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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yLoveChina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조선족 청년들을 일으켜 세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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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에 직면한 조선족 청년들
중국의 대학 진학률은 한국의 1980년대 이전과 같은 수준이다. 그러므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얼마 되지 않으며, 고등중학교(高中:고등학교)와 초등중학교(初中:중학교)를 졸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농촌의 경우에는 고중에 진학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은 편이다. 졸업을 한다고 해도 취직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국가에서 취직을 보장해 주었는데, 이제는 개인이 알아서 취직하는 예가 90%를 넘는다. 대학을 나오면 어느 정도 취직이 되지만, 보통 고중에 못 미치는 학력을 가진 농촌의 젊은이들은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농사를 돕고 있다.
조선족들의 중국어(한어)에 대한 숙달 정도는 환경에 따라 다르다. 한족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조선어에 약하고, 조선족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어에 취약한 편이다. 민족의식과 민족애에 대해서는 어른의 영향을 받아 특별히 의식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한족 문화와 사상에 동화되었다. 비근한 예로 한국과 중국이 축구경기를 할 때 조선족들은 거의 한국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열광적으로 중국을 응원한다. 결혼문화는 유지되고 있으며, 아직은 미미하지만 한족과의 결혼도 조금씩 확대대고 있다. 출산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조선족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으로서의 사회적 이동과 중국 내 도시로의 이동은 조선족 청년들로 하여금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돕는 일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들
섬기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물질이나 사상의 이동보다 섬김을 받는 사람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익은 단순하지가 않다. 그 유익을 결정하는 것은 전달되는 물질이나 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가지와 그것을 받는 사람의형편에 따른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특히 문화가 다르고 형편이 다른 경우에는 이것이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다. 우리들은 이런 일에 익숙지 못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더욱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런 일을 잘하지 못하며, 멀면 멀수록 또 어려운 일이 상대의 유익을 생각하고 섬기는 일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사랑과 과보호를 혼동하는 데서 시작하고 봉사단체에서 손쉽게 실수하는 일들은 단지 구호 물품 전달에 그치고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족 청년들을 섬길 때 다음 두 가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을 나눌 생각이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 긴밀한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대부분 인류가 바라는 것이요, 우리 자신 역시 바라며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연변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꿈꾸고 있는 조선족 청년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겠다.(필자는 6개월 이상 그와 교제하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비자와 한국에서 유학할 수 있는 대학, 그리고 필요한 물질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한국인들이 미국에 가서 유학하고 싶은 열정을 갖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한 개인의 도움으로 그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우리들은 도움이나 섬김을 생각할 때, 우리의 소중한 것을 나눌 생각을 전제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야 하는 것을 포함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섬기고자 하는 범위를 수정 또는 변경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그 사람과의 만남과 섬김은 그 정도에서 멈추어야 한다.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다양함과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다양함이라는 것은 한사람의 다양성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으로 말미암는 다양함을 의미한다. 지혜라 함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실 때 일하는 자와 일을 돕는 자로 짝지어 주신 것과 같은 원리이다. 많은 남녀가 제 짝을 만나 해로하듯이,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가 잘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단체와 사람이, 많은 사람과 개인이, 개인과 개인이 만날 수 있는 시스템이 이뤄져야 한다. 조선족 청년들을 돕는 일에 있어서도 그러한 장을 마련하는 일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는 개인의 지혜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든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에게 충만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를 베푸는 의지와 실천행위이다.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행동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불행한 곳, 자신의 도움일 필요한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조선족이 우리의 민족이기 때문이든지, 절망하는 청년들을 그저 바라만 볼 수 없는 연민에서든지 간에 우리들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작심하고 행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일을 행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자에게 혼자서 도움을 베푼 것이 아니었다. 그는 초반의 응급처치와 중반의 협력도움(주막 주인)과 후반의 물질도움으로 그의 자비를 실천하고 완성하였다. 나는 조선족 사회,즉 옌볜(延邊)과 베이징(北京)의 조선족 형제들 가운데에 있으면서 그래야만 할 이유를 보고 느끼며 살았다. 형편과 필요에 따른 섬김의 방법들
