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금님의 전용 화장실
경복궁이나 창경궁같은 옛 궁궐에 관광객을 위한 화장실말고는 옛날 화장실이 없다. 그럼 옛날 궁궐 사람들은 어떻게 볼 일을 해결했을까? 옛날 사람들도 물론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았을 것이고, 궁궐 배치를 그려놓은 <궁궐지>에 보면 경복궁 안에 28개의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궁궐에도 화장실은 있었지만 임금님은 사용하지 않았다. 임금님은 처소에 붙은 작은 방에서 볼 일을 해결했는데 황제가 볼 일을 보겠다는 뜻을 비추면 『복이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동식 변기를 대령했다. 이 이동식 변기를 『매우틀』이라고 하는데 매우란 임금님의 변을 가르킨다. 매우틀이란 변기틀에 천을 씌워 임금님이 볼 일을 보게 만든 것인데 그 안에는 구리로 된 작은 그릇이 있고 이 안에는 잘게 썬 여물을 깔아 두었다. 복이나인은 매우틀과 함께 『비단』이나 『명주』를 함께 준비하여 임금님이 볼 일을 본 후 화장지를 대신할 수 있도록 했다.
2. 호패는 조선 시대 주민등록증
호패는 조선 시대의 신분증이다. 보통은 나무에 글씨를 새겼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은 상아나 뿔로 만든 호패를 차기도 했다.
호패에는 이름, 직업, 생년월일, 신분 등이 적혀있고 그 외에도 종은 주인과 나이, 사는 곳, 얼굴빛, 수염이 있는지를 적었다. 또 5품 이하의 군관도 얼굴빛과 수염 여부를 적었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들만 차고 다녔다.
3. 서당 등록금
따로 등록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부모가 곡식과 의복 등을 대어 훈장의 생계를 해결해주었다. 또 입학할 때는 술, 닭 등의 예물을 드리기도 했다. 책 한 권을 다 배우면 스승과 동무들에게 국수, 송편 등의 음식을 대접했는데 이것을 『책거리』, 『책씻』이라고 했다.
4. 조선 시대의 소방서
조선 시대의 집들은 주로 나무나 짚을 이용해 만들어 불이 나면 큰 일이었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담당 관청 『금화도감』을 두어 화재 방지와 진화를 맡게 하였다.
마을 군데군데에 우물을 파 불을 쉽게 끌 수 있게 만들고 불이 나면 종을 쳐서 알리면 증명서를 갖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 사람의 지도하에 협동해서 불을 끄도록 하였다.
민가에 불이 나서 기와집 3칸 이상, 초가집 5칸 이상이 타게 되면 임금님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5. 이혼 제도
조선 시대의 법제는 여성들에게 매우 엄격하였다. 여성들이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없고 『기처』라는 이혼 제도는 남자들이 일방적으로 여자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①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②아들을 못 낳을 때, ③질투나 ④도둑질을 했을 때, ⑤나쁜 병이 생겼을 때, ⑥말이 많거나 ⑦음탕할 때 내쫓을 수 있도록 했는데 이를 『칠거지악』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도 갈 곳이 없거나, 부모가 돌아가셔서 함께 3년상을 치렀거나, 가난할 때 시집 와 나중에 부자가 되었으면 쫓아내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을 『삼불거』라고 했다.
시댁에서 쫓겨난 여자들은 소박맞았다고 해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특별한 이유가 없거나 삼불거에 해당하는데도 부인을 쫓아내면 법에 걸려 감옥에 가기도 하고 곤장을 맞기도 했다.
6. 임금님의 결혼
왕대비나 대왕대비처럼 왕실의 제일 높은 여자 어른이 명령을 내리면 『가례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해 혼인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전국에는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를 둔 가문에서는 조정에 보고하도록 했다. 이 보고서를 『처녀단자』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처녀의 사주와 거주지, 부·조·증조·외조 등의 이력을 기록하여 가문 내력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궁중 혼례는 그때 그때 절차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세종실록예지><국조오례의><국혼정례> 등에 내려오는 것을 따라서 진행했다.
7. 태극기 제작
일본이 교류를 하지 않는다며 강화도로 쳐들어 온 운요오호 사건 때 일본은 제 나라 국기를 걸고 있는 배에 우리가 먼저 포를 쏜 것이 잘못이라고 트집을 잡았고 이를 핑계로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하였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의 필요성을 깨닫고 고종 황제는 그에 대해 연구했고, 결국 박영효는 고종 황제의 명으로 최초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1882년 일본 수신사로 갈 때 처음 사용)
그 이후 계속해서 사용된 태극기의 모양이 조금씩 변해 1949년 그 모양이 통일되었고, 정식 국기로 발표되었다.
8. 벼슬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조선 숙종때에 흉년이 자주 들어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자 조정에서는 공명첩(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문서)을 발행하여 그 돈으로 백성들을 구하고 나라의 살림에도 도움을 받았다.
이후 영조 때나 순조 때에도 공명첩을 발행하여 어려움을 극복한 일이 있다.
