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몸도 마음도 좀 쉬고싶다는 신호를 내게 보내주었으나 아직은이라며 버티고 다녔다.
결국 과로와 심한 스트레스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쉴만한 곳을 찾았다.
평소에도 찜질방을 즐겨 다녔지만, 담양 허브찜질방이 좋다고 하여 가보기로 했다.
담양의 자랑인 대나무와 양쪽 길가에 시원하게 서있는 메타세쿼이어 가로수 길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달리다보니 예전과는 달리 '화려한 휴가' 촬영지라는 현수막이 눈에 뜨였다. 예나 지금이나 담양은 영화촬영지로 자주 나오는 곳이지만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제목이어서 호감이 갔다. 나도 화려한 휴식을 찾아 이곳까지 왔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허브찜질방을 찾아 헤매는 대신 눈에 뜨이는 대나무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죽녹(竹綠)찜질방으로 들어갔다. 30도가 웃도는 한낮이다 보니 탕 안은 매우 한가하였다. 유리창 너머 저온실에는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저온실은 여인들의 수다로 시끄러울 터이지만 고온실은 아무도 없으니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한 명씩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곳의 터줏대감 격인 나이 지긋한 여인이 육중한 몸매를 과시하듯 들어왔다. 여인은 자리에 앉자 커다란 우유팩에서 얼음을 꺼내 매실액을 넣더니 스텐양푼 속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만들었다. 그러더니 둘러앉은 여인들과 낯선 내게도 얼음이 동동 떠있는시원한 매실차를 한 잔씩 권하였다.
한참 땀이 비 오듯이 흐르는 중이라 얼음이 담긴 한 잔의 매실차는 최고의 맛이었다. 아주 맛이 좋다는 인사말에 또 한 잔이 주어졌다. 참 인심이 좋았다. 매실은 사람의 몸에 좋다고 오래 전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송된 뒤 많은 사람들이 매실을 즐긴다. 여인도 드라마를 본 뒤 집 부근에 매실나무를 심어 지금은 매년 대량의 매실을 따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매실 원액과 매실주(梅實酒) 등 다양한 매실로 제품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었다. 나도 작년 추석에 순창 적성에 사는 후배가 순창토속식품이라며 보내준 매실 장아찌를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서 맞장구를 치고 찜질방으로 올라갔다.
들어가는 곳곳마다 숯으로 변한 대나무가 커다란 대바구니에 가득히 들어 있었다. 뜨거운 방에서 땀을 흘리며 찜질을 즐겼다. 어둠이 내려앉는 담양의 낯선 거리에 서니 시원한 밤바람이 가벼워진 몸과 마음을 더욱 상쾌하게 해주었다. 갑갑한 병원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찜질을 즐긴 뒤 돌아오는 기분은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오거리에서 지인과 만난 뒤 혼자 거리를 걸었다. 영화의 거리에는 곳곳마다 '화려한 휴가 상영 중'이라는 포스터가 낯익은 배우들의 모습과 함께 붙어 있었다.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표를 사서 들어갔다. 대형 스크린에는 어제 보았던 담양의 메타세쿼이어 가로수 사이로 남자 주인공이 택시를 운전하며 창문을 활짝 열고 등장하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시원해 보이던지, 어제 느낀 생동감이 또다시 전해왔다.
'화려한 휴가'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었다. 분노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고 있는 순간순간마다 코믹한 조연들이 얼마나 웃기는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고 나오는 설움과 마음을 달래주는 웃음으로 변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극장 안의 가득한 인파는 어느 곳에서도 큰소리로 웃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지난날 광주의 아픔을 보았고 느꼈기 때문이려니 싶다. 영화는 끝나고 조명은 밝혀졌지만 누구하나 자리에서 선뜻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이지만 쉽게 자동차에 오를 수가 없어 한참을 걸었다. 몸이 아프다고 담양까지 찜질방을 찾아 나선 나는, 극장 앞을 지나치다 어제 보았던 담양의 메타세쿼이어 가로수 앞의 현수막이 생각나서 무작정 표를 내밀고 영화를 감상한 것이다. 해외여행이나 산과 바다로 휴가를 떠난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그 동안 쌓였던 내 안의 노폐물들이 땀과 눈물, 콧물 그리고 웃음까지 다 배출되었으니 이거야말로 화려한 휴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07.8.)
첫댓글 몸과 마음의 건강지수는 하던 일을 멈추었을 때 자신의 건강 상태와 의지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물론 열정이 있어야 삶을 뜨겁게 살 수 있지만, 열정이 지나치면 신체의 리듬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임의 모습에서 깨닫는다. 이제 화려한 휴식을 맛보세요.
ㅎㅎㅎ 알았습니다. 선배님이야 말로 아픈팔로 무리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영화를 욕하고 어떤 사람은 화려한 휴가를 좋게 보더군요. 전자는 가벼움에 대한 비판이고 후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는<30대도 잘 모르거든요> 것에 대한 긍정이지요. 개인적으론 씁쓸할 것 같아 안봤지만 메타구경은 하셨다니 좋구요. 음..관방천에서 국수가 더 나은디..그리고 소수만 아는 개울..한 번 가면 다슬기 일주일치 잡아와요. 담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
소수만 아는 개울에 가고싶네요. 국수파는 그 곳이 관방천이군요. 몇 년 전 담양을 지나칠때 그곳에 들려 평상에 앉아 국수먹고 삶은 계란도 먹었지만, 천변에 가로수가 더욱 좋아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이번에는 몸이 아프니 마음에 여유가 없었네요. 다음에는 꼭 가볼 심사였답니다.
휴식을 찾아 담양지역의 아름다움과 그 곳의 푸짐한 인심을 맛 보고 유쾌하게 돌아왔다니 그 보다 더 좋은 여행이 어디 있겠습니까....더구나 '화려한 휴가'로 더욱 좋았다고 하니 참 잘 하셨습니다. 더욱 건강하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비를 좋아하지만 농작물에 피해가 심하니 걱정입니다. 내리는 비를 멈출 수 있게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선생님 글 읽고 싶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