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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
율정 선생 윤 문정공 묘지명 병서 (栗亭先生尹文貞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율정 선생을 장사한 지 석 달이 지나서 선생의 손자 소종(紹宗)이 그가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선생의 분묘에 명(銘)하여 주기를 청해 왔다. 아, 공이 돌아가셨구나. 내가 북경에서 선자(先子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사를 듣고 달려 오니, 선생이 여러 분보다 먼저 오셔서 곡을 하였고, 곡을 마치고 다시 나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긴 한숨을 지으며 탄식하고 돌아가셨는데, 이제 20년의 긴 세월이 흘렀어도 이를 감히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상사에 길이 멀어 가서 한 번 곡하지 못하고 있으니, 묘명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公)의 이름은 택(澤)이요, 자(字)는 중덕(仲德)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양비(良庇)인데, 무송현(茂松縣) 호장(戶長)이요,
조부의 이름은 해(諧)인데,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 치사(正獻大夫國學大司成文翰司學致仕)이다. 상주(尙州)의 사록(司錄)으로 있을 때에 고을 백성 중에 누이에게 난행을 한 자가 있었는데 이때 심한 한발이 계속되었다. 정헌공[正獻]이 고을의 장관과 다투어 끝내 극형으로 처치하니, 하늘이 과연 비를 내린 적이 있었다.
형조와 사헌부의 관직을 역임할 때에는 강직하고 씩씩함을 견지하였다. 경상ㆍ전라ㆍ양광(楊廣)ㆍ회양(淮陽) 등의 여러 도는 모두 안찰사로 있었고, 중승(中丞)으로 있을 때 죽도 계속 먹지 못하여, 콩을 삶아 주림을 채울 뿐이어서 세상에서 청백리라고 이름지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은 수평(守平)으로 봉익대부 밀직부사의 증직(贈職)을 받았는데, 정헌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어머니 김씨는 진례군부인(進禮郡夫人)의 봉호를 받았으며, 지원(至元) 기축년에 공을 낳았다. 공이 출생한 지 3년, 세 살 때부터 학업을 시작하였는데, 수업하기만 하면 외었으며, 정헌공은 공이 사람을 경동(警動)시키는 문구를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앉아서 울며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는 바로 너구나. 수평이 죽지 않았도다.”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깊이 자립의 뜻을 세우고서, 일찍이 장원한 적이 있는 고모부(姑母夫)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글을 배워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더욱 《좌씨춘추(左氏春秋)》에 연구가 깊었다. 항상 문정공(文正公) 범중엄의, ‘천하 사람의 근심을 내가 먼저 걱정하며, 천하 사람이 즐긴 이후에야 나도 즐거워하리.’라는 말을 외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평범하게 살아가랴.” 하였다.
연우(延祐) 정사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경신년에 수재과(秀才科) 〈보검부(寶劍賦)〉로 제1위로 급제하니, 사람들이 그 글을 많이 서로 전해가며 애송하였다. 경산부 사록(京山府司錄)에 선발ㆍ임용되어 농경(農耕)을 독려하고 학교를 보수하며, 백성들에게 상례와 제례를 권장하고 예절과 풍속을 진흥시켰다.
서적록사(書籍錄事)로 들어와 다시 교감ㆍ검열 등 관직을 역임하니, 벼슬은 겨우 9품에 불과하였으나 재상으로 자처하니 혹은 너무 거만하고 경망하다고 하였으나, 공은 떳떳한 태도로 자처하면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지순(至順) 임신년에 의릉(懿陵)이 북경 저택에 있자, 공이 필마로 들어가서 알현하니 이금이 한 번 보고 곧 국가의 큰 그릇임을 알고 후히 대접하고, 이어 뒷일을 부탁하는 말이 있었으니, 임금의 뜻이 지금의 전하에게 뜻을 두었던 것이다. 공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이미 늙었으니 어찌 해내겠습니까.” 하였다.
다음해에 임금이 서경에 행차를 머무르니, 검열권참군(檢閱權參軍)으로서 모든 설비와 차비를 법도 있게 하여,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편안히 지나가니, 임금이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질도다. 회(回 안회(顔回)라는 공자의 제자)의 사람됨이여.” 하니, 이는 공의 용모가 중국인과 유사한 때문이었다.
원나라의 조사(詔使)가 왔기에 공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읽으라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조서를 읽는 데는 본래 내외제(內外製)가 있는데, 참군이 읽는 것은 종전의 관례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군으로 양제(兩製 내외제)를 삼는 것도 내게 달린 것이 아니냐.” 하고, 드디어 명하여 권응교(權應敎)를 삼고 자문나포(紫文羅袍)를 하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부윤(府尹)으로 발탁하려다가 자급(資級)이 낮다 하여 판관(判官)으로 승진시켰다. 어떤 사람이 공을 불손한 자로 무고(誣告)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생(尹生)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필연코 너의 무고일 것이다.” 하였다.
