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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전문학 및 한국의 한문으로 된 문학. 문학의 한 장르를 형성하는 것으로 한시(漢詩)·한문·한학(漢學)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문학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한문학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다만 한대(漢代)의 문학을 가리켜 한문학이라고 한 예가 있을 뿐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각기 자국(自國)의 문자가 창조되기 전까지는 한문자를 써왔고, 또 이것이 자국의 문자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므로 이때는 한문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약 반세기 전에 이르러 한글이 본격적인 가치를 찾게 되자 비로소 한국 역대의 문학작품 중에서 한문자로 쓰인 것을 한문학이라 하여 정음문학(正音文學)과 구별을 짓게 된 것이다. 중국문학을 그 시대에 따라 개관한다면 대체로 시경(詩經)·초사(楚辭)·한부(漢賦)·육조변려(六朝騈儷)·당시(唐詩)·송사(宋詞)·원곡(元曲)·명소설(明小說)·청극(淸劇)으로 이어지면서 그 주조(主潮)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한국의 한문학에 직접·간접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한문학이 무조건 중국문학을 추종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생활양식의 차이에서, 또는 민족성과 향토적 정서에서 많은 차이점 및 독창성이 개재되었기 때문이다. 중국문학의 작풍이 웅혼(雄渾)·광막(廣漠)하다면 한국의 그것은 청아(淸雅)·천면(眠)하였으며, 그 기력(氣力)은 비록 중국을 따르지 못한다 해도 그의 정치(情致)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양적으로는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질적으로는 거의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정음문자가 창제되기 전에 신라시대의 이두(吏讀)·향가(鄕歌) 등의 한자 이용방식은 이미 허신(許愼)의 육서(六書)와는 그 구성이 달랐으며, 고려·조선 시대의 과시문(科試文)이나 또는 고려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가사와 조선시대의 공용서식 등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체재와 형태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곧 한국의 한문학이 중국문학의 부용적(附庸的) 존재가 아니며 민족자주적인 독특한 풍모와 체취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여준다. 【고조선】 이 시대의 유서(遺書)는 모두 병화(兵禍)에 회진되어 상고할 만한 전적(典籍)이 없고 몇 가지 유물이 남아 있을 뿐이다. ⑴ 속곡(俗曲):한국 고대의 속사(俗詞)로서 기자(箕子)가 조선에 수봉(受封)되어 8조(條)의 정교(政敎)를 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찬송한 것이다. 《서경(西京)》 《대동강(大同江)》 두 곡으로, 사(詞)는 전하지 않고 곡목만이 남아 있다. ⑵ 비사(秘詞):단군의 사관(史官)이었던 신지(神志)가 문자와 사서(史書)를 지었다 하나 사서는 전하지 않고 비사 몇 구가 전한다. ⑶ 공후인(引):고조선 때 뱃사공 곽리자고(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었다는 4언4구(四言四句)의 악부(樂府)로 그 원문은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당신은 물을 건너지 말아요, 당신이 기어이 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으니 당신을 어이합니까)”의 네 구절이다. ⑷ 또한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는 비록 짧은 글이라 하나 당시에 이미 산문문학이 싹텄음을 엿볼 수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 불교·유교·도학이 차례로 수입되어 태학(太學)을 세우고 유학을 가르쳤다.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은 《유기(留記)》 100권을 개찬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고, 유리왕(瑠璃王)은 《황조가(黃鳥歌)》를, 을지문덕은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를 지었다. 