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동은교회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샬롬
마태복음 강론(43)
성도의 연보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고후8:~9:)
1. 오늘 공부하게 될 범위는?
지난주 마23:23절이하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오늘은 성도의 연보생활은 어떤 자세로 하는가! 에 대하여 고후8장~9장을 중심으로 공부하려고 한다.
2. 지난주 말씀 가운데 언약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온전한 제물과 온전한 십일조가 되어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지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속죄함을 받아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정리해 주세요?
대부분은 주일날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구약적 개념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목사를 제사장으로, 교회당을 성전으로, 강단을 제단으로,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을 제물로 착각하고 말이다. 그러나 히10: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구약의 율법(계명,율례,규례)은 참형상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로는 죄를 깨닫게 할뿐이지 온전케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히10:7~10절“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과 영원한 성전과 영원한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단번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첫 것(언약) 즉 제사장도, 성전도, 제물도, 제사도 다 폐하여졌고, 둘째 것(성취)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우리가 단번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속죄함과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고 확증하셨다. 만일에 지금도 제사장, 성전, 제물, 제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불신자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그 어떠한 의식이나 형식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아 믿고 증거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성도의 삶 전체가 영적예배(롬12:1~2)인 것이다.
3. 이제는 더 이상 십일조의 제물은 필요 없기 때문에, 구약의 십일조 제물의 개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모독하는 것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신약시대의 성도생활은 어떤 자세로 하는 것이나요?
한마디로“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기복적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 무엇을 바친다는 제물이나 헌물(헌금)이라는 용어 자체도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형제들과 나누며 섬기기 위해서 연보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함과 거룩함으로 얻게 됨으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으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해서 복을 더 받겠다고 매달리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것에 대한 가치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4. 고후8:3~5절에 바울이 연보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그 의미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드려진 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미 주신 복)을 가지고 기쁨과 자원함으로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나누며 섬기는 것이 신약의 연보정신이다. 즉 먼저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함께 하나님께 이미 드려진 존재이고(갈2:20),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일뿐이다. 종이란 자기를 주장할 수도 없고, 능력도 없고, 선택권도 없다. 한마디로 자유의지 자체가 없이 주인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오늘날“주의 종님”이 되어서 대접을 받으려는 분들과는 천지차이다.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내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물질도, 건강도, 지혜도, 목숨도, 심지어 깨달아 믿어진 믿음까지라도 이미 드려짐을 확신하며, 이제 나는 청지기요 관리자에 불과하다.
5. 연보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요?
고후8:9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벧후1:1~2절“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자신이 부요한 자로서 은혜와 평강을 충만하게 누리는 상태에서 출발을 한다. 여러분은 부요한 자인가요? 아니면 가난한 자인가요? 행복한 자인가요? 불행한 자인가요? 만족하신가요? 아니면 불만족하신가요? 후자인 경우에는 연보생활을 할 수 없고, 설령 연보 행위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연보가 아니다.
6. 왜 우리가 부요한 자인가요?
가장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가장 가난하게 되셨는데, 그 이유는 가장 가난한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 때문이다. 그것도 억지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과 자원함으로 드려지셨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면서까지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는데, 그 부요함의 가치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부요함이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천국이다.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부요하고 보배로운 것이 있나요? 그러므로 성도라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임을 확신되어지나요? 자신이 가장 부요한 자라면 연보생활을 인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 쓰듯이 하실 수 있겠지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나요? 가난한 나를 부요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그래서 연보는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 자로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더 많이 가지려고 주먹을 움켜진다. 자신의 생명과 같은 돈이요,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돈인데 어찌 내어놓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많이 쌓아 놓을지라도 죽을 때에 단돈 1원도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그럴지라도 죽을 때까지 쌓아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귀다툼인 것이다. 그러나 연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요함의 근원이 되었기에, 나 같은 죄인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고, 풍성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심으로 쥐었던 주먹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연보생활은 세상의 자본주의의 가치를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적극적인 승리의 행위인 것이다.
7. 그러면 그 은혜와 평강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나요?
벧후1:2절“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예수를 그리스도로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여호와 되심을 깨달아 믿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해 있느냐 아니냐는 오직 한 가지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지식과 그 지식으로 인하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지식의 농도만큼 은혜와 평강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베푸신 그 큰 사랑을 깨달아진 농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 어떤 환난과 시련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렵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걱정 염려, 원망 불평, 두려움으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자연히 은혜와 평강이 없게 되는 것이다. 성도라면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어려움과 시련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더욱 낮추시기 위함이고, 내 뜻대로 안됨을 알게 하시기 위함임을 나아가게 되어지고, 그래야 내가 하나님 앞에 꺾어지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오만방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땅에 것을 말하지 않고 하늘의 것만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고,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강조해야 하고, 열매를 강조하지 않고 그 열매를 맺게 하는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일에 무관심한 분들은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이 있기에, 보이는 땅에 것에만, 열매에만, 상급에만,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만 할 뿐이고, 그것은 철저한 불신앙일 뿐이다.
8. 그러면 성도의 연보생활은 어떻게 행하게 되는가요?
