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참봉 덕암 심공 행장(參奉德菴沈公行狀)
공의 휘는 제(梯), 자는 덕승(德昇)이며 그 호는 덕암(德菴)이니, 우암(尤菴) 송 문정(宋文正: 송시열)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문림랑(文林郞)을 지낸 홍부(洪孚)가 그 시조이다.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는 우리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개국하였는데 이때부터 높은 벼슬이 이어졌다.
좌참찬 휘 광언(光彥)은 공의 5대조인데, 이분이 참봉 휘 현(鉉)을 낳고, 이분이 감찰 휘 종범(宗範)을 낳고, 이분이 휘 탁(倬)을 낳았는데, 광해군 때 적신(賊臣) 한찬남(韓纘男)의 혼사 논의를 거절하였다가 그의 핍박을 받아 강가에 우거하다가 포의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분이 휘 지한(之漢)을 낳았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혼인하였으니 병조 판서 징(徵)의 증손이며 4남을 두었는데 공은 그 두 번째이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중후하여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과를 정해 공부하여 약관도 되지 않아 이미 큰 선비가 되었다.
승지공의 상을 당하자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으며, 따로 서재를 짓고 둘째 아우 해(楷)와 함께 항상 그곳에서 지내면서 전(奠)을 올리는 여가에 경전에 잠심하고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 후 해가 일찍 죽자 공은 형제 사이의 두려운 벗 하나를 잃었다고 애통해하며 더욱 노력하였다.
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상과 똑같이 예를 지켰다. 공은 평소 벼슬할 뜻이 없었으나 모친의 명으로 과거를 보았는데, 이때부터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니, 마을에서 소문을 듣고 따르는 자가 많았다. 공은 만의사(萬義寺)에서 우암 선생을 처음 뵈었다.
선생이 공에게 나이가 몇인지 묻자 대답하기를,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생입니다.”
하니,
선생이 서글피 말하기를,
“난리 이후에 태어났구나.”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명나라 때의 일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릅니다.”
하였다.
돌아온 뒤 공이 편지를 보내 그 당시 하문한 뜻을 알려달라고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나는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이전에 태어나 황조(皇朝: 명나라)의 은택을 입은 사람은 황상의 은혜를 더욱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 이것은 난리 이전에 태어난 사람의 탄식이다. 정축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미처 황조의 문물과 위의를 보지 못하였다. 그날 그대의 ‘정축’이라는 글자로 인하여 마음이 서글퍼져 나도 모르게 말이 나온 것 뿐이다.”
하였다.
공은 평생 존주양이(尊周攘夷)를 제일의 의리로 삼았으니, 여기서 전수받은 것이었다. 공은 독서하다가 의문이 있으면 그때마다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질문하였다. 편지가 두세 차례 왕복하기도 했는데, 선생은 매번 정확하다고 감탄하였다. 선생이 장기(長鬐)로 유배되자 공이 가서 문안하고 의리를 강론하였다. 이별을 앞두고 공이 시를 지어 올리자 선생이 말하기를,
“죄인이라 감히 화답할 수 없다.”
하고, 훗날 화답시를 보내어 간곡한 뜻을 보였다.
공은 현석(玄石) 박공(朴公: 박세채)과도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누차 편지를 주고받았다. 승지공은 청렴결백을 집안에 전수하여 자손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어 원근에 나뉘어 살았다. 공은 죽산(竹山)에서 해주(海州)의 고산(高山)으로 이사하였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옛집과 몹시 가까웠다.
때때로 학자들과 서원을 배알한 뒤 강당에 올라《격몽요결(擊蒙要訣)》한 편을 읽고, 또 산수 사이를 배회하며 어른과 아이들에게 선생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외게 하니, 마치 어렴풋이 선생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였다.
공이 새로 살게 된 집이 몹시 누추하여 사람들이 졸렬하다고 비웃으면, 그때마다“외물이 좋으면 심신이 먼저 좋지 못하다.”라는 한마디를 외어 해명하였다. 형님 주부공이 세상을 떠나자 종가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는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선대의 신주와 형수를 모시고 돌아왔으니 율곡 선생이 남긴 법도를 따른 것이었다.
승지공이 예전에《대학연의(大學衍義)》의〈숭경외(崇敬畏)〉,〈빈풍(豳風) 칠월(七月)〉,〈주서(周書) 무일(無逸)〉,《주례(周禮)》의 황정(荒政), 사정(邪正) 몇 조목을 네 폭의 족자로 만들어 효종에게 경계로 올려 특별히 칭찬을 받았다.