이 밖에 속악(俗樂)으로서 《내원성(來遠城)》 《연양(延陽)》 《명주(溟州)》 등 세 곡이 비록 사(詞)는 없이 해제(解題)만 남아 있으나, 이는 당악(唐樂)이 아닌 국악에 관한 가사로서 고구려 문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백제〉백제의 한문학도 고구려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유·도교 삼교(三敎)의 수입과 함께 발전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는 한자(漢字)로 표기된 고흥(高興)의 《서기(書記)》가 이룩되었으며, 무왕(武王)이 지었다는 향가 《서동요(薯童謠)》가 전한다. 향곡으로서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등 6곡이 있으나 사(詞)는 없이 해제(解題)만 전할 뿐이다. 백제의 문학과 예술이 극히 정치(精緻)하였으나 그 작품이 많이 전하지 않는 것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삼국통일로 모두 인멸되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왜국과의 친화정책을 쓴 점은 특기할 일이며, 백제의 학술과 문학은 왕인(王仁)의 도왜(渡倭)로 왜국에 크게 전파되었다. 〈신라〉 통일 전 신라시대에는 향가가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이들이 비록 순수한 한문학은 되지 못한다 해도 한자문학의 범주에서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라 최초의 가요인 《도솔가(兜率歌)》를 비롯하여 《회소곡(會蘇曲)》 《우식곡(憂息曲)》 등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고, 또한 향곡(鄕曲)으로 대악(樂)·현학(玄鶴) 등 8종류가 이루어졌으며, 당(唐)나라의 양식을 차용한 당체(唐體)의 시가(詩歌)로 《구지가(龜旨歌)》 《태평시(太平詩)》 등 6종목이 나왔다. 한편 귀토설화(龜兎說話)는 조선시대 《별주부전(鼈主簿傳)》의 모태가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강수(强首)의 명문이 당제(唐帝)의 노여움을 풀고 원정군을 파견케 한 일은 유명하다. 통일 후 신라는 유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국학을 세우고, 교과서의 선정, 교수 방법, 학생의 선발요강 등을 발표하는 한편 과거에 화랑제(花郞制)로 인물을 선발하던 방침을 고쳐 독서삼품제(讀書三品制)를 실시, 지방의 관리까지도 독서 출신이나 당나라 유학생이 아니면 등용하지 않았다. 특히 설총(薛聰)은 이두문자를 창안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룩하고, 신라어로써 육경(六經)과 모든 문학서를 훈해(訓解)한 업적은 크다. 통일신라에서도 향가는 여전히 주조(主潮)를 이루어 《제망매가(祭亡妹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등 14종의 명작이 알려졌고 당체의 시가도 여러 편이 전한다. 소설은 신라 중기까지도 설화적인 계보에서 탈피하지 못하였으나,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는 설총이 신문왕(神文王)의 위정(爲政)을 풍자한 《화왕계(花王戒)》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양적으로는 극히 짧은 작품이나 깊은 우의(寓意)를 담고 있어 실로 한국 풍자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郞世紀)》가 있다. 신라 후기는 왕권(王權)의 쇠미(衰微)와는 반대로 귀족문학인 한문학은 장족의 발전을 보아, 김운경(金雲卿)을 비롯한 빈공제자(賓貢諸子)가 58인이나 되었고, 그 후 최치원·최승우(崔承祐)·박인범(朴仁範) 등이 백가쟁명(百家爭鳴)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하였다. 특히 최치원은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黃巢)의 난(亂)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그 문명(文名)을 중원에 떨쳤다.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등 많은 저서와 작품을 남겨 한국 한문학의 초조(初祖)가 되었으며, 또한 이에 이르러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한문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산문(散文)보다 운문(韻文)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의 양 대가(大家)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수많은 작가의 군상이 오로지 한문·당시(唐詩)로써 종풍(宗風)을 삼았으니 이는 당시 중국에서도 이러한 기풍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려의 문학이 한(漢)·당(唐) 나라의 경향만을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고려 1대(代)의 거국적 사업이었던 대장경(大藏經)의 간행은 순전히 자주적 사업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과거(科擧)제도가 확립되었고, 예종(睿宗) 때는 국학에 칠재(七齋)를 설치하였으나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사학(私學)의 권위가 국학을 능가하게 되어 거유(巨儒) 최충(崔?