첫째는 그 사회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청년들에 대한 섬김이다. 필자는 베이징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전도가 화려한 학생들과 고등중학교와 초등중학교에서 매우 뛰어난 성적을 나타내는 학생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기회를 가졌었다. 어느 날 그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그 강의에 감동되어 이후로도 자주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수년 전 추수감사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새롭게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특히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의 의미를 확연히 이해하게 되면서 늘 평안과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 감사가 증폭되어서 늘 식탁을 대할 때마다 많은 사람의 수고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섭리하신 주님께 더욱 더 감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선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평범한 진리의 재확신이었다. 조선족 젊은이들 앞에서의 필자의 고백의 내용은 만물에 감사를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의 부모님과 이곳까지 이르게 한 교통편, 식탁 마련에 거쳐진 손들에게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들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필자가 몸담았던 옌볜두레마을은 주변의 대학생들이 자주 방문하곤 하였다. 두레가 지원하는 한중장학생들도 매년 2차에 걸쳐 이곳에서 수련회를 가지며 개인적인 친밀감을 더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 공부할 수 있는 물질과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한 사상성과 철학이었다. 그들의 눈 앞에 있는 중국의 현실은 정신적 아노미 현상에 처해 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폐기된 질 이미 오래며, 자본주의적 이기주의를 극복할 대안은 마련치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톈안먼(天安門)시위로, 다른 한편으로는 반미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참다운 봉사정신의 실천은 그들이 잃어가고 있는 공산주의 이념을 넘어서고, 그들이 좇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는 자본주의 사상의 약점을 능가한다. 즉 우리들은 그들이 진심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사상을 준비해야 한다. 그들과 우리가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사상을 준비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 섬기는 자만이 함께 할 수 있는데, 우리 주께서는 이 세상을 섬기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이 일을 지속하기에 좋은 도구는 장학회의 운영이다. 그리고 수련회를 통한 교제와 인터넷과 편지를 통한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는 조선족 사회와 중국 사회에서 밀려나는 청년에 대한 섬김이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촌에서 살며, 공부도 지속할 재정적인 능력이나 지적인 능력들이 부족한 경우이다. 이들은 가정에 있으면 가계의 도움이 되기보다는 어려움을 주는 형편에 있다. 이것은 1960년대의 한국 상황과 같은 농촌인구를 도시로 이동시키는 일을 진행케 하는 원인이다. 중국에서도 도농 이동은 이미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현상이다. 그래서 농촌의 땅을 외국인들에게 30년 혹은 50년 간 무상이나 유상으로 빌려주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을 건전하게 양육하는 일은 작게는 중국의 공민을 위한 일이요, 민족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동포를 살리는 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이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고려되어야 할 점이 있다. 그들이 장차 시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정도의 성장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자동차 기술 습득이 될 수 있으며, 농업의 신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유통분야의 세일즈나 마케팅 기술을 체득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지속적인 물질의 투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대안은 농업, 공업, 서비스업 등을 막론하고 기업의 형태로 진출하여 그들을 직원으로 고용하고, 전문기술을 향상시키는 일에 지속적인 투자를 병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곳 조선족 사회에 진출했던 한국의 300여개의 기업들은 이미 망하여 철수한 형편에 있다. 오직 몇 개의 외식업체들이 성공을 하였고, 기독교적 섬김의 정신을 실천하는 학교, 병원 등이 사명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산업화에서 밀려나는 조선족 청년들을 위한 기업의 대안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존중하여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중국내의 풍부한 농축산 생산물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 적합하고 경영적 성공을 이끌 수 있는 기업 형태는 가공업과 유통업이어야 할 것 같다. 조선족 청년은 미래의 가교
조선족 청년들의 형편과 필요에 따른 섬김은 단순히 섬김의 차원이 아니라 동역의 관계이다. 조선족 청년들의 시대적인 의미는 한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장차 세계 경제가 권역별로 블록화되어 가는 흐름과 민족화(자국화)하는 두 흐름에 있어서 새로운 역할로서 중 요하다. 중국은 이미 화교를 네트워크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민족들의 독립화,국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장차 한민족공동체의 성패는 중국 조선족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민족과 조선족과의 관계 정립의 형태는 장차 북한과 러시아 고려인의 관계정립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한민족 공동체의 성취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노동자로 와 있는 조선족에게 불법함으로써 부정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이 길을 돌이켜야 하는데, 이것은 현지에 있는 조선족 청년들과의 새로운 관계, 즉 상호 섬김과 존중의 관계로, 공동체의 모습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조선족 청년들은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부터 현대사의 연구에 있어서 큰 진보를 나타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한문으로 잠자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중국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매우 긴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나아가 동북아의 서로 다른 역사관을 조명하고 밝히며, 상호 이해에 많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족 청년들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그 지정학적 의미가 크다. 한국 초기의 복음이 연볜에서 북한 땅으로 흘러 들어갔던 것처럼, 한국의 많은 선교사들과 이미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족들이 다시 새롭게, 옌볜을 찾아오는 북한 사람들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은 복을 실어다 한반도를 먹이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한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을 섬겨야 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즉, 한국과 세계의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이 조선족 청년들의 손과 발과 입에 의해 중국 13억 인구에게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족 청년을 섬기는 일은 단순한 구제도 아니요,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도 아니다. 그들을 섬기는 것은 민족의 공동체를 바로 섬기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또한 다가오는 동북아 시대의 동역자를 구하는 일이며, 복음에 있어서 바통을 이어받아서 달려갈 보다 나은 사명자이다. 조선족 청년들의 사명을 보아야 할 때
우리의 최종적인 섬김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섬겨야 하며, 진지함을 가지고 그들을 섬겨야하며, 우리에게 남는 무엇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섬겨야 한다. 또한 미래의 주역으로 그들을 섬겨야 한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그들이 쥐고 있는 듯이 섬겨야 한다. 동북아의 미래를 그들에게 부탁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음 깊숙한 것을 드러내고 교제하고 교류하고 협력해야 한다. 이 일들이 조선족 청년들의 마음에 전달되기를 바라며, 또한 한국의 청년들에게 이 마음의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글: 김진구/ 산본남서울교회 교육목사, 전 연변두레마을 실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