말년에〈역월괘도설(易月卦圖說)〉을 지어 진상하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다. 공이 더욱 연구하고 또 세월을 들여《연회(衍會)》한 책을 저술하고, 또《시경》,《서경》,《주례(周禮)》등에서 어린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을 수집하여 숙종조에 바쳐 승지공이 남긴 뜻을 이으려 하였으나 결국 올리지 못했다.
공은 은거하여 뜻을 지키고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사모하지 않았으나 시대를 상심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초야에 있어도 차이가 없었다. 한번은 어진 이와 사악한 이의 진퇴에 나라의 치란이 달려 있다고 여기며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아무개는 어질다.” “아무개는 사악하다.”라고 하였다.
어진 사람이면 기쁨이 낯빛에 드러났고, 사악한 사람이면 밤새도록 근심하고 한탄하였으니 모두 지극한 정성과 간곡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당파가 나뉘었는데 공이 몹시 슬퍼하며,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색목(色目)이 이미 망국의 바탕이 되었는데, 또 이렇게 한 집에서 싸움이 일어났으니 무한한 화의 기미가 어둠 속에 잠복한 것이다. 이미 이와 같다는 것을 알고서 내가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우암에게 편지를 올려,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지고 선비들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시사가 어지럽고 나라의 형세가 어려운데 선생께서는 어찌 이를 유념하지 않으십니까. 처음 불이 붙었을 때는 그래도 불을 끌 수 있고, 처음 물이 흐를 때는 그래도 하천을 막을 수 있습니다. 노론과 소론은 지금 마치 처음 불이 붙고 처음 물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러한 때에 불을 끄고 물을 막을 방법을 생각하여 젊은이들이 비록 비방하는 논의를 하더라도 항상 너그러이 용납한다는 점을 보이고, 늙은이들이 과격한 논의를 하더라도 더욱 조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더라도 너무 심해서는 안 되고 선을 장려하더라도 너무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사림을 정돈하고, 시사를 화평하게 하여 나라의 형세를 공고히 하는 것이 오늘날 선생의 책임이자 온 나라 사람들이 선생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 현석에게 편지를 보내어,
“삼가 들으니 당신께서는 언행을 반드시 우암 어른과 달리하고자 하여 조금 양쪽으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 들었을 때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이 이야기가 점차 전파되어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으니, 이것이 제가 몹시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전에 당론이 처음 싹텄을 때, 저는 보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하였고, 당신께서는 소론이 멈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갈수록 심해져 마치 불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고 물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지고 선비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시세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지금 이 논의가 더욱 확대된 것은 반드시 당신께서 그 형세를 조장했기 때문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친척은 노론이 헐뜯는 사람이고, 당신의 벗들은 소론이 어울리는 사람이니, 당신께서도 필시 들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비록 스스로 해명하고자 하더라도 집집마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노론과 소론의 당파를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여 당파가 없어져 결국 화평에 도달한다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또 윤증(尹拯)에게 편지를 보내 경계하기를,
“노론과 소론의 당론이 온 나라에 가득 찼으니, 형과 현석이 함께 허물을 떠맡아야 합니다. 당파의 화란이 이미 싹터 점차 가득 차고, 충성스럽고 바른 사람이 위축되며 사특한 자가 곁에서 엿보니 끝에 가서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형과 우암 어른의 뜻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단지 묘도문 한 가지 뿐입니다.
형의 도리에 있어서는 나쁜 소문을 내지 말고 깊이 후회하고 자책하며 먼 훗날의 공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한바탕 소란을 일으켜 먼저 대치하여 평소 우암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형을 빙자하여 함께 일어나 공격하게 하였으니, 그 허물을 떠맡을 사람은 형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형의 집안은 팔송[八松: 윤황(尹煌)] 이래로 효성과 우애, 충성과 신의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사문(師門)에서 변고를 일으키고 화의 기미를 도발하여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보는 사람들은 무어라 하겠으며, 후세에 논하는 사람들은 또 무어라 하겠습니까. 부디 형과 자서(子恕) 및 여러 형제들이 서로 권면하여 회답해 주십시오.”
하였다.
자서는 윤증의 아우 윤추(尹推)의 자이다. 현석은 또 재주 있는 사람을 가려서 섞어 써야 한다는 한쪽 사람들의 논의를 한창 주도하고 있었다. 공은 몹시 안 된다고 여기면서 의리에 근거하여 깨우쳤으나 끝내 생각을 바꾸게 하지 못했다. 공이 다시 편지를 보내 논변하였는데 자세하여 수천 자나 되었다.