이 설치한 문헌공도(文憲公徒)를 비롯하여 실로 12개의 도(徒)가 있어 이후 고려의 명사들은 거의가 이 12도의 출신이었다. 신라 때 주조를 이루던 향가는 점차 쇠퇴하여 일종의 사뇌화(詞腦化)하였고 작품도 균여(均如)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首)와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을 뿐이다. 반면 한국의 악부(樂府)가 이 시대에 이루어졌으니 고려의 악부는 속악·당악·아악(雅樂)의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속악은 《한림별곡》을 위시하여 31편에 이르며, 당악은 속악과 잡용(雜用)하였는데 《헌천도(獻天桃)》 이하 48편이 있다. 아악은 종묘의 악으로 예종 때 지은 《등가악장(登歌樂章)》이 전한다. 〈시가〉 시가(詩歌)는 초기의 작가로 박인량(朴寅亮)·김황원(金黃元)·정지상(鄭知常) 등을 들 수 있으며, 최충도 훌륭한 시인이었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도 뛰어난 시인이었다. 박인량의 《금산사(金山寺)》, 정지상의 《송우인(送友人)》, 김황원의 《부벽루송(浮碧樓頌)》은 당대의 걸작이었다. 고려 후기의 시가는 이규보(李奎報)·오세재(吳世才)를 포함한 죽립칠현계(竹林七賢系)와 성리학(性埋學)이 대두한 이후의 이제현·이숭인(李崇仁) 등의 양대 주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 등도 운문에 정통한 시재(詩才)들이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서사시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그 후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도 이름이 높다. 이제현의 《산중설야(山中雪夜)》, 이색의 《부벽루(浮碧樓)》가 있고, 정몽주의 시도 일가를 이루어 《단심가(丹心歌)》는 한글 시조(時調)로도 번역되었고, 이숭인은 일찍이 《오호도(嗚呼島)》로 이름이 높았다. 〈사·부〉 고려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辭)·부(賦)도 한문학상 간과할 수 없으니 이인로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는 한국의 한문학사상 처음 나타난 사이다. 그 후 이색은 《유수사(流水辭)》를 비롯한 여러 편의 사를 지었고, 정몽주의 《사미인사(思美人辭)》도 호방준결(豪放峻潔)하며, 이숭인의 《애추석사(哀秋夕辭)》는 방형비측(芳馨菲惻)한 기품을 풍긴다. 부는 일종의 유운적(有韻的)인 산문으로, 김부식의 《아계부(啞鷄賦)》를 그 시초로 본다. 이규보는 《외부(畏賦)》를 비롯한 6편의 거작을 남겼고, 이인로의 《옥당부(玉堂賦)》와 《홍도정부(紅桃井賦)》는 쌍벽을 이룬다.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색의 《관어대부(觀魚臺賦)》도 유명하다. 고려 후기의 산문문학은 운문처럼 활발하지는 못하였으나 전기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잡록(雜錄)과 선집(選集)으로 구분할 수 있으니, 잡록계로는 이인로의 명저 《파한집(破閑集)》과 《쌍명재집(雙明齋集)》을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은 문학사상 처음으로 ‘소설’이란 글자를 사용하였다.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은 《파한집》의 보편이라 할 수 있으며, 승려 일연(一然)의 역저(力著)인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일대를 통틀어 가장 가치 있는 잡록계의 명저이고, 또한 이제현의 《역옹패설(翁稗說)》도 빼놓을 수 없다. 선집계(選集系)의 저서로는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 김구(金坵)·이송진(李松瑨) 등과 수창(酬唱)한 《용루집(龍樓集)》을 첫째로 들지 않을 수 없다. 김태현(金台鉉)이 찬한 《동국문감(東國文鑑)》과 김경숙(金敬叔)의 《선수집(選粹集)》 등은 모두 당시 선집계의 명저이다. 이 밖에 고려 후기의 한문학으로서 가전체(假傳體)의 소설이 있다. 