라보니 시상은 안 떠오르고, 날이 흐려 연무로 시인인 본 황하는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누각 6층을 둘러보 니 모택동과 강택민이 친필을 전시돼 있고, 왕지환 동상 앞에서 운전사에게 등관작루을 부탁하 니 멋진 모습으로 거침없이 읊어주어 옛 시인이 들려주는 것 같아 감동적이었다. 민 교수님이 풍류를 강의해 주어 누각을 둘러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양귀비고리(楊貴妃故里, 719년 ~ 756년)를 찾았다. 귀비의 이름은 양옥환(楊玉環)으로 서시, 왕 소군, 우희(소설 삼국지 속의 인물)와 함께 중국의 4대 미녀로 손꼽힌다. 당(唐) 현종(玄宗) 이융 기의 후궁이자 며느리(황자비)였다가 이후 비구니가 되었다. 양귀비는 재주가 뛰어나 비파를 비 롯한 음악과 무용에 큰 재능이 있어, 현종이 그녀에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안녹산(安禄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이 일어났다. 안사의 난(安史亂)은 6년간 이어졌다. 이 사건의 배경 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벽화와 초상화를 보면 당시 미인은 실제로는 풍만한 여 성이었다.
백이숙제묘(伯夷叔齐墓, 首阳乡长旺村南山1公里)를 찾아 도로에 주차하고 농로를 60m쯤 들어 가니 과수원 한가운데 잡풀이 무성하고 반쯤 무너진 묘 2기가 토성 아래에 있다. 입구에 있는 표석으로 이제 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답사회는 2007년 8월 화북성 난하 유역 지금의 진황도시 노룡현 영평부(永平府) 고려성에 있는 백이 숙제 묘를 답사하여 나무로 세운 표석을 보았는데, 이곳에 또 있다니 어느 곳이 진짜 수양산(首陽山) 인가 궁금하다. 주(周) 무왕이 은(殷) 나라를 공격하니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백(큰아들)‘이’와 숙(작은아들)‘제’는 주나라에서 주 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여 수양산 아래에서 고사리를 캐 먹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 와 ‘제’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자로 동이족이다.
역사적인 자리를 뒤로하고 중국의 도교사원(道敎寺院)인 영락궁(永樂宮)을 찾았다. 도교 팔선(八 仙)의 한 사람인 신선 여동빈(神仙呂洞賓)을 제향한 사당이 있는 곳으로, 호는 순양자(純陽子)이 다. 전진교는 부우제군 여순양(孚佑帝君 呂純陽)을 조사(祖師)로 모신다. 무력으로는 팔선 중에서 가장 강하다. 중국은 도교(道敎)의 나라이다. 도교는 민간 신앙을 기반으로 신선 사상, 노장사상, 유교, 불교 와 여러 신앙 요소를 받아들여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장수(壽), 오복(福), 록(祿, 높은 벼슬)을 구 하는 현세적인 자연 종교이다. 영락궁은 원대(元代) 전진파(全眞派) 3대 도교 사원으로 본래 위 치는 예성현 영락진(永樂鎭)에 있었는데, 삼문협 댐 공사로 1959년부터 현재 위치로 이전 복원 해 놓았다. 도교(道敎) 팔선은 전설은 고대부터 환상 속의 인물로 내려왔다. 윤승룡 박사(민족종 교 겨래얼사전 편찬 위원장)의 강의와 현장 설명으로 도교를 배울 수 있었다. 고구리의 광개토대왕을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쓴 것과 관련하여, 국내성(집안)의 광개토대왕 비가 이곳에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는 가설이 있는데 과연 맞을까? 궁금하여 이곳저곳 둘러보 아도 근거가 부족한 것 같다. 이곳 답사에서 도교 사원을 보면서 중국의 민간 신앙에서 모두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점심 식사와 영락궁 답사 시간이 길어져 낙양성 답사를 포기하고, 제원시 서에서 동으로 흐르 는 강을 고지도에는 추수(溴水) 패수(浿水)로 표기되어 현재의 위치를 찾기 어려우나, 제원시의 남쪽 황하 삼협댐 하류에 있는 황하 습지 공원이 요택(遼澤)으로 추정되어 이동하였다. 요택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리고 공원이 문을 닫아 입장하지 못하여 아쉽다. 우리 역사에서 요택의 중요성은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리를 침공(645년)한 장소가 어디인가에 - 23 - 따라 고대 고구리와 당나라의 국경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산서성 제원시 부근이 요택이라고 본다. 당 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리 양만춘(梁萬春) 성주의 화살이 당 태종 눈에 맞아 급하게 퇴각한다. 요수(遼水)의 하류 늪지대인 요택에서 힘겹게 늪지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구리 정벌에 실패한 당 태종은 부상 후유증으로 3년 후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고(옛)조선유적답사회는 답사 시 시간제한을 두고 답사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회원 각자의 영역에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충분한 시간을 주어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러다 보니 답사 일정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다.
