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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비고차(甲比古次:강화도 江華島)를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6월14일 ‘장기주유소’에 도착하니 시계는 6시18분을 가리키며, “삼성플러스관광” 김용식 기사님은 벌써 도착하여 차를 워밍업(Warming up) 中이다. 잠시후 오회장님 내외분이 도착하시고, 뒤이어서 포항에 김세정님 내외분, 이걸세님 내외분, 서동재님 내외분, 마지막으로 나종문님 내외분이 도착하여 서서히 이틀동안의 여행길에 오름니다.
이번 여정(旅程)은 “천우회(天友會)”의 ‘서동재님과 나종문님’ 두분의 회갑(回甲)을 기념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며, 1박2일(토,일)간 강화도(江華島)와 석모도(席毛島) 일대의 문화유산(文化遺産)을 답사(踏査) 할 예정이다.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유월의 山川은 짙은 녹색(綠色)으로 물들어져서 온 누리에 향기로 충만(充滿)하고, 차내 분위기는 화기애애(和氣靄靄)하여 훈훈하고 따사로운 인정으로 넘쳐난다. 총무(서동재님) 부인께서 어찌나 맛있는 음식과 여러가지 과일들을 많이 준비 해 오셨는지~ 게다가 오회장님 부인께서는 복분자주(覆盆子酒)며, 또 포항에 김세정님은 월드콘(얼음과자)까지 곁들여 드시니~ 입안이 얼~얼~하여 온몸이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얼마를 달리다 아포(牙浦)에서 다시 “중부내륙고속국도”로 진입하여 ‘문경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차내에서 준비해 온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오늘의 주인공 “두분(서동재, 나종문)”의 회갑(回甲)을 추카해 드림니다!
1983년도에 동문수학을 하면서 만난 청춘의 벗들이 어느새 다 회갑을 지나 초로(初老)의 잔주름과 머리는 희끗~ 희끗~ 반백(半白)이라! 32년의 긴 세월동안 불협화음 없이 이끌어 주신 덕망(德望) 높은 오회장님과 또 알뜰살뜰이도 살림을 살아주신 서총무님께 모두들 ‘기립박수’를 보냄니다!
차는 신나게 달려서 여주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를 타고 신갈분기점, 양재, 서초를 지나 한강변을 따라 김포시로 달림니다. “서울”이라드니~ 사방이 빌딩숲이요! 한강(漢江) 좌 우로는 빈틈이 없슴니다!
보기만 해도 갑~갑~하고 숨이 턱~턱~ 막힙니다! 아름다운 숲속에 도시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빌딩숲 사이로 대자연(大自然)의 숲들이 같혀있는 형국이다! 또 물 위로는 “팔각유리집”이 지어져 있어 그 용도를 모르겠고, “아라뱃길”은 투자만 했을뿐 실익(實益)이 없는 공사였나 보다!
그럭 저럭 여의도(汝矣島)를 지나 행주대교를 벗어나니~ 조금은 시원한 느낌이 들며, 연하여 김포시와 양촌면 일대를 접어드니, 도로변 주위로는 거의 빈곳이 없을 정도로 민가며 작은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2005년 9월에 무박(無泊)으로 마니산(468m) 등산을 왔을 때만해도 넓은들에 누런벼가 황금물결로 넘실대고 있었건만 그 사이 많이도 변했슴니다 그려! 다시 대곶면을 지나 “강화초지대교”를 건너 초지리(草芝里)에 이르니 어찌나 번창했는지 그저 낯설기만 합니다.
첫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돌아드니 초지진(草之鎭)의 성벽(城壁)이 보이고, 그 앞에 아람드리 고송(古松) 두 그루가 예나 지금이나 여여(如如) 하며, 나무의 밑동에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운요호 사건(1875) 등을 거치면서 서양 열강군(列强軍)들이 쏜 총탄에 맞은 자국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덕진진(德津鎭)을 지나 광성보(廣城堡)에 도착하니 시계는 11시 48분을 조금 지나있다.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풀면서 모두들 안해루(按海樓) 앞에서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치고 용두돈대(龍頭墩臺)로 향합니다.