임춘(林椿)의 명작인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었으며, 이규보의 《국선생전(鞠先生傳)》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은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다. 그 밖에 이곡(李穀)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승려 식영암(息影庵)의 《정시자전(丁侍者傳)》 등은 모두 가전체의 명작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한문학은 건국 초부터 실시한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과 과시제도(科試制度)의 다양한 발전에 힘입어 크게 발달하였다. 비록 훈민정음의 창제가 있었다 하나 조선 전기(全期)를 통하여 정음이 한문학의 장애적 요소가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상성적(相成的) 요소가 스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주자(鑄字) 기술의 발달도 한문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한문자로 표기된 모든 고전 해독에 있어 구결(口訣)을 쓰게 된 것은 당시의 특색이었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젊은 영재(英才)를 모아 정치·경제·법률·종교·문학·의례·과학 등 모든 방면에 걸쳐 광범위한 편찬사업을 벌여 그 저적(著籍)으로서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석보(月印釋譜)》 《동국정운(東國正韻)》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삼강행실(三綱行實)》 《효행록(孝行錄)》 《오례의(五禮儀)》 《농사직설(農事直說)》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이 있고, 그 밖에도 유·불교 양전(兩典)의 언해류(諺解類)가 출간되었다. 500여 년에 걸친 조선시대의 한문학은 실로 방대하여 그것을 일일이 서술하기는 곤란하므로 여기서는 다만 부문별로 가장 중요한 작품과 저자만을 적기로 한다. 〈사·부〉 조선 초기의 고부(古賦)로는 강희맹(姜希孟)의 《양초부(養蕉賦)》, 박상(朴祥)의 《몽유부(夢遊賦)》 《황종부(黃鐘賦)》 등이 알려졌으나 부가(賦家)로는 이행(李荇)이 가장 처음 두각을 나타내 《괘관동문부(掛冠東門賦)》 이하 66편의 부를 지었다. 천재시인 박은(朴誾)의 《차이백석여춘부(次李白惜餘春賦)》는 걸작이다. 조선 중기의 사·부는 별로 발전을 못하였으니 백광홍(白光弘)의 《봉래산사(蓬萊山辭)》, 이산해(李山海)의 《만초손부(滿招損賦)》 등이 모두 구태의연하다. 그 후 허균(許筠)의 《훼벽사(毁壁辭)》 《죽서루부(竹西樓賦)》는 향기 그윽한 작품이다. 영(英)·정조(正祖) 이후 사는 별로 지목할 만한 작품 없이 쇠퇴하였고, 부는 과부(科賦)가 국가고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그 주류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다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김택영(金澤榮)의 《오호부(嗚呼賦)》, 이건창(李建昌)의 《파초부(芭蕉賦)》, 변영만(卞榮晩)의 《칠석부(七夕賦)》 기타 몇 편이 나왔을 뿐이다. 〈악부〉 초기의 악부로는 권제(權)·정인지(鄭麟趾) 등의 봉명찬(奉命撰)인 《용비어천가》를 대표작으로 들 수 있으며, 김종직(金宗直)의 《동도악부(東都樂府)》는 회소곡(會蘇曲)을 비롯하여 8수가 수록되었다. 성간(成侃)의 《궁사(宮詞)》도 4수가 있다. 중기의 악부로는 임제(林悌)의 《억진아(憶秦娥)》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 이항복(李恒福)의 《철령숙운사(鐵嶺宿雲詞)》 《해수사사(解愁絲詞)》 등이 있으며,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어가주(漁家做)》는 준일(俊逸)한 작품이다. 그 밖에 권필(權)의 《임강선(臨江仙)》이 전한다. 인조(仁祖) 이후의 악부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나 면목만은 그대로 갖추었다. 당시 악부의 대가인 신흠(申欽)의 《장진주장곡(將進酒長曲)》을 비롯한 49수가 있으며, 이 밖에도 그의 악부체 149수가 전한다.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海東樂府)》 44수, 이형상(李衡祥)의 《호파구(浩謳)》 16수, 남구만(南九萬)의 《번방곡(方曲)》 11수 등의 악부가 있다. 후기의 악부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 중요한 것은 임창택(林昌澤)의 《해동악부》, 이익(李瀷)의 《성호악부(星湖樂府)》, 이광사(李匡師)의 《동국악부(東國樂府)》, 안정복(安鼎福)의 《순암악부(順菴樂府)》, 정약용(丁若鏞)의 《탐진악부(耽津樂府)》, 신위(申緯)의 《소악부(小樂府)》, 이학규(李學逵)의 《영남악부(嶺南樂府)》 《해동악부》, 그 밖에 수많은 악부가 이루어졌다. 