대략 이르기를,
“율곡 선생의 시대에 당론이 처음 싹터서 사정(邪正)이 분별되지 않았습니다. 선생께서는 반드시 조정하여 융통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어진 뜻입니다. 지금은 시세가 현격히 달라졌으니, 율곡을 공격하는 자는 분명 소인의 무리이고, 율곡을 존숭하는 자는 대부분 군자의 부류입니다. 사정이 이미 나뉘고 선악이 저절로 구별되었는데, 군주를 미혹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저들은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전에는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것을 시론(時論)이라 하더니 지금은종묘에 고하는 것을 시론이라 하고, 전에는대비를 폐위하는 것을 기회로 여기더니 지금은자전을 모욕하는 것을 기회로 여깁니다. 때를 얻고 뜻을 얻으면 반드시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좀먹으며, 때를 잃고 뜻을 잃으면 반드시 모후를 폐위하고 군주를 바꾸려 합니다.
그 간사한 마음과 사특한 행태가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어찌 이러한 당파를 서인 속에 섞어 넣어 우리나라에 끝없는 화를 끼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집사께서는 예전에 보셨을 것이니, 물과 불이 한데 모이면 그 형세를 보존할 수 있습니까. 향내 나는 풀과 악취 나는 풀이 섞이면 그 냄새를 보존할 수 있습니까. 군자와 소인을 함께 등용하면 다스림을 보존할 수 있습니까.
선을 좋아하면서 그 맑음을 함께하고, 악을 미워하면서 그 더러움을 함께하는 것도 이치가 본디 이와 같습니다. 서인 중에 못난 자를 물러나게 하는 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인 중에 뛰어난 자를 등용하면, 그 뛰어난 자가 또 자기 무리를 끌어들여 조정을 가득 채울 것이니, 지난번 허적(許積)의 일을 거울삼을 만합니다.
아, 율곡은 당론을 타파하고 나란히 등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끝내 계미년(癸未年, 1583, 선조 16)의 화가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지금 시대는 율곡의 시대와는 다르며, 남인의 가득찬 죄악은 동인(東人)과 다르니, 혼용할 수 없다는 점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 청음(淸陰: 김상헌)의 논의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현석이 답장에서 또 황극(皇極)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심지어 공을 두고 어질지 않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의 화가 일어난 뒤, 현석은 비로소 공의 밝은 견해에 감복하였다. 우암 선생이 사사당하던 날, 공은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정국이 바뀌자 현석이 다시 부름을 받고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가 편지를 보내 공에게 자신의 거취를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제가 보기에 집사께서는 무진년(戊辰年, 1688, 숙종 14)에 명에 응한 것은 헤아리지 않고 조정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성상께서 새로 뉘우치고 나랏일이 위태로우며 조정이 텅 비었으니, 시대를 위해 출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는 것은 집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리입니다.”
하니, 현석이 마침내 조정에 나아갔다.
당시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내렸기에 현석이 12인을 천거하였는데 공이 으뜸이었다. 이후 경진년(庚辰年, 1700, 숙종 26) 처음으로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 수암(遂菴) 권공(權公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얼핏 들으니,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 수의(收議)할 적에 존형께서 강화도에 세우자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신종(神宗) 황제의 사당은 큰 길에 세워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서울 안팎의 조용한 곳에 세워야 합니다.
어찌 외지고 누추한 섬에 봉안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모름지기 광명정대한 데서 나온 뒤에 당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고 후세에 할 말이 있습니다. 저 청나라 오랑캐도 행여 감복하고 공경할 수 있으니, 무엇을 꺼려서 미리 의심하고 걱정하십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의 집안에 있던 도적 노비가 강도를 끌어들여 불을 켜고 뛰어들어 공의 부자를 해치려 하였다. 공의 배위 오씨는 칼날을 무릅쓰고 공을 덮어 보호하다가 중상을 입어 세상을 떠났다. 공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곧장 교하(交河)로 떠났다. 얼마 후 파주(坡州) 월롱산(月籠山) 북쪽에 터를 잡았으나 미처 집을 짓기 전에 우연히 병에 걸려 병술년(丙戌年, 1706, 숙종 32) 5월 7일, 임시로 살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0세였다.
공은 세 번 혼인하였다. 파평 윤씨(坡平尹氏), 해주 오씨(海州吳氏), 풍양 조씨(豐壤趙氏)로 모두 공인(恭人)이다. 오 공인의 조부는 현감 윤함(允諴)이니, 추탄(湫灘오윤겸(吳允謙)) 정승의 아우이다. 공과 함께 가난하게 살면서도 한탄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어 실로녹거(鹿車)의 유풍이 있었다.