오직 은혜의 결과로만 이루어진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가 깨달아 믿어지면 감동하게 되고, 의지결단을 하게 되고, 연보생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즉 머리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나에게 연보하게 하시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보생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결코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협조하기 위함이 아니고, 생색내기 위함도 아니다. 이미 예수 안에서 내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버렸는데, 협조한다거나 생색낸다거나 또는 연보생활에 인색함이 있다는 것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로서 머리 되신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 되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면 그분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게을러서는 연보생활도 불가능하고, 교회의 지체로 살아갈 수가 없기에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9. 고후8:11~14절에“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여기에 보면“평균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연보하면 돈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신 모든 은사들을 가지고 기쁨과 자원함으로 나누어 평균케 하는 것이 신약의 연보정신이다. 말씀에 부요한 자는 아직 말씀에 대한 이해가 가난한 자들에게 연보를 하게 되고, 물질에 부요한 분들은 물질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힘에 부요한 자들은 힘이 약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평균케 하려는 것이 연보정신이요 목적이다.
그래서 불행한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기 것으로 알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이다. 성도이든지 불신자이든지 돈을 쓰다가 결국에는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불신자는 철저하게 자기를 들어내기 위해서 돈을 쓰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며 찬송하기 위함이다. 자기 이름을 내려고 구제를 아무리 많이 한들 결국 마귀의 종노릇을 한 것뿐이고, 나에게 있는 모든 은사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게 된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나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기쁨과 자원하여 연보함으로 그 연보를 받은 형제도 은혜와 평강을 충만하게 누림으로 평균케 되어지는 것이다.
연보란 자기를 버려서 다른 형제에게 보충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땀 흘리고 수고해서 번 돈이니까 내가 마음대로 쓸 수가 있는 권한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아 갈수록 내 권한을 다 쓰지 않게 되는 여유와 아름다움이 있게 된다. 교회로 모이는 일에도 연보의 정신이 필요하다. 내가 마음대로 빠질 수 있는 권한이 있을지라도 그 권한을 다 쓰지 아니하는 것은 나보다 연약한 지체가 기운 빠질까 배려하는 여유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이 모이면 어떻게 하면 들통나지 않고 성공시킬 수 있을까 작전모의를 한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모임은 어떻게 하면 각자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나누어서 다른 지체들을 섬기고 성장케 해서 평균을 이루어 갈까! 자신이 얼마의 짐을 대신 더 지면 다른 지체가 좀더 가벼운 짐을 지고 갈 수 있을까! 그러한 고민을 하는 교회가 부흥한 교회이지, 숫자가 많고, 돈이 많다고 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 고후9:5절“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여기에 보면 참 연보란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의미는?
참 연보란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여 주심에 감동되어진 성도 각자가 믿음의 분량과 삶의 여건을 살펴서 자원해서 한해 동안의 합당한 연보의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가 마음에 작정을 하고 준비를 해서 해야만이 억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소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체면 때문에 더 올라가기도 하고, 인색한 마음에 더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가 자원해서 약속하고 계획한 연보, 이보다 더 신사적인 연보가 어디에 있겠고, 그것을 누가 강요하겠고, 누가 말릴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거는 것이다.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협력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가치를 확신하기 때문이다.“왕궁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문지기로 하루를 사는 것이 영광스럽도다!”(시84:10) 그래서 성도의 연보생활은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어찌 매주 출석하는 일을 가치롭게 여기고, 어찌 자기 목숨보다 더 중한 돈을 연보할 수 있겠는가? 어찌 나보다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짐을 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배우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대 절명의 일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만큼, 모든 삶의 가치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연보생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11. 고후9:6~8절에“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는데, 연보생활에 대한 자세를 말씀하신 것인지요?
6절“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씀을 앞 뒤를 빼버리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복음의 원리이다. 참 연보는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이고,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은 거짓연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많고 적음이 어디 있겠는가? 부자가 내는 연보보다 과부 두렙돈이 많다고 하셨다. 본문에서 적게는 억지로라는 의미이고, 많이는 즐겨 냄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심으면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신령한 기쁨이 온다는 것이고(갈6:7~9), 억지로나 체면 때문에 하는 연보에는 마땅히 기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기에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것이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하는 것은 허수아비 신앙생활을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이나 건강이나 물질 등을 왜 여유롭게 하셨나요? 착한 일을 넘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이다. 그래서 연보를 행하는 것이 내가 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 모든 것을 배후에서 주장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행하게 하신 결과인 것이다.
교회를 이루어 감에 있어 가장 큰 봉사와 섬김은 말씀으로 섬기는 연보생활이고, 말씀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가장 큰 연보생활이다. 이는 돈을 가지고 연보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봉사이다. 각자가 깨달은 말씀들을 가지고 연보하는 마음으로 내어놓을 때에 비로소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교회로 모이고 싶고, 형제들이 보고 싶어지게 된다. 깨달은 말씀을 가지고 모이고, 그것을 내어놓고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모임은 땅에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단체로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연생생활을 통해서 눈치보지 말고, 의무사항 아니기에 염려하지 말고,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을 가지고, 깨달은 대로 즐겁게 참여하심으로 하나님을 부지런히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부요하게 하신 그 은혜와 평강을 풍성하게 누리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