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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대한제국의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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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 고종 광무 태황제 |
최후 통치자 | 순종 융희 효황제 |
현재 수장 | 황사손 이원 |
대한제국의 황실(大韓帝國皇室)은 조선 왕실의 후계로 대한제국의 성립 때부터 한일 병합 조약으로 멸망할 때까지 실질적인 황실의 주인이었다. 일제 강점기가 종료된 후 대한제국은 복원되지 않았지만, 그 후손들은 대한민국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을 통해 황족의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 상징적이긴 하나 현재까지 순종 황제 이후 5대째 대한제국 황실 수장이 내려오고 있다. 2005년 고종 황제의 손자 이구가 사망하자, 종약원은 의친왕의 손자 이원을 황태손 이구의 양아들로 입적하여 황사손(皇嗣孫)의 지위로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을 계승하게 하였다.[1]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가(李王家)라고 하였는데, 이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의 일개 가문으로 격하하여 부르는 명칭이었다. 때때로 조선 왕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칭호는 대한제국 황실 및 실제 소유했던 상등의 호칭을 기준으로 하며, 한일 병합 이전의 시점에 대해서는 대한제국 황제 및 황족으로서의 당시 칭호로 하며, 필요할 경우 괄호 안에 묘호나 시호, 사호를 병기한다.
1910년의 소위 한일 병합 조약의 제3조에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 및 후예를 각기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조한다’라고 명문화되어 있어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황제였을 때에 준하는 칭호 등을 규정하게 되어 있었다(제4조는 그 외의 한국 황족에 관한 유사 규정).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대한제국 황족의 신분을 일본 왕족에 준하는 왕공족으로 규정하였다. 이 왕공족 신분의 법률적 근거는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소멸했으며,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를 확인했다.
(역대 황실 수장은 굵은 글씨로 처리)
아래와 같이 대한제국 황제 및 황실수장의 신분을 받은 자에 대한 항목으로 내용 가운데에서 가족에 대해 기술하도록 한다.
조선왕조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광무황제(고종).
고종 광무 태황제 이희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는 그의 만년인 1912년에 측실 양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위 한일 병합 뒤 1925년에 도쿄의 학습원에 유학하여 1930년 일본 옛 쓰시마번 번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하여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덕혜옹주는 결혼 전부터 정신 이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결혼후 더욱 악화되었다. 1955년 소(宗)씨 가문으로부터 이연당하고 1962년 귀국했다. 소 마사에는 와세다대학(이방자의 저서에서는 메이지대학이라고 되어있고 그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잘못된 정보이다)을 졸업하고 일본인과 결혼했으나 그 후 실종되어 행방불명되었다.
광무황제와 황후 민씨(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남으로 187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대한제국 성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일으켜 광무황제가 퇴위당한 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조선왕조 27대 국왕) 융희황제(순종)로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혼인은 하였으나 자손이 없다. 한일 병합 늑약의 조인과 함께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실질적으로 잃고 그 지위에 상당하는 명시적 이왕(李王)의 칭호를 일왕인 히로히토로부터 받았다.
광무황제와 황귀비 엄씨(순헌황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영친왕 은(垠)은 1907년 융희효황제 즉위와 함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으나 어린나이에 일본에 끌려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위 한일 병합과 함께 명시적 왕공족 이왕세자에 봉해졌다. 1917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제29기), 이듬해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노 모리마사 왕의 제1왕녀인 마사코(방자)와 결혼하였다. 융희황제 척이 붕어한 1926년에는 황실수장의 자리와 소위 이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왕 부부는 도쿄의 아카사카 저택(현재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에서 생활했다. 황태자 은은 실질적 일본 군인의 신분으로 우쓰노미야 연대장 등을 거쳐 종전시에는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패전 후 황태자 부부는 1947년 신분을 잃고 일본 국적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들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귀국을 한 것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난 다음인 1963년의 일이었다. 두사람 사이에는 장남 이진(생후 8개월 만에 급사), 차남 이구가 있다. 사후 의민태자(懿愍太子) 추존.
황태자 은의 차남 이구(李玖)는 1931년 12월 29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의민태자가 창덕궁 이왕의 작위를 받은 후 창덕궁 이왕세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전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배우고, 1958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다. 미국에 귀화하였다. 1963년 한국에 귀국하여 사업가로 활동하였으나 경영하던 신한항공이 1979년에 도산하였고 1982년에는 부인 줄리아와도 이혼하였다. 이혼 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005년 7월 16일, 심장마비로 자신이 태어난 곳인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75세. 사후 회은태손(懷隱太孫) 추존.
광무황제에게는 적남인 융희황제 외에 귀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의친왕이 있었다. 의친왕은 1910년 소위 한일 병합 이후 왕공족 제도 시행으로 ‘이강(李堈) 공’으로 불리게 된다. 항일독립운동에도 참가하였다.[출처 필요]
의친왕 강에게는 공식적으로는 2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첩으로부터 얻은 자식들을 포함해 13남 9녀를 두었다. 회은태손 사후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후계자로 전주이씨 대종약원에 의해 지명된 이원(李源)은 의친왕 강의 아홉째 아들 이갑(李鉀)의 장남이다.
이건(李鍵)은 의친왕 이강의 장남으로 고종의 장손자이다. 의친왕이 1930년에 강제 은거를 당하자 소위 공위를 세습 받아 ‘이건공 전하’로 불렸다.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대좌에 이르렀다. 1931년에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의 외사촌 마쓰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佳子)와 결혼하였으며, 1947년에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로 개명하고 일본에 귀화하였다.
이우(李鍝)는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1917년에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소위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로 불렸다. 사망 이후에 사시인 흥영군에 추봉되었다. 소위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8월 7일에 사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흥원에 안장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으로 왕공족에 편입된 인원은 총 24명이다.
대한제국의 황실(大韓帝國─ 皇室)은 대한제국(大韓帝國) 초대 황제인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의 직계손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의 이왕가를 포함하여 당주의 대수를 계산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효황제(純宗 孝皇帝)가 1910년 대한제국 황제직에서 퇴위, 일제 강점기부터는 일본 왕공족신분 이왕으로 재직하다 1926년 후사없이 사망하여 황제의 대는 끊겼으나, 전주 이씨 가문에 의해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는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순종 효황제 사망 이후 그의 동생이자 영친왕으로 널리 알려진 의민태자(懿愍太子, 영왕) 이은, 의민태자 이은의 아들인 창덕궁 이왕세자 구[2],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손자인 황사손 이원(李源)[3] 이 전주 이씨 가문내에서 추대되어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 임명된 바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06년 대한제국 황족회라는 단체가 설립되 고종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둘째 딸인 이해원을 문화대한제국 여제(女皇)로 추대하고 대한제국의 황실을 복원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다만 이 단체에 참여 황족이 불명확한 부분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인정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전주 이씨 가문내에서 정통성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