안내문에 “광성보(廣城堡)” 일대는 고려 때 외성이었던 것을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고 효종7년(1656)에 설치했으며, 용두, 오두, 화도 등의 소속돈대는 숙종5년(1679)에 축조되었다. 또 영조21년(1745)에 성을 개축했는데, 이때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 불렀다 한다.
숲길은 한껏 우거져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깔아 놓은 보도블럭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슴니다. 몇걸음을 나아가니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가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쌍충비각(雙忠碑閣)”이 모셔져 있다.
쌍충비(雙忠碑)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1823~1871)장군 외 59명의 순절비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1873년에 건립 하였으며, 다른 1기는 어재연과 그 동생 어재순(1826~1871)의 순절비인데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 왔으며, 1970년 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그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인하여 길 아래에는 7기의 분묘(墳墓)가 모셔져 있는데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며, 당시 어재연 장군 휘하에 있던 59명의 신원(身元)을 알 수가 없어 7기에 나누어 모셨다고 한다. 선채로 예를 드리고 물러 나오니, 포탄이 다 떨어져서 맨주먹으로 싸웠다는 당시의 상황이 참담(慘憺)하게 느껴짐니다.
구~불~ 구~불~ 산줄거리가 바다로 쑥~ 내밀어서 마치 용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두(龍頭)”라 하며, 그 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적을 경계(警戒)하고 또 공수(攻守)를 겸하도록 하였으니~ ‘용두돈대’라!
강폭이 좁아 육지는 바로 손에 닿을 듯하고,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심해 바닥은 거의 드러나서 여기저기 뻘밭과 암석들이 보인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고려 때부터 천연의 요새였던 이곳은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되었다 하며, 1977년 허물어진 성벽을 보수하면서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江華戰蹟地淨化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비문의 전면(前面)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고, 뒷면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다. 주위에서도 경치가 아름답기는 제일이며, 사방을 공격하기에도 또 공격을 받기에도 좋은 위치다.
비문 옆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초라한 포문(砲門) 1기가 전시되어 있어 보는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귓가에는 울부짖는 병사들의 함성이 아련히 들려 오건마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저 웃으며 답사를 즐김니다.
이런저런 얘기들로 꽃을 피우며 다시 바로 이웃해 있는 “손돌목돈대(孫石項墩臺)”를 오르니, 주위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라 강화 일대가 잘 내려다 보인다. 강건너 돌출된 언덕위에는 군인들의 초소(哨所)가 보이고, 그 뒤에 조그마한 “손돌의 묘(墓)”가 보인다.
안내문에 “손돌목”에 전해오는 슬픈 전설이 있는데...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의 덕진진에서 마주 바라보는 좁은 해협에 고려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이곳에 이르러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는데,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뱃길이 막혔다. 이에 의심이 든 왕이 손돌이 무슨 계략을 품은 것이라 여겨 그를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이곳 지형이 원래 그러하며 극구 아니라고 간언(諫言) 하였으나 자기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워 흘러가는데로만 가면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 하고 끝내 처형당했다.
이어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왕은 “한줄기 회오리 바람”에 문득 깨닫고 크게 뉘우쳤으며, 그 후로 덕진진 앞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10월 20일 경이면 바람이 몹시 부는데, 이를 “손돌바람”이라 한다.
멀리서 렌즈를 당겨 “손돌의 묘”를 촬영하고는 다시 주차장으로 되돌아 나옵니다. 시계는 13시 30분을 조금 지나있고, 모두들 시장타 하여 바로 인근의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집” 식당에서 시장끼를 달램니다.
점심후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에 오후 일정의 “전등사”로 달림니다. 84번 지방도를 타고 20여 분을 달려 전등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기념품점, 식당, 차들로 넓은 주차장에 빈틈이 없슴니다!
가파른 언덕길을 10여 분이상 걸어 오르니, 홍예문(虹霓門) 위에 단군의 아들 부루(扶婁) 부소(扶蘇)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잘 복원되어 고색찬란 하며, 또 정족산(鼎足山)에 있다 해서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강화도는 단군과 관련됀 유적이 있으니, 마니산(468m)에 “참성단”이 있어 민족의 자긍심을 한껏 높여주고 있으며, 단군 병인 59년에 설축했다 하는데 ‘사적 제1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문을 들어서니 바로 우측에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말기의 무신인 양헌수(梁憲洙. 1816~1888)는 이항로의 제자로 무예를 익혔으며, 헌종 14년(184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이 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정족산성의 수성장(守城將)이 된 양헌수는 프랑스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 오자 몰래 군대를 이끌고 정족산성에 매복한다. 10월 3일 프랑스 ‘해군대령 올리비에’는 부대원 160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함락시키러 들어왔다가, 매복해 있던 양헌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공을 세우고 마침내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 공로로 양헌수는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기에 승전비(勝戰碑)를 세웠다.