공인이 죽고 7일 뒤, 도적 집에 있던 개성 의원의 꿈에 나타나 장물 옷을 가지고 가서 고발하게 하여 마침내 도적을 찾아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해주 고을 선비들이 절개를 세웠다고 조정에 아뢰어 정려를 하사받았다. 윤씨는 20세에, 조씨는 향년 61세에 세상을 떠났다.
오(吳)씨는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익희(益煕)는 일찍 죽었고 딸은 관찰사 서명연(徐命淵)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딸은 계례(笄禮)를 치르기 전에 죽었다. 손자는 중하(重夏), 진사 중은(重殷)으로 모두 문장과 행실이 있었으나 불행히 일찍 죽었다. 중주(重周)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직장을 지냈다. 중은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일진(一鎭)은 남의 후사로 출계하였고 다음은 수진(洙鎭)이다. 중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백부의 후사가 되었다.
공은 용모가 엄격하고 지조가 확고하였다. 곁눈질을 하지 않았고 함부로 웃거나 말하지 않았으니 타고난 자질이 원래 도에 가까웠다. 학문을 할 적에는 신기한 것에 힘쓰지 않고 반드시 평범하고 실질적인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빨리 도달하는 데 힘쓰지 않고 반드시 축적을 위주로 하였다.
《소학》을 평생 받아들여 활용하는 근본으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준칙으로 삼았다. 평소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똑바로 앉아 늘 읽고 생각하여 터득하면 곧 기록하였다. 매번 증자(曾子)의“죽은 뒤에 그만둔다.”라는 가르침을 외면서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이 평소 가난하였으나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만년에는 이틀에 한 번 끼니를 먹었으나 태연히 지냈으니, 세상사에 대해서는 일절 담박하였다. 집안에 법도가 있어 질서정연하였는데, 한번은 말하기를,
“고식적으로 처첩을 대하면 처첩은 공경하지 않고 무례해지며, 고식적으로 자손을 사랑하면 자손은 배우지 않고 행실이 없어지며, 고식적으로 노비를 부리면 노비는 일을 하지 않고 무식해진다. 집안을 다스릴 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나라는 어떻겠는가.”
하였다.
가르칠 적에는 행실을 먼저하고 문장을 뒤로 하였으며, 경학을 귀하게 여기고 과거공부를 천하게 여겼다.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로 나아가 차례로 순서를 따랐다. 성품이 속습을 좋아하지 않아 모든 일은 옛 도를 표준으로 삼았으며, 성심으로 남을 대하여 남의 선행을 들으면 자기가 한 것처럼 기뻐하고, 선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 혹시라도 자기를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절의를 세우거나 충성하고 효도한 사람이 있으면 가난한 민간의 서민이라도 마음을 다해 표창하며 행여 인몰될까 두려워하였다. 고을에서 재물의 이익을 다투거나 술과 여색에 빠졌다가 공의 좋은 가르침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허물을 고친 자도 종종 있었다.
공은 비록 초야에서 나오지 않았으나 논의는 세도에 관계가 매우 컸다. 공이 우암 선생을 스승으로 존숭한 것은 당연하니 논할 것도 없고, 현석과 윤증까지도 벗으로 대우하여 자(字)를 불렀다. 그러나 시비와 호오가 달라질 적에는 용서하지 않고 엄격하였다.
한번은 말하기를,
“화숙(和叔박세채)은 서인과 남인을 등용하고 버리는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그 학술을 알 만하다. 자인(子仁윤증) 부자는 그간 우암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보면 심술이 의심스럽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암은 일을 당하면 오직 의리가 있는 곳으로 용맹하게 곧장 나아갔으니, 천 장 절벽이 서 있는 듯한 기상이 있었다. 화숙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잘 따랐으나 이익과 손해의 관건에 대해서는 가장 분명히 알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암은 율곡 이후의 한 사람이니, 그의 학문을 논하자면 참으로 화숙의 스승이다. 그런데 화숙은 도리어 그를 등져서 점차 혼란을 초래하였으니 견식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화숙은 젊은이들과 함께 나랏일을 다스리려 하면서 노성한 이들과 틈이 벌어지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으니, 한탄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윤증이 화숙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화숙이 만약 곧장 의리에 근거하여 통렬히 꾸짖었다면 윤증은 필시 방자하게 비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화숙의 편지는 다만 그로 하여금 자세를 낮추어 사죄하게 하였을 뿐이었기에 윤증이 끝내 스승을 배신하게 하였으니, 이는 화숙의 책임이다.”
