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아파트에서 칠팔 년을 함께 지내던 후배가 진주혁신도시로 이사하더니 개천예술제를 보러오라는 연락을 해왔다. 그는 크고 작은 행사에 빠지지 않고 쏘다니는 날 보고 초대한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금년 행사부터 입장료를 받는다고 매스컴이 떠들어대기에 내심으론 무언가 행사의 품격이 달라지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가졌던 터였다. 한때 진주의 남강유등축제가 서울의 청계천과 원조논쟁을 벌이는 것을 접하면서 당혹스럽던 때가 있었다. 비록 한양이 조선의 수도이긴 했지만 청계천의 유등은 남강의 그것과 역사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 어른들이 일러줘서 '진주강가'라는 말만 들었지 정작 진주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몰랐다. 그랬다가 젊은 날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다보니 업무 차 진주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길게 남아있질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주는 다들 거창 함양 다음으로 교통이 불편한 오지로 치고 있어서 근무를 기피하던 곳이었다. 그 무렵 어느 야당 정치꾼은 서울에서 이곳 교도소까지 끌려와서 수감된 적도 있었다. 술수와 모반에 능한 자였기에 요주의 인물로 딱지를 붙여 하루 만에 면회를 끝내고 돌아갈 수 없는 곳에다 귀양 보내듯 가두었다고들 했다.
내 기억 속에 그렇게 각인되었던 진주였는데 근년 들어 그곳 가을철 행사를 두어 차례 찾게 되면서 새삼스레 도시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진주 사람들은 유난스러울 만큼 자존심이 세면서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하니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예로부터 남도의 풍류는 진주를 으뜸으로 꼽았다. '북평양, 남진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는 멋과 맛, 흥이 살아있는 고장으로 일찍이 알려져 있었다. 진주를 영호남 제일의 도시로 만든 것은 바로 강이다. 덕유산과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진양호에 모여 다시 진주 시내를 유유히 가로 지르는 남강이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진주 전역에 고르게 펼쳐진 들판에서는 차고 넘칠 정도로 작물이 여물고 외곽을 제외하곤 높다란 산으로 가로막힌 지역이 없어 기름진 땅이 지천에 널렸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나라에 바치는 공물 가운데 진주가 영남의 반을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일도 먹고사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으니 자연스레 먹고 놀고 즐기는 풍류에 일가를 이뤘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물질적인 풍요는 인물도 살찌웠다. '대한민국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재의 절반은 진주에서 난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경남 최초의 교육기관인 진주향교를 시작으로 영남권 최초의 교육대학 등 경남교육의 시발점은 진주였다. 마침 개천절이었고 이번이 세 번째 참가한 행사였다. 공북문 앞 광장에서 행사에 몰려든 인파를 마주하곤 놀랐다. 단체로 찾았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개인적으로 돌면서도 관람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서 좋았다. 같은 장소를 앞에서 돌고 다시 뒤에서 훑다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조형물이 신기루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각도가 바뀐 만큼 그 모양도 달라 보이는 것이 등장하기도 한다. 몇 해 전과 비교해서 행사의 규모만 달라진 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 눈에 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홍보를 했기에 대도시 행사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외국인 관람객들이 많아서 또 한 번 놀랐다. 개천예술제의 무대는 진주성이다. 진주 관광의 시작점도 이곳이다. 진주교에 서면 왼쪽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촉석루가 나타난다. 진주성은 강줄기로 둘러싸여 왜적들의 침입이 쉽지 않아 여러 차례 적군의 침입을 무산시킨 역사의 현장이다. 진주목사 김시민이 성을 포위한 2만여 왜군에게 고작 3800의 군사로 맞섰던 진주성 싸움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힌다. 진주성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바로 개천예술제 행사가 열리는 가을철이다.
진주성 안에서 꼭 찾아볼 곳은 국립진주박물관이다. 국내 현대건축 1세대 건축가인 김수근이 설계한 박물관은 탑을 층층이 쌓듯 중첩된 지붕형태가 독특한 건축미를 뽐낸다. 거기에다 내부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과 진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3D 입체영상관을 갖추고 있다. 성 안의 남강 변 촉석루는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도 꼽힌다. 날카로운 절벽 위에 자리 잡은 2층 형태의 누각이 크고 우람하다. 촉석루는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 있어 시야를 가리는 게 없다.
날아갈 듯 펼쳐진 팔작지붕 밑에 2단으로 덧댄 겹처마가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한다. 누마루에 오르면 비단을 풀어놓은 듯 길고 부드럽게 흐르는 남강과 진주교를 비롯하여 진주 시내가 훤히 펼쳐진다. 옛 사람들은 여기서 향시를 열었고 전란 때는 전장을 지휘하는 본부로 사용했다. 그리고 진주를 풍류 도시로 이끈 교방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곳도 이곳 촉석루였다. 이곳에서 갈무리한 사진을 당일 밤 인터넷카페에 게시하자 24시간도 안 되어 1000명이 넘는 기록적인 조회 수를 보였다. 그만큼 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아닐 수 없겠다.
금년 65회째를 맞은 개천예술제를 살피다보니 한국동란이 터진 해에 시작된 행사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주가 후방지역이긴 하지만 전란 중에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이러한 문화예술행사를 새로 시작할 수 있었던 그 추진력이 진주 사람들의 저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유등 띄우기 행사는 앞서 말한 진주대첩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때 열흘간이나 이어져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가운데 진주성 수성군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남강에 유등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전지하는 군사전술로, 다른 한편으론 성 밖의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성 안 잔디밭을 거의 다 차지한 조형물은 다채롭고 작품성이 돋보인다. 역시 그 하이라이트는 진주대첩 장면이 될 것 같다. 병사들의 규모와 전투장비도 그러하고 당시의 무기와 전투복도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는데 모자람이 없다. 조형물은 우물가 빨래터나 초가처럼 조상들의 의식주 생활상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관가에서 죄 지은 사람을 잡아다가 주리를 트는 장면도 나오는데 젊은이들은 깔깔대며 그 조형물에 매달려 사진을 찍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이 정서적으로 가까이 했던 거북이나 학 그리고 사슴과 같은 동물들도 전시되고 옛 어린이들의 놀이문화도 만날 수 있다.
재기차기, 팽이 돌리기, 말뚝 박기나 굴렁쇠 또는 고무줄놀이까지 다양하다. 외국인 젊은이들은 그런 조형물에 흥미를 느껴 사진을 찍으면서도 어떻게 승부를 가리는지가 아리송한 모양이다. 전통 유교문화의 풍속을 보여주는 장례식과 제사, 혼인과 출산장면도 리얼하게 보여준다. 훈장이 삼강오륜을 가르치는 분위기는 밤이 되자 야학서당처럼 느껴졌다. 해가 저물면서 일제히 화려한 모습으로 바뀐 것은 조형물 하나하나 내부에다 조명을 설치한 때문이다. 조명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유등 행사장을 건너는 부교가 작고 허술하여 아찔한 순간까지 연출했다.
대형 참사는 늘 순간의 방심이 불러온다는 걸 행사주관 현장사무소에 알렸고 그들도 긴장하는 눈치였지만 이렇게 구름관객이 몰려들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늘어선 줄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도 강을 건너지 못하자 다혈질 관람객들은 입장료 환불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런 소란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가을밤은 서서히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촉석문을 나서던 순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금년 가을이 나에게 안겨준 최고의 선물은 지금 바로 눈앞의 진주성과 남강이었음을.
첫댓글 가을축제 행복한 나들이~
보기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