몇걸음을 더 나아가니 거대한 느티나무가 아람드리 거목(巨木)으로 자라 있어 전등사(傳燈寺)의 역사를 짐작케 하며, 그 옆으로 윤장대(輪藏臺)가 있는데~ 본래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며, 이곳의 윤장대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희망하는 소원이 하루속히 성취 되도록 하기 위하여 발원문을 작성하여 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도록 성물(聖物)을 조성하였다.
여러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2층에 “傳燈寺”라는 편액이 달려있고, 문을 통과하여 중정(中庭)에서 바라보니 맞은편에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178호)이 정면3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다.
법당에 들어 간단한 예를 드리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정족산(鼎足山)이라드니~ 산세가 마치 가마쏱을 걸어놓은 것같으며, 청룡은 비교적 허(虛)한 편이고 백호(白虎)는 웅장하게 잘 감아서 지근한 거리에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하고 있도다! 또 동남방의 허한 기운을 비보(裨補)하기 위해서 많은 숲을 가꾸었으며, 삼랑성(三郞城)도 초기에는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차츰 차츰 석성(石城)으로 바뀌어져서 청룡(靑龍)의 허(虛)함을 튼실하게 비보 해 주고 있슴니다.
단청(丹靑)은 바래져서 고풍(古風)스럽고 추녀를 받치고 있는 나녀(裸女)는 예나 지금이나 여여(如如) 합니다 그려! 나녀상(裸女像)에는 애절한 전설이 전해 오는데, 광해군 6년(1614) 12월에 전등사에 큰화재가 있어 대웅전을 다시 짓게 되었다.
이때 도편수가 아랫마을 주모(酒母)와 눈이 맞아 공사가 끝나갈 무렵에 주모는 매월 벌어다 준 돈을 가지고 줄행랑을 놓았는데... 하여 도편수는 앙갚음과 주모의 참회를 바라는 맘으로 발가벗은 여인상을 만들어 무거운 추녀를 받치고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고소(苦笑)를 지으면서 회원님들과 함께 둘러 봅니다.
대웅전 기둥에는 4개의 주련(柱聯)이 달렸는데, 간단히 옮겨 봅니다.
불신보변시방중(佛身普遍十方中)(부처님은 온세상에 두루 계시며)
월인천강일체동(月印千江一切同)(천개의 강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도다)
사지원명제성사(四智圓明諸聖士)(네 지혜에 능히 밝으신 성스러운 분들)
분림법회이군생(賁臨法會利群生)(법회에 크게 임해서 중생들 이롭게 하시네)
맞은편 대조루(對潮樓)에 오르니 서해바다의 조수가 한눈에 들어 온다는데 나무숲들이 많이도 우거져서 볼 수 없슴니다. 아쉬운 맘으로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누상(樓上)에 올라 읊은 시가 있어 적어 봅니다.
나막신 신고 산에 오르니 흥은 절로 맑고
전등사 노승은 나의 행차 인도하네
창 밖의 먼산은 하늘 끝에 벌였고
누(樓) 밑에 부는 바람 물결치고 일어나네
~ 이하 생략~
대조루(지방문화재자료 제13호)는 영조의 시주로 대웅전과 함께 1748년에 중수 했으나, 헌종 7년(1841)에 다시 지었다. 그 후 두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누각(樓閣) 내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보각(譜閣)의 현판인 선원보각, 장사각(藏史閣), 추향당 등의 편액이 걸려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며, 당시의 절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고 전한다. 경내 유물로는 1880년에 조성한 대웅전의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104매, 중국 북송 때 주조한 범종, 고려시대 유물 청동물동이, 대웅전에 불을 밝혔던 옥등(玉燈)이 있다.
