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전이었던가, 공주에서 짬뽕 맛이 가장 좋다는,
어느 언덕바지 중국집이다. 운동권 빵잡이 출신 정 선생네 딸은 다섯 살이고 내 아들 강등현은 한 살 많은 여섯 살이다. 그니네 딸이 요정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메뉴판을 펼치더니.
“우동.”
또렷한 발음으로 글씨를 짚어내는 것이다. 그 아래로 탕수육과 팔보채까지 좔좔 훑어내는데, 한 살 많은 까막눈 내 아들은 입술만 헤-하고 벌리며 화사하게 웃고만 있다.
‘글씨는 몰라도 좋다. 씩씩하게만 자라다오.’
나 혼자만의 독백 다짐이 실제로 진심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렀고 그 여섯 살 까막눈 소년이.
완죠니 열공파 수험생 청년으로 변신한 낭랑 18세 즈음이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자습으로 강행군을 때리던 그 지방 고교 기숙사에도 5시에서 7시까지 저녁 시간을 주었으니 유일하게 넉넉한 인터벌이다. 어느 겨울날 면회 직전이었던가, 그나마 유리창 바깥에서 바라본 고딩들의 급식 대열을 배경으로 내 아들 표정이 얼핏 낄낄대는 질풍노도처럼 보여서 편안했던가. 식사를 마쳤으니 1시간 20분 남았는데.
“집에 가서 40분만 자고 싶다.”
신관동 아파트까지 왕복 40분 주행거리를 빼면 반을 잘라 딱 40분이 남으니 재빨리 수면을 보충하겠다는 전략이다. 아내가 숨소리도 죽이며 운전대 시동을 걸다가 신호등 앞에 멈췄는데.
“다시 기숙사로 데려다주세요.”
그냥 기숙사에 돌아가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다. 촌음에 초조하던 수험생 풍경이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에 삼삼하다. 대학 때는 한술 더 떠.
24세 대학 5학년 때 즈음에는.
시험 주기마다 하루에 두 시간씩만 잤다니 믿거나말거나이다. 새벽 일곱 시 기상을 하면 ‘김밥천국’에 전화를 해서 주문한 김밥과 우유 하나 들고 도서관에서 한 입 먹고 책을 보고 또 먹고 보면서 시험과목과 씨름했다든가, 어쨌다든가.
날마다 도서관에 처박혔고 동트는 신새벽에 귀가를 하다가 어느 날 딱 하루는 시험 준비가 일찍 끝나 여명의 4시 20분에 귀가를 하다 칠흑같은 장벽을 보며.
‘캄캄할 때 집에 가는 게 너무 좋구나.’
그런 20대 중반을 보냈단다. 그리고 세월이 또 빛의 속도로 흘러 10년이 지나.
34세 12월,
그도 어느새 웰빙과 휠링을 중시하는 중년의 몸으로 넘어가는 중이니 상전벽해이다. 우리들의 젊은 날처럼.
‘힘들게 살아야지,’
어금니 갈아마시며 시국과 맞서던 고난의 세월이 아닌 것 같다. 식도락을 즐겨 맛집을 찾으며 가끔은 비행기 타고 외국도 다닌다. 겨울맞이로 파머 머리를 고쳐 생머리를 만들자 더 조신하게 보이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