『공명첩』에는 벼슬이 적혀 있고, 이것을 산 사람은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으면 되는 것인데 이름만 있는 벼슬일 뿐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1690년에는 무려 2만 장이나 공명첩을 팔았다고 한다. 공명첩의 발행은 일시적으로는 나라 살림에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은 세금을 내는 평민의 수가 줄어 들어 결과적으로 더욱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9. 조선 시대 은행
객주는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리를 잡고 성황을 이룬 것은 조선 시대로 이 『객주』가 은행 역할을 하였다. 보통 객주라고 하면 물상객주를 말하는데 주로 하는 일은 중간 상인 역할이었다. 물건을 팔 사람이 맡겨 놓은 물건을 적당한 사람에게 소개하여 팔아주고 그 대가를 받았고 보관 창고 역할과 마차나 선박을 소개해주는 운수업도 했다. 뒤에 돌려 받을 목적으로 금품을 주기도 했고 돈을 꾸어주기도 했다. 돈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는 문서를 발행하거나 받았고 예금을 하면 1∼2푼의 이자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10. 행주치마
임진왜란이 있던 1593년 2월 2,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되찾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들어간 권율장군이 백성들과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왜군 3만명과 9차례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마지막 싸움에서 화살이 다 떨어져 부녀자들이 긴 앞치마를 짧게 잘라입고 그 안에 돌을 날라 그 것을 무기로 왜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게 된데서 유래해 사람들은 앞치마를 '행주산성의 부녀자들이 입었던 치마'라는 뜻에서 '행주치마'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3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율 장군의 해주대첩)
11. 옛날 우체국
옛날에는 멀 든 가깝든 사람편에 편지를 맡기는 수 밖에 없었지요. 나라에서는 필요에 따라 편지를 보낼 때는 『역참 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곳곳에 역을 두어 나라 일로 여행하는 관리에게 말을 제공해주는 제도였다.
역참제를 벗어나 새로운 통신 제도를 도입한 가장 최초의 우체국은 바로 '우정총국'(1884)인데 갑신정변의 실패로 홍영식 등이 물러나면서 폐쇄되었다
그 후 1895년 우편 제도가 다시 살아나 각 지방에는 우체사가, 중앙에는 통신사가 생겨 우편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12. 성이 없는 사람
아주 오랜 옛날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보면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 나라 이름을 따 고씨라고 했고, 이외에도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은 황금알에서 나와 성을 김씨라고 했다고 한다.
기록상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건국 초기인 1세기 무렵부터이고,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부터이며,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부터라고 추측하고 있다.
주로 왕족이나 귀족 계급만 성을 갖고 있었으며 고려 중엽부터 점차 성을 갖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의 국민이 성을 갖게 되었다.
성씨는 조선 시대에 약 250여 개 1960년에는 258성, 1985년 274개의 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3. 정이품송
세조가 법주사에 방문했을 때 가지를 들어 가마가 지나가도록 했다는 이야기 있는 유명한 나무로 그 일로 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정2품은 지금의 장관 벼슬로 높은 지위를 뜻하는데 이렇게 높은 지위의 나무는 속리산에 가면 볼 수 있는 데 나이는 약 570살, 키 15m, 둘레가 4.5m로 1962년에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되었다.
14. 최초의 일간 신문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발간된 <한성순보>이지만 이보다 전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가 있었는데, 이것이 『조보』이다.
조선 시대 초에는 '기별' 또는 '기별지'라 해서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가 나라의 결정 사항 등을 기록하여 각 관청에 돌렸는데 이것이 세조 때부터는 『조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보는 승정원에서 관리했으며 왕의 명령이나 나라의 중요한 일들, 관리의 임명 등을 적어서 조보를 만들었다. 이것을 일일이 베껴 각 관서와 관리들, 일부 높은 양반들에게 매일 보내 주었다.
15. 조선 시대 학생들의 데모
서당, 승당, 사학, 성균관 등 교육기관에서 벌이는 데모를 『권당』이라고 한다. 권당은 공부방을 비워 수업을 받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청맹권당'이라고 해서 공부방에 있긴 하지만 눈뜬 장님 흉내를 내는 방법도 있었다. 과격한 방법으로는 다같이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소리를 내면서 대궐 앞까지 몰려가는 '호곡권당'도 있었다.
16. 조선 시대 도둑 3인방
백정출신 임꺽정, 서자 출신 홍길동, 광대 출신 장길산
17. 담배
1618년 조선 광해군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 담배는 원래 남아메리카에서 나는 것으로 원주민들이 피던 것인데 일본을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남령초'(남쪽에서 온 신비한 풀)라고도 하고 원래 담배 이름을 흉내내서 '담바고'라고도 불렀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담배를 약초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담배를 약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담배우린 물을 농작물에 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18. 신문고
태종때 설치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해결해주었는데 한양에 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한양으로 가야만 했고 1차로 해당 관청에 자신의 사연을 알리고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만 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문고를 치더라도 관리를 거치기 때문에 직접 왕에게 보고되기는 어려웠고 웃사람을 고발할 수도 없는 규정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져 후대에는 없어지게 되었다.
19. 설렁탕
옛날 임금님들은 봄에 적당한 때가 되면 '선농단'이라는 곳으로 가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직접 농사를 지어 모범을 보였다. 선농단에 지내는 제사를 '선농제',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을 '친경' 이라고 했다.
세종 대왕이 친경을 할 때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어 꼼짝 못하고 몇 끼 식사를 해야 하기에 궁한 김에 몰고 갔던 소를 잡아 끓여 먹었는데 이것이 설렁탕의 시작이라고 한다.
20. 거북선
이순신 장군은 옛책에서 『태종』 임금 때 거북선을 이용했다는 기록을 보게되었지만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아 고심 끝에 생각해낸 내용을 군관 『나대용』에게 일을 맡겨 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