〈시가〉 조선 전기의 시가(詩家)를 말할 때 먼저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어 세종의 집현전 학사들은 실로 드문 걸출이었다. 그들은 단종의 비극과 함께 사육신·생육신 등으로 갈렸고 여기에 비분강개적(悲憤慷慨的)인 시인의 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육신의 시는 그 충절에 있어 뛰어났으나 시격(詩格)에서는 그다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대표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매월당집(梅月堂集)》의 시가 중에서 《산행즉사(山行卽事)》의 1절(絶)은 뛰어난 작품이다. 이보다 앞서 단종의 《자규사(子規詞)》는 애염(哀艶)하기 비할 데 없는 작품이다. 세조 때의 신숙주(申叔舟)·김수온(金守溫)도 뛰어난 시인이었고, 서거정(徐居正)은 당대의 출중이라 할 수 있으며 《춘일(春日)》은 그의 시경(詩境)을 대표한 작품이다. 그 후에는 김종직(金宗直)이 가장 대가(大家)였고, 그의 문인 조신(曺伸)·이주(李胄) 등도 대표적 명가이다. 박은(朴誾)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중심인물이며, 이행(李荇)은 조선 전기의 시인 중에서 제1의 대가라 할 수 있다. 한편 성리학파(性理學派)의 시가로서 정여창(鄭汝昌)·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 등이 모두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그 밖에 남효온(南孝溫)·이희보(李希輔)·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휴정(休靜) 등은 모두 당대의 쟁쟁한 존재였다. 조선 중기 이후 삼당파(三唐派)의 중심인물로 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이 있으며, 이달은 그 중의 대가로서 《반죽원(班竹怨)》 《만랑가(漫浪歌)》 등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어서 송익필(宋翼弼)·최립(崔?·하응림(河應臨) 등 팔문장계(八文章系)의 시인이 나왔고, 특히 호남(湖南)에서는 임억령(林億齡)·백광홍(白光弘)·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임제(林悌) 등 호남파 시인이 등장하였다. 이호민(李好閔)은 당시 시단에서 가장 이름 높은 존재였고, 차식(車軾)·차천로(車天輅)·차운로(車雲輅) 3부자는 실로 중국 소식(蘇軾)의 3부자에 견줄 만하였으며, 특히 천로(天輅)는 뛰어난 대가로 후일 허균은 그의 《명천(明川)》을 격찬하였다. 한편 대저술가이며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작자인 이수광(李光)은 박학다식하여 그의 시문체는 하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정(雅正)하였다. 또한 이 시대 여류시인의 대표로 황진이(黃眞伊)가 있는데, 그녀는 한시보다는 시조시(時調詩)의 대가였으나 한시에도 일가를 이루어 《별소양곡(別蘇陽谷)》과 《만월대(滿月臺)》는 예원(藝苑)에서 자주 화제가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이르러 시가는 유몽인(柳夢寅)·허균으로 양계(兩系)를 이루었고, 특히 허균은 절대(絶代)의 시재(詩才)로 《황주염곡(黃州艶曲)》을 비롯하여 《궁사(宮詞)》에 이르기까지 섬려(贍麗)하지 않은 것이 없다. 조선 후기의 시가는 실학(實學)의 대두와 함께 이광정(李光庭)·이용휴(李用休)·박지원(朴趾源) 및 그들의 제자와 시우(詩友)에 의하여 상전(上典)의 죄악상과 부패한 사회상을 묘사하는 사실적인 작품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시가로는 허필(許)·신광수(申光洙)·채제공(蔡齊恭)·정범조(丁範祖)·권철신(權哲身) 등을 들 수 있으며, 한편 이언진(李彦)은 위항시인(委巷詩人)으로 많은 시작 중에 《호동서실(?書室)》은 당대의 기상편(奇想篇)이다. 그 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 등 속칭 4가(家)가 출현하였고, 이어서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학규(李學逵) 등은 그 재명(才名)이 일세를 경동(驚動)시켰다. 이가환의 《연광정차정지상운(練光亭次鄭知常韻)》, 정약용의 《석우별(石隅別)》 《용산리(龍山吏)》, 이학규의 《영회봉기백진(詠懷奉寄伯津)》 등은 모두 뛰어난 작품이다. 한편 신위(申緯)를 조선시대 제1의 대가로 꼽는 학자도 있으며, 그의 《잡서(雜書)》 50수는 양반의 폐막(弊)을 통탄하고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35수는 시로써 시를 평한 거작이다. 