11월 하순이라 해가 일찍 져서 무척 아쉽다.
# 답사 8일 차, 11월 27일 (월), (운행 시간 9시간 54분, 이동 거리 295km)
- 숙박 : 涉县龙山宾馆 제원시(濟源)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 추수(溴水)가 패수(浿水) 추하(溴河)로 패수와 갈석산(碣石山) 은 서로 가까운데 위치한다. 한서 지리지에는 갈석산은 태항(太行)과 항산(恒山)을 지나 갈석산 까지 이어졌다가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호텔과 가까운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에 가서 보니 서에서 동으로 넓은 하천이 강변로 이어진다. 옛 기록과 비교하면 패수인 것 같다.
태항산맥(太行山脈)은 길이 약 500km, 해발 1,000~2,000m로 산서성, 화북성, 하남성 3개 성 의 경계를 따라 뻗어 있다. 황토고원과 가파른 봉우리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우리가 찾은 신농산풍경구(神農山风景区)는 태항산의 제일 남단에 있다. 관광 철이 지나서 입 장객 수십 명이 보인다. 산 입구에서 본 전경은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고 바위가 쏟아져 내리 는 것 같은 힘찬 기상으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산 입구에 내리니 염제 신농(炎帝神农)의 동상이 산 입구를 막고 있다. 걸어 서 도교 사원인 재조묘(財組廟)를 지나가니 수십 대의 전기차가 대기하고 있다. 다시 전기차를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올라 리프트 타는 가파른 계단 앞에 세워준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곤돌라를 타니 천 길 낭떠러지로 바람의 영향으로 휘청거리며 신농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절벽에 붙은 계단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분다. 일 부 대원들은 무섭다고 다시 곤돌라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간다. 정상부에 있는 몇 개의 도교 사원을 지나니 우물이 있고 신농단(神農壇)이 나온다. 천제를 지내려고 준비해 온 차와 과일을 제단에 차려놓고 차를 올리며 집사는 윤승룡 박사가 고천문은 이일걸 박사가 낭독하고 모두 하 늘에 4배 절을 하였다. 정상에 시멘트 같은 짐을 진 짐꾼 여러분을 만났는데 가파른 길을 걸어 왔다고 한다. 바람으로 곤돌라가 정지한다고 하여 서둘러 내려갔다. 하산길 주변에 원숭이 수십 마리가 모 여 살고 있어 신기하게 보았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상고시대 시조 설화로 삼황(三帝)을 태호 복희(太昊 伏羲), 염제 신 농(炎帝 神農), 황제 헌원(黃帝 軒轅)이다. 오제(五帝)는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으로 여러 기록이 있다. 이중 태호 복희씨(太昊 伏羲氏),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 동이족으로 분류된다. 신농산을 내려오면서 많은 여운이 남는다. (* 행(行) 자를 써 놓고 항 자로 읽는 이유는 산이 항렬을 이루어 行 자를 항렬 항 자로 읽는 다.) 섭현을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타고 고평(高平市)휴게소에서 서승 원장님과 이일걸 박사의 강의 로 장평대전(長平大戰) 진(秦)과 조(趙)의 전쟁 배웠다. 현재는 전투 장소를 찾기 어려워 고평휴 게소에서 그 뜻을 새기면서 둘러보았다. - 26 - <장평대전(B.C. 262년)은 진(秦)의 범수(范雎)의 계책에 조(趙)의 대장군 염파(廉頗)와 조괄(趙括) 이 이간책을 사용하였다. 조의 효성왕은 이간책으로 염파 상당지역(정치현)을 두고 전쟁이 일어 나자 진 왕흘의 공격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괄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반면 진은 백기(白起) 를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통솔토록 하였다. 백기는 여러 차례의 패전과 매복으로 조괄 군대를 포위하였고, 입으로만 싸울 줄 아는 조괄 때문에 45만 명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조(趙)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점차 국력이 약화되고 망하고 말았다> 재미있는 역사를 배우면서 호텔 이 있는 섭현에 도착하였다.