무인년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되어 인물의 전형과 선임을 맡으니, 임금이 공의 아들에게 호군(護軍) 벼슬을 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맑은 벼슬자리가 지극히 중하며, 또 어질고 공로 있는 신하도 오히려 벼슬이 침체되어 있는데, 감히 신의 자식에게 사사로이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더욱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기묘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승직하고, 성균관에서 선비들을 시험하고 안원룡(安元龍) 등 99명을 선발하니, 알려진 명사(名士)가 많았다. 3월 계미에 임금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임금이 다시 북경에서 하던 말을 공에게 거듭 말하니, 공이 무릎꿇고 대답하기를, “성상의 염려를 번거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이 왕위에 오르고 정치의 혁신을 도모하니, 공은 즉시 전원으로 물러가 한가로운 나날을 조용히 보내면서 보양하였다.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다시 나주 목사에 피선되니, 공이 부임하는 곳에는 언제나 정사에 관용을 위주로 하면서도 강폭한 자를 제어하고 나약한 자를 붙들어 세웠는데, 총릉(聰陵 충정왕(忠定王)이 왕위에 서게 되자 다시 광양 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처음에 명릉이 돌아가니, 백성들의 여망이 모두 지금의 임금으로 돌아갔다. 공이 발의하여 원나라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본국에는 형제와 숙질(叔姪)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젊은 임금이 그 보위(寶位)를 감당하여 보전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하였는데, 그 표현이 매우 절실하여 총릉이 이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에, 이런 좌천의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신묘년에 임금이 처음 정사에 임하자, 밀직사(密直司)로 들어와 제학(提學)이 되니, 확고히 당세의 일을 바로잡는 책무로 자임하고, 소를 올려 건의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드디어 개성윤(開城尹)으로 치사(致仕)하니, 당시 공의 나이가 64세였다.
근신(近臣)이 향악(鄕樂)을 원나라에 바칠 것을 건의하니, 공이 이 사실을 듣고서 상소하기를, “세황(世皇 원 나라 세조(世祖))이 일찍이 이미 물리친 것을 이제 다시 바치면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국가 재정의 절약을 말하니, 임금이 마음속 깊이 이를 받아들였다.
남경(南京)에 궁실을 지으니, 공이 말하기를, “중 묘청(妙淸)이 인묘(仁廟 인종)를 미혹하게 하여 나라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감계(鑑戒)가 절실할 뿐만 아닙니다. 더구나 오늘날 사방 변경에 다른 도둑의 침범에 대비하여 병사를 양성하여도 오히려 부족한데, 공사를 일으켜 민중을 노역에 동원한다면 아마도 근본을 손상하게 하지 않을까 우려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서경》의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재신(宰臣)들에게 하사하게 하고, 공에게 명하여 이를 강의하게 하니, 이로 인하여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공로를 진달하여 말하기를,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왕을 본받아 주공의 훈계를 들으시고, 장중하고 겸손하며 스스로 억제하고 삼가며 두려워하시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니, 임금이 정색하고 들었다.
공은 또 진서산(眞西山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편저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본조의 중령(中令) 최승로(崔承老)가 성묘(成廟 성종)에게 글을 올려 모두 진강(進講)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불교의 학설에 깊이 맛들여 초연히 멀리 갈 뜻이 있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위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생민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저 윤리를 폐절한 한낱 필부의 일을 본받으려고 하시옵니까. 신의 말씀을 들으신다면 공자의 도(道)가 아니면 불가하니,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에 더 살피시옵소서.” 하였으며, 또 백악(白岳)의 공사에 대하여도 공이 그 폐해를 극력히 말하고 이어 아뢰기를, “모든 일의 잘잘못을 성상의 의중에 비록 훤히 아십니다만 대신에게 위임하시고 즉시 처분을 내리지 않으시기에,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이미 그 폐해가 이루어져 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술을 내려 주었다.
공은 단번에 석 잔을 마시고도 정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니, 홍언박(洪彦博)이 이를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윤공의 강직함이 이 경지인 줄은 몰랐다. 내가 할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공이 비록 치사(致仕)하였으나 선왕의 임종 때의 명을 받음으로써, 일찍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어, 혹 지나치게 곧다는 지경에 이르러도 임금 또한 너그럽게 용납하였던 것이다. 갑진년에 공의 나이 76세로 질병이 생기자, 소를 올리고 금주(錦州)로 돌아가서 스스로 산수를 즐긴 지 7년이 지났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잠시도 잊는 때가 없었다.