그 밖에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강위(姜瑋)·이만은(李晩恩)·김택영(金澤榮)·이건창(李建昌)·황현(黃玹)·안중근(安重根)·변영만(卞榮晩)·정인보(鄭寅普)·유인식(柳寅植) 등은 각기 일가를 이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김택영은 그 담백한 시풍이 가히 제1의 대가라 할 수 있으며, 유인식은 사회주의를 고창한 한문학자로 그가 쓴 《차야한십절(此夜寒十絶)》은 그의 사상을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의 시가에서 특기할 사항은 과시(科詩)가 중요한 한 몫을 차지하는 점이다. 과시는 변계량에서 비롯되어 수많은 학자·시인이 이것을 남겼으며,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김병연(金炳淵:김삿갓)도 과시에 이름이 높았다. 〈소설·산문·기타〉 조선 전기의 산문문학(散文文學)은 고려의 구습을 면치 못한 점, 중국문장에 미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으나, 반면 조직적인 면에서는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작품 중 문학적 요소를 지닌 중요한 것으로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 조신(曺伸)의 《수문쇄록(聞錄)》, 이행의 《용재수필(容齋隨筆)》, 이자(李)의 《음애일기(陰崖日記)》,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노수신(盧守愼)의 《소재일기(蘇齋日記)》,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선(文選)으로는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 김종직의 《동문수(東文粹)》가 대표적이다. 소설은 이것을 우언(寓言)·가전(假傳)·골계(滑稽)·전기(傳記)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우언으로는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첫편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원호(元昊)의 《몽유록(夢遊錄)》이 있으며, 가전체에는 이첨(李詹)의 《저생전(楮生傳)》, 정수강(丁壽崗)의 《포절군전(抱節君傳)》, 골계전으로는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송세림(宋世琳)의 《주장군전(朱將軍傳)》, 전기물로는 남효온의 《육신전(六臣傳)》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산문문학은 주로 평이온려(平易溫麗)한 경세(經世)의 문편(文篇)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할 수 있으며, 수필·평론류로는 정탁(鄭琢)의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 이제신(李濟臣)의 《청강시화(淸江詩話)》,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필(月汀漫筆)》,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 허봉(許)의 《해동야언(海東野言)》, 차천로의 《오산설림(五山說林)》, 이항복의 《백사잡기(白沙雜記)》, 이수광의 《지봉유설》 기타 수많은 저술이 있다. 그 중 특히 《징비록》은 경세(經世)의 문장으로 애국위민의 사상이 깊이 스며 있고, 《지봉유설》은 백과사전식의 유서(類書)로 획기적인 거작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의 소설로는 우언에 속하는 임제(林悌)의 《수성지(愁城誌)》, 윤계선(尹繼善)의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 전기에 속하는 이항복의 《유연전(柳淵傳)》 등을 들 수 있다. 그 후 광해군시대에는 시가(詩歌)와 마찬가지로 산문문학도 유몽인(柳夢寅)과 허균의 양계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譚)》, 성여학(成汝學)의 《속어면순(續禦眠楯)》, 허균의 《조관기행(漕官紀行)》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도문대작(屠門大嚼)》 등 많은 수필·평론이 있으며, 소설로는 《어우야담》에 실린 유몽인의 단편 《홍도(紅桃)》 《진이(眞伊)》 《강남덕(江南德)》, 우언류로 역시 유몽인의 《호정(虎穽)》과 《야서혼천(野鼠婚天)》, 협사류(狹邪類)로 허균의 《남궁선생전》 《장생전(蔣生傳)》 등이 있다. 