# 답사 9일 차, 11월 28일(화), (운행 시간 10시간 57분, 이동 거리 196km)
- 숙박 : 邯郸丽都国际酒店
섭현에는 호텔이 없어 공산당 휴양소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기온이 영하 10°로 추위에 옷깃을 여미며 몸이 움츠려진다. 여화궁(여황궁), (娲皇宫, 涉县 索堡镇)을 찾아가니 태항산 줄기에 신비하고 신령스러운 깎아지 는 절벽에 거대하게 화하시조(華夏始祖) 궁을 지어놓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본당이 산 정상 부에 있어 오르는 수단이 없어 걷기에는 너무 멀어, 구내 전동차를 타고 저수지에서 내려서 여 화 석상까지 걸으면서, 산 아래에 있는 여러 전각을 둘러보았다.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지어진 사찰 겸 불교 양식의 궁전이다. 중국의 마고 할머니 여화를 모신 곳으로 여화는 태호 복희(太昊 伏羲)의 신화로, 몸은 남녀 사 람이고 다리는 뱀이 꼬여진 형상을 하고 있다. -
옛 조(趙) 나라 수도인 한단시(邯郸市)로 이동하였다. 조왕한단공원에 있는 조왕성유지(趙王城 遗址) 박물관을 찾아갔는데, 보수하는지 박물관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차에서 내려 잠시 둘러 보고 광부고성 앞에 있는 현지 식당에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면이 굵고 뻣뻣하여 입에 맞지 않아 조금 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점심 식사 후 걸어서 해자를 건너 광부고성(廣府古城)으로 갔다. 한단고성(邯郸古城), 영년고성 (永年古城) 영년광부성(永年廣府城)으로도 부른다. 2600년 역사로 현재의 성은 명나라 시대에 재 건되었으며 높이 12m, 두께 8m, 둘레 4.5km, 면적 1.5㎢, 호수 고도 41m, 30개 거리와 성벽 주변으로 5km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수상 마을이다. - 28 - 위압적인 성곽의 크기와 해자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성문으로 들어서는데 아주 옛날로 들어 가는 듯 착각이 든다. 고색창연한 고성 거리와 마을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전부 돌아보기 어려워 큰길을 한 바퀴 돌아보니 정리가 잘 돼 있고 사람이 사는 큰 마을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 한 마을을 보니 참으로 부럽다. 후한서와 삼국지에 기록으로 광부고성에 관하여 서승 원장의 설명은 광부성을 요동성으로 본 다고 한다. 후한 말에(189~190년) 공손탁을 요동군 태수로 발령했는데, 이 지역에서 공손탁이 요동국을 세웠다. 이후 공손강, 공손연이 250년간 다스린 곳이다. 영토가 요서군, 요중군, 대방 군을 설치하여 산동 일부 지역까지 영역을 넓혔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나라를 세우고, 관구검을 유주 자사로 봉하고 공격을 지시하였는데, 광 부성이 높고 해자와 늪지대로 237년 공격에 실패하고, 이듬해 238년 사마의가 침공하여 정벌 했다. 204년 대방군을 설립한 공손탁이 결혼 동맹한 구태 백제가 대방군 땅에 백제를 설립했 다.광부고성을 둘러보고 한단시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시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라 홍보 형식의 종이와 판넬로 전시된 자료가 많이 있고 유물은 불상 정도 보인다. 특히 태항산 지역 항일투쟁 사를 자세하게 기록해놓아 살펴보았다.