경술 8월 병자일에 아들과 손자들을 앞에 불러 놓고 훈계하기를, “우리 할아버지 정헌공께서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시어 청백하고 충직하신 것으로 당대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께서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항상 선대의 뜻을 잇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어쩌다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은총과 영록(榮祿)이 바라던 정도에 훨씬 넘었고, 나이 또한 팔순(八旬)을 넘었으니, 이는 모두가 선대의 숨은 덕의 소치요, 정헌공의 청백이 남기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굳게 지키고 떨어뜨리지 말 것이며, 내가 장차 죽거든 장사에 구기(拘忌)하지 말고, 부도법(浮屠法 불가의 법)을 쓰되 너무 사치하지 말라.” 하고, 9월 정유일에 세상을 마쳤는데, 이날 저녁에 하늘로부터 큰 바람과 비가 일더니, 입관(入棺)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쳤다.
기해일에 대부인(大夫人 어머니)의 분묘 옆에 안장하였다. 부고를 아뢰니 임금은 몹시 애도하고 태상(太常)에게 명하여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내리니, 공의 사후에 있은 영광의 은전 또한 흠이 없다고 할 만하다. 공이 이미 일찍 부친을 잃어 미처 아버지의 얼굴도 알지 못한 것을 더욱 한하여, 시제(時祭) 때에 분묘에 올라가면 반드시 목을 놓아 곡하며 몹시 애통해 하였고, 또 서적에서 부자간의 은정을 기술한 것을 보면 언제나 눈물을 떨어뜨리며 기가 막혀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곤 하였다.
또 항상 주머니 한 개를 차고 있다가 맛난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집에 가서 대부인에게 드렸고, 남들이 비웃었지만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다. 윤장원이 죽으니 손녀 둘이 의탁할 곳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우리 고모부의 손자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 어찌 사람이 될 수 있으랴.” 하고, 선비를 택하여 시집보냈다.
나가서 놀 때에 길에서 금(金) 백 냥을 떨어뜨린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지키며 주인을 기다리니, 잃어버렸던 주인이 울면서 깊이 사례하고 갔다. 그러나 조금도 남에게 덕을 보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공은 평생을 베 이불과 헤어진 자리를 깔고 덮었고, 혹은 끼니를 건널 적도 있었으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도 봄 가을의 좋은 때가 이르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손님을 맞아 즐겼으니, 그 본연의 성정(性情)에 맡겨 유유자적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은 무릇 네 번 장가갔는데, 문(文)씨는 진사 부(富)의 딸로 아들 귀생(貴生)을 낳았는데 벼슬이 산원(散員)이요, 그 다음 이(李)씨는 시위호군(侍衛護軍) 장연(長衍)의 딸로 아들 봉생(鳳生)을 낳았는데 벼슬이 별장(別將)이며, 맏딸은 진사 김요(金耀)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작고한 기거랑 지제고 허식(許湜)에게 시집갔다.
그 다음 부인 기(奇)씨는 밀직부사의 증직을 받은 연(璉)의 딸로 아들 동명(東明)을 낳았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부산랑(理部散郞)이요, 딸은 낭장 박귀령(朴龜齡)에게 출가했으며, 그 다음에 또 기씨에게 장가들었는데 검교 대호군 정보(鼎輔)의 딸로 작고한 진사 이존중(李存中)의 실내(室內 부인)가 된 딸을 낳았다.
손자에 남자가 9명인데, 효종(孝宗)은 산원(散員)이니 계사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적이 있고, 창종(昌宗)은 산원이요, 사종(嗣宗)은 흥순궁 녹사(興順宮錄事)이며, 선창(宣暢)은 불도를 배웠고, 소종(紹宗)은 을사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산랑이요, 회종(會宗)과 목감직(牧監直)의 흥종(興宗)과 무종(茂宗)ㆍ수종(秀宗)이다. 손녀가 4명이며 외손이 2명이니, 성균생원 허조(許操)와 박술(朴戌)이요, 외손녀가 3명이며 증손자 4명은 아직 모두 어리다.
아, 큰 기개로 위대하고 뛰어난 인재는 세상에 용이하게 나는 것이 아니며, 나와도 때를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도 쓰이지 못하거나, 쓰인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 천명이다. 율정 선생에 대한 의릉(毅陵)의 지우(知遇)는 천 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일인데, 의릉의 승하가 너무나 빨랐다.