더불어 전등사는 고려 충열왕(1274~1308)의 비 ‘정화궁주’의 원찰이었다고 하며, 경내에는 장사각(藏史閣)터, 선원보각터, 군창터 등이 남아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으며, 전시에 특수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증된다. 또 일제 강점기인 1912년엔 전국6개군의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이었다.(전등사 자료 참조)
대웅전 옆에는 “보물 제1786호 명부전 지장보살 3존상 및 10왕상, 장군, 녹사, 판관상31구 복장불사”가 진행중이며, 바로 이웃하여 약사전(藥師殿:보물 제179호)이 정면3칸, 측면2칸에 대웅전의 건축양식과 많이도 닮아있다.
그 옆으로 녹쓴 대종이 종각안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데, 이 동종(銅鐘:보물 제393호)은 중국 북송(北宋) 철종 소성(紹聖) 4년(1097)에 제작한 하남성 백암산(百巖山) 숭명사(崇明寺)의 종이라고 씌여있다. 또 이 범종(梵鐘)은 일제 말기에 군수물자 징발에 강제로 공출당했다가 해방후 전등사 주지스님이 여러 곳을 찾아 다니던 중 부천 ‘군기창’에서 누군가의 제보로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산령각(山靈閣), 새로 조성됀 범종각(梵鐘閣), 요사채, 선방(禪房), 종무소(宗務所) 등 많은 전각들이 산새의 모양따라 빙 둘러 배치되어있다. 일정상 다 둘러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남문인 종해루(宗海樓) 방향으로 걸어나오니, 수령 600여 년이된 은행나무 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휴식을 하고 있다.
그 옆으로 한적한 언덕 위에는 부도 네기가 모셔져있다. 1,7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古刹)에 부도의 수가 어찌 이리 적은지 짐작키 어려우며, 선채로 예를 드리고 허허로운 맘으로 남문을 걸어 나옵니다.
84번 지방도를 타고 20여 분을 달려서 이규보 묘소에 도착하니, 주위에 인가(人家)는 없으며 야트막한 야산에 좌우로 사당과 재실을 지어 향사를 드리고 있슴니다. 그 뒤로 넓은 당판에 봉분이 들어 서 있으며, 백호는 허(虛)하나 청룡은 비교적 튼실하여 지근한 거리에 일부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중조산(中祖山)은 덕정산(325m), 또는 진강산(443m)에서 구~불~ 구~불~ 이어져 내려와서 입수(入首)는 비교적 넓고 완만하며, 조산(朝山)은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그야말로 중중포리(重重袍裡)다. 다만 청룡과 외백호(外白虎)의 사이 허(虛)한 부분에 비보림(裨補林)으로 드물게 소나무 몇그루를 심어놓았다.
봉분은 새로 조성하면서 조선시대의 묘제를 따라 원형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앞에 상석(床石)이 놓이고, 가운데 사각석등이 하나, 좌우에 망두석 2기, 또 양쪽에 문, 무인 석상이 소박하게 모셔져있다.
안내문에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명종 19년(1191) 진사시에 합격한 뒤 당시 무신정권(최충헌)에 적극 협조한 문인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라는 높은 벼슬에 까지 이르렀다.
연하여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저술하여 고구려인의 큰 포부와 활동을 읊어 민족의식을 크게 떨쳤으며, 또 몽고군의 침입을 받게되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대장경(大藏經)”을 조판할 때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을 지었다.
문집으로는 이 밖에도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등 쉰다섯권이다. 또 그의 묘(墓)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살아 100년이 어려운데 죽어 청사(靑史)에 길이 빛남니다!
다시 30여 분을 달려 ‘외포리선착장’에 도착하여 모두들 숙소를 정하고 하루의 긴 여정(旅程)을 풉니다. 모두들 부부동반 인데~ 부득이 한 사정(잔치)으로 내자(內子)가 참석치 못하여 송구하고 허전하여 몇차례 안부를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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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님들! 잘 계시죠?
윗글은 지난달 6월 14, 15일 이틀간 "천우회"에서
회원 중 두사람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부부동반으로 강화도 답사한 글을 올렸슴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참고가 될까 해서 올렸사오니
이점 양지하기길 바라면서~
모든님들!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부부동반 행복하셨겠습니다~^^
구슬님이 다녀 가셨군요~
뜻 깊은 여행이었슴니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