조나라 무령왕이 군사 훈련을 지휘하였던 장소인 무령총대(武靈叢代)를 찾았다. 한단시 중심부 에 있는 총대공원(丛台公园)에는 많은 시민이 제기차기 등 운동을 하고 있다. 구내 소로와 이어 지는 숲속으로 걸어가니 공원 가운데쯤 총대가 위치하여 해자를 둘러싸인 성이 보인다. 성루에 오르니 석양의 해자와 공원 밖으로는 빌딩 숲이 보인다. 이곳은 조나라 무령왕의 군사 훈련 지휘소로 훈누족(흉노)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사들에게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도록 바지를 입게 하였다. 또 이 지역에서 진시황의 어머니가 살았는데, 진시 황의 신하 여불의가 상인으로 조나라에서 돈을 벌어 시황의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어머니를 진 나라 왕에게 바쳐서 왕자를 낳았다. 나중에 진시황이 되었고 한단 지역이 진시황의 고향이다. 여불의는 진시황의 신하로 있었다는 재미있는 야사를 서승 원장께서 강의하셨다. -
# 답사 10일 차, 11월 29일(수), (운행 시간 12시간 32분, 이동 거리 509km)
- 숙박 : 丰荣君华酒店
윤세주, 진광화 열사묘 참배 (진기로 예열사릉원 晋冀魯豫烈士陵園) 우리 답사단은 지난 열흘 숨 가쁘게 다녔는데, 오늘이 사실상 답사 마지막 날이다. 일제강점 기 당시 중국 땅에서 많은 사람이 항일투쟁하다가 태항산 일원에서 전사하였는데, 이중 조선인 영웅이 묻힌 진기로 예열사릉원 묘역을 찾아갔다. 한단시 중심 지역에 열사 묘역에 철문을 닫아놓고 관리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이곳에 는 윤세주, 진(김)광화 두 독립운동 영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정확한 위 치를 몰라 북쪽 묘역으로 갔다가 정보를 얻어 도로를 건너 남쪽 묘역에 있는 평장을 한 윤세주 묘를 찾았다. 조선독립군이 이국땅에 잠들어 있어 안타깝다. 우리 답사단은 궁인창 씨가 준비해 온 태극기로 묘에 씌우고 차를 올리며 일동 묵념으로 선조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그리며 묘역을 참배했다. 관리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국에서 28명이 열사릉을 찾아와서 이리저리 다니며 묘역을 찾고 있으니, 이들도 당황하여 우리에게 묘역의 위치를 알려주고, 묘역 관리 여직원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우리 일행을 따라다니며 행사 장면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감 시보다는 홍보 같은 느낌이다. 진광화 묘는 북쪽 묘역에 있다고 하여, 도로를 다시 건너 중국 안내원이 알려준 우측 묘역 한 칸 뒤 단독 분 봉묘 6기 중 좌측에 있는데, 처음에는 찾지 못하여 우측으로 돌아가니 관리인들 이 와서 안내하여 찾았다. 진광화의 계급이 정치위원이라 단독 분봉을 한 것 같다. 이곳에서도 차를 올리고, 태극기를 두 개 펼치고 일동 묵념을 하였다. 우리 답사 여행 마지막 여정을 항일 투쟁하다가 전사한 독립군 묘역을 참배하여 큰 의미가 있었다.
[윤세주 尹世胄, 1900년 ~ 1942년] 김원봉과 조선의열단을 창설하고 항일 무장 투쟁에 앞장서 198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동기인 이육사는 시 '청포도'에서 윤 세주를 간절히 노래했다는 논문이 있다. 항일 독립투사의 복장이 청포(靑袍)를 입었다고 밝혔다. 시에서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다.
[진광화 陳光華, 1911년 ~ 1942년] 평안남도 평양, 독립운동가 본명은 김창화(金昌華)이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태항산 일대 포위 공격에 맞서 반 소탕전을 전개하다, 산서성 마전(麻田) 의 화왕산(花王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중국 하북성 한단시 혁명열사능원(革命烈士陵園)에 가묘 가 있고, 하북성 섭현 석문촌((涉縣 石門村) 뒷산에 묘와 기념비가 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 장이 추서되었다. 그림 114. 윤세주 묘 그림 115. 열사릉원 배치도 - 31 - 그림 116. 윤세주 묘 참배 그림 117. 진광화 묘 참배
# 답사 11일 차, 11월 30일 (목), 아시아나항공 OZ3365 (베이징 10:55 출발 ~ 김포공항 13:50 도착)
산서성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와서…. 우리 답사회는 11일간의 중국 산서성 지역을 다녀왔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정확한 영토 는 어디인가. 궁금증으로 산서성 태항산 여러 지역을 답사하면서 시기에 따라 국가의 영역이 달라지지만, 한족이 산서성에 도읍한 나라가 없으며, 쏟아져 나오는 왕급 유물과 마차 등을 통 해 이 지역이 동이족인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북부여, 고구리, 신라, 백제의 강역임을 보았다.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우리 선조의 강역을 확인하였다.
답사 지역별로 기록하면서 답사를 마무리한다.
2024년 2월 28일 고(옛)조선유적답사 회장 안동립 씀
starmap7@hanmail.net
* 통계 데이터는 네이버와 다음, 바이두 백과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