금상께서도 깊이 선생을 아시기에, 손수 진서(眞書)로 율정(栗亭)의 두 글자를 쓰시어 내리시니, 그 예우가 또한 극진하였으나 공이 정부에 있은 지 겨우 수개월 만에 치사(致仕)하였고, 집에서 19년의 긴 세월을 한가로이 보냈다. 상소문을 올려 논한 것이 비록 곧고 간절하나, 필경 무슨 보탬을 주었던가. 아, 슬프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당당한 문정이여 / 堂堂文貞
씩씩하게 활보하였네 / 高視闊步
비록 미관말직이지만 / 雖厠末寮
우뚝한 재상의 기상 / 巍然宰輔
의릉히 한 번 보고 / 毅陵一見
진담을 내보였고 / 出示肺腑
조용히 뒷일을 부탁하니 / 溫言托孤
과연 그 포부와 부합했네 / 果叶所負
이미 참군 자리에 시험하고 / 旣試參軍
다시 부윤에 임명하려고 / 欲尹其府
우선 판관에 승진시키니 / 姑陞判官
기특한 지우가 아니더냐 / 可謂奇遇
임금의 말씀을 출납하고 / 出納王言
인물의 전형에 참여하게 하니 / 參與銓注
장차 큰 정사를 총괄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 蓋將納麓
홀연 승하에 비오는 듯한 눈물 / 鼎湖淚雨
해를 붙든 그 충성 / 扶日至忠
먼저는 절름거리나 뒤에는 형통하나니 / 先屯後亨
사람들은 공의 등용을 기대하였고 / 人望公庸
공은 도리어 불평을 품었네 / 公懷不平
그 불평이 무엇이던가 / 不平伊何
나의 간곡한 이 말이 / 我言丁寧
매우 쓴 약이라네 / 如藥瞑眩
그 말을 어찌하여 듣지 않았더란 말인가 / 云胡不聽
금주의 산기슭 / 惟錦之山
울창한 저 숲 속에 / 有鬱其蒼
기운 올라 하늘을 쏘니 / 有氣屬天
이곳이 바로 공의 무덤이네 / 實公幽堂
혹 믿지 못하겠거든 / 厥或不信
새긴 명비를 보라 / 眎此刻章
<끝>
ⓒ한국고전번역원 | 임창재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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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栗亭先生尹文貞公墓誌銘 幷序 - 李穡
栗亭先生旣葬三月。孫紹宗以所撰家狀。求銘其墓。嗚呼。公亡矣。余自燕京奔先子喪。先生先諸公來哭。哭旣畢。執余手欷歔良久乃去。蓋今二十年矣。不敢忘也。而道途之遠也。不獲匍匐往哭。銘其可辭乎。敍曰。公諱澤字仲德。曾大父良庇茂松縣戶長。大父諧正獻大夫國學大司成文翰司學致仕。司錄尙州。民有亂其姝者。時旱甚。正獻與長官爭。竟置極刑。天果雨。歷任刑,憲。剛正自持。慶尙,全羅,楊廣,淮陽。皆所按察。其爲中丞。饘粥不繼。煎豆充飢而已。世號淸白。考守平贈奉翊大夫密直副使。先正獻歿。妣金氏進禮郡夫人。以至元己丑生公。公生三歲就學。旣授輒成誦。正獻每見公有警句。抱之泣曰。興吾門其汝乎。守平爲不死矣。稍長痛自樹立。從姑夫尹狀元宣佐讀書。無不通究。尤長於左氏春秋。常誦范文正公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以謂大丈夫寧可碌碌耶。延祐丁巳。中進士擧。庚申中秀才科寶劒賦第一。人多誦之。調京山府司錄。董耕葺學。勸民追遠。禮俗以興。入錄書籍事。爲校勘爲檢閱。官纔九品。自視宰輔。或以爲侮。公傲然處之不疑。至順壬申。毅陵在燕邸。公單騎上謁。一見器重。因有托孤之語。意在今上也。公拜謝臣且老矣。何能爲。明年上駐駕西京。以檢閱權參軍。供頓有制。民賴以安。上每歎曰賢哉回也。以公貌類西人故云。