가전체로는 유몽인의 《풍악기우기(楓嶽奇遇記)》, 성여학의 《관부인전(灌夫人傳)》, 권필(權)의 《곽색전(郭索傳)》, 골계류로는 유몽인의 《김인복(金仁福)》, 전기물로는 허균의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엄처사전(嚴處士傳)》 등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한문문학은 더욱 그 귀족적 요소가 짙어져 이정귀(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 등 훈척계(勳戚系)의 문인은 당시의 문단을 대표하는 4가(家)였으며, 그 후 허목(許穆)·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김창협(金昌協) 등이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신흠의 《상촌잡록(象村雜錄)》, 이식의 《택당산록(澤堂散錄)》, 장유의 《계곡만필(谿谷漫筆)》, 김석주의 《사군자문초(四君子文)》, 김창협의 《농암잡지(農巖雜識)》가 있고, 그 밖에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김육(金堉)의 《유원총보(類苑叢寶)》,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 김창집(金昌集)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저술이 있다. 소설은 우언계로 임영(林泳)의 《의승기(義勝記)》, 안서우(安瑞羽)의 《금강탄유록(金剛誕遊錄)》, 김춘택(金春澤)이 한역(漢譯)한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가 있으며, 가전류로 장유의 《빙호선생전(氷壺先生傳)》 등이 있다. 조선 후기의 산문문학은 실로 다양 다채로워 이를 간단하게 분류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다만 이 시대의 문학은 대체로 사실적이었다는 점만은 말할 수 있다. 수필·평론 등은 뛰어난 거작(巨作)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고, 다만 그 중에서 몇 작품을 추려 본다. 이광정(李光庭)의 《망양록(亡羊錄)》은 풍자문학의 선구(先驅)였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곽우록(藿憂錄)》은 경세치용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안정복의 《순암잡록(順菴雜錄)》 《잡동산이(雜同散異)》,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유득공(柳得恭)의 《냉재서종(冷齋書種)》,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정조(正祖)의 《홍재전서(弘齋全書)》, 정약용의 《다산전서(茶山全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 등은 모두 당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소설류에서도 당시의 사회정세에 따라 대체로 사실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어 염정류(艶情類)가 극히 드물고 반면 풍자와 협사(狹邪) 등이 비상하게 발전하였다. 염정물로는 이옥(李鈺)의 《심생전(沈生傳)》, 수산선생(水山先生)의 《광한루기(廣寒樓記)》, 유철진(兪喆鎭)의 《현토한문춘향전(懸吐漢文春香傳)》, 이능화(李能和)의 《춘몽록(春夢錄)》 등을 들 수 있으며, 지괴물(志怪物)로 이옥의 《신병사전(申兵使傳)》이 있다. 우언체로는 이광정의 《고씨묘(高氏猫)》, 이익의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 안정복의 《여용국전(女容國傳)》 등이 있고, 풍자소설로 이광정의 《호예(虎)》를 비롯하여 박지원의 제1기작인 《마장전(馬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양반전》, 제2기작인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 노긍(盧兢)의 《화사(花史)》 기타 여러 작품이 있고, 협사물로 신광수(申光洙)의 《검승전(劍僧傳)》, 이옥의 《가자송해솔전(歌者宋楷傳)》 등이 대표작이며 정약용의 《조신선전(曺神仙傳)》, 김조순(金祖淳)의 《오대검협전(五臺劍俠傳)》 등 많은 작품이 전한다. 가전체로는 이덕무의 《관자허전(管子虛傳)》, 유본학(柳本學)의 《조원전(鳥圓傳)》 등이 있을 뿐이며, 골계물로는 이용휴의 《해서정자(海西正者)》, 유득공의 《유우춘전(柳愚春傳)》 등이 전하고, 전기물로는 이덕무의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 김여(金)의 《유구왕세자전(琉球王世子傳)》, 박지원의 《우상전(虞裳傳)》 등 수많은 작품이 있다. 이상으로써 한국의 한문학을 시대적 또는 형태적으로 개관하였다.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한문학은 여러 차례의 서액(書厄)을 겪었다. 8·15광복 후 한문학은 한글 전용의 주장과 더불어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게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한 번 소중한 장서가 소진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조상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데 있어 이 방면의 전문가 육성은 긴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
첫댓글 만숙 선생님!!!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