하고,
자기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스승과 제자의 도리는 지극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수천 년 동안 존숭하던 스승의 도가 윤증에 이르러 마침내 무너졌으니 애통하다. 사림에 다툼이 벌어져 각기 제 스승을 존숭하며 서로 비방하는데, 오직 박화숙(朴和叔)만이 중간에 있으면서 일정한 논의가 없고 진정한 견식이 없다. 지금 스승을 찾는 사람은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하였다.
공은 윤증과도 인척의 우호가 있었기에 교분이 제법 두터웠다. 그러다가 공이 누차 편지를 보내 꾸짖어도 끝내 고치지 않고, 우암이 화를 당하고 윤증이 대사헌에 의망되자 이때부터 절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공이 노년이 되었을 때 윤증이 공의 종인(宗人)이 외어 전한 공의 시를 보고서 차운하고, 또 편지를 보내 옛정을 말했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절교한 지 오래인데 어찌 이제 와서 교분을 논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종인이 굳이 답장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쓰려 하지 않았으니, 의리에 대처함이 이와 같이 엄격하였다. 아, 세도가 무너진 지 세월이 오래되어 의리가 더욱 어두워졌다. 처음 배우는 후생은 각기 견문에 매몰되었으니, 자기가 시비를 대략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들 어찌 그 본말을 끝까지 궁구할 수 있겠는가.
후대에 와서 옛일을 논하는 선비들은 대부분 그 실정을 알기가 어렵다. 공과 같은 사람은 몸소 사우 사이에 있으면서 변고를 경험하고, 시종일관 공정하게 듣고 나란히 보았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발언하였다. 그 투철한 견식과 준엄한 논의는 먼 훗날 증거로 삼을 만하다. 그러므로 나는 행장에 특별히 써서 여러 번 기록하며 비록 번거로워도 줄이지 않았다. 이 또한쇠퇴한 세상의 뜻이리라.
--------------------------------------------------------------------------------------------------------------------------------------------------------
[脚註]
[주01] 참봉 …… 행장:
이 글은 심제(沈梯)의 행장이다. 심제의 자는 덕승(德昇), 호는 덕암(德菴)이다. 1637년(인조 15) 태어나 1706년(숙종 32) 5월 7
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외물이 …… 못하다:
《소학》〈가언(嘉言)〉에 실려 있는 정이(程頤)의 “좋은 외물을 얻으면 도리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이미 스스로 좋지 않게 됨을 알
지 못한다.[苟得外物好時, 却不知道自家身與心, 已自先不好了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03] 문묘 …… 것:
남인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일을 말한다. 이들은 1682년(숙종9) 문묘에 배향되었다.
[주04] 종묘에 고하는 것:
1659년(효종 10) 기해예송 때 효종을 서자(庶子)로 간주하는 송시열의 주장이 채택되었는데,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 때 효종
을 적자(嫡子)로 간주하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송시열의 죄를 다스리고 이를 종묘에 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주05] 대비를 폐위하는 것: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한 사건을 말한다.
[주06] 자전을 모욕하는 것:
1675년(숙종 1) 박헌(朴瀗) 등이 명성왕후(明聖王后)를 핍박하는 상소를 올린 일을 말한다.
[주07] 계미년의 화:
1583년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박근원(朴謹元) 등 동인들이 이이를 탄핵하다가 유배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동서 양
당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주08] 계해년 청음(淸陰)의 논의:
김상헌은 1623년 인조 반정 이후,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면서 “논의를 달리하는 자들이 태도를 바꾸고 마음을 돌려야 수용할 수 있
다.”라고 하였다.《白湖集 附錄 年譜》
[주09] 무진년에 …… 것:
박세채가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입시하여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 임명을 문제삼았다가 숙종의 분
노를 사서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주10] 녹거(鹿車)의 유풍:
후한(後漢) 사람 포선(鮑宣)의 아내 환씨(桓氏)가 부유한 친정에서 준 혼수를 모두 돌려보내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수레[鹿車]
를 끌고 시골에서 살았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後漢書 卷84 列女列傳 鮑宣妻》
[주11] 죽은 뒤에 그만둔다:
《논어》〈태백(泰伯)〉에 보인다.
[주12] 쇠퇴한 세상의 뜻:
《주역》〈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오는 말로, 순박한 상고 시대와 달리 세상이 변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