詔使至。命公讀詔。左右曰。讀詔自有內外製。參軍恐非例。上曰。參軍爲兩製。顧不在吾耶。遂命權應敎賜紫。未幾欲擢爲府尹。以資淺陞判官。或誣公不遜。上曰。尹生忠。必汝罔也。戊寅拜右副代言。掌銓選。上欲官公子護軍。公曰。名器至重。賢勞猶滯。敢私臣子。上愈重之。己卯轉右代言。試士成均。取安元龍等九十九人。多知名士。三月癸未。上寢疾。上復以燕邸所語語公。公跪曰劒無煩聖慮。永陵立。改政圖新。公屛居自頤。明陵立。被選牧羅州。公所至政尙寬恕。仆強植弱。聦陵立。貶光陽監務。初明陵薨。民望歸今上。公倡議拜書都堂。言本國兄弟叔姪相繼之。故少主不堪保釐之狀。辭甚剴切。聦陵㘅之。故有是命。歲辛卯上初政。入密直爲提學。慨然自任以當世之事。上䟽建白不允。乃以開城尹致仕。公年六十有四矣。近臣議追鄕樂。公聞之上䟽曰。世皇已甞却之。今復進恐取譏。又以節用上言。上深納之。築宮南京。公言釋妙精惑仁廟。幾至覆國。厥鑑不遠。矧今四境當備他盜。訓兵養士。猶懼不給。興工勞衆。恐傷本根。上命寫無逸篇賜宰臣。命公講。因陳周公輔成王勤勞曰。願殿下成法成王。能聽周公之訓。嚴恭抑畏。社稷之福。上爲動容。公以眞西山大學衍義,本朝崔中令承老上成廟書。皆進講。時上深味空桑之譚。超然有遠擧之志。公曰。殿下上奉宗廟。下保生靈。柰何欲效匹夫廢絶倫理之事乎。如聽臣言。非孔子之道不可。願加聖意。白岳之役。公極言其弊。因曰。凡事得失。聖意雖灼其然。委之大臣。未卽處分。因仍之際。其害已成。救之莫及。上賜酒。公一飮三巵。神氣自若。前侍中洪彦博嘆曰。不謂尹公戇直至此。吾所不及也。公雖致事。自以先朝顧托。知無不言。或至切直。上亦優容焉。甲辰公年七十六。疾作乞歸錦州。以山水自娛者七年。而憂君之心。未甞食息忘。庚戌八月丙子。前子孫而訓之曰。吾正獻。興寒地。以淸白忠直名一時。吾先君不幸早世。吾夙夜不克繼志是懼。誤爲上知。寵祿過望。年愈八旬。此皆先世潛德。正獻淸白之所遺也。若等其守之毋墜。我且死。葬毋拘忌。用浮屠法毋侈。九月丁酉卒。是夕天大風以雨。旣棺乃止。己亥窆于大夫人之墓側。訃聞上悼甚。下大常謚曰文貞。公之哀榮可謂無缺矣。公旣早孤。不及識先君面。時祭上冢。必哭甚哀。公於方策見述父子之情。未甞不垂涕氣塞不能言。常佩一囊。得異味必盛之。歸獻大夫人。不以非笑少止。尹狀元歿。女孫二人孤無所依。公曰。吾而不恤吾姑夫之孫。吾尙爲人乎。擇士人嫁之。游燕時道見遺金百兩。守以待其主。其主泣謝而去。略無德色。公平生布被弊席。饔飧或缺晏如也。至春秋良晨。必置酒邀客。其任情自適又如此。公凡四娶。文氏進士富之女。生龜生散員。次李氏侍衛護軍長衍之女。生鳳生別將。女適進士金耀。次適故起居郞知製誥許湜。次奇氏贈密直副使璉之女。生東明及第理部散郞。女適郞將朴龜齡。又娶奇氏檢校大護軍鼎輔之女。生故進士李存中室。孫男九人。孝宗散員。癸巳進士。昌宗散員。嗣宗興順宮錄事。宣暢學浮圖。紹宗乙巳科狀元。禮部散郞。會宗,興宗,牧監直。茂宗,秀宗。女四人。外孫二人。許操成均生員,朴戌。女三人。曾孫四人皆幼。嗚呼。磊落奇偉非常之材不世出。出而不遇與遇而不用與用而不久。皆天也。若栗亭先生之遇毅陵之知。可謂千載一時。而毅陵上賓之亟。今上旣深知先生。手寫眞書栗亭二字以賜。其遇極矣。而公在政府才數閱月而致仕。家居者十有九年。抗論雖切。竟亦何補。嗚呼悲夫。銘曰。
堂堂文貞。高視闊步。雖廁末寮。巍然宰輔。毅陵一見。出示肺腑。溫言托孤。果叶所負。旣試參軍。欲尹其府。姑陞判官。可謂奇遇。出納王言。參與銓注。蓋將納麓。鼎湖淚雨。扶日至忠。先屯後亨。人望公庸。公懷不平。不平伊何。我言丁寧。如藥瞑眩。云胡不聽。惟錦之山。有欝其蒼。有氣屬天。實公幽堂。厥或不信。眎此刻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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