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꿈을 이루셨나요?"
(조경자 마리 가르멜 수녀)
어릴 적 내 꿈은 정말 소박했다. 아주 깊은 산골로 시집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었다. “그게 꿈이야 할 수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게 좋게 느껴졌다. 어쩌면 부모님이 섬에 사시면서 평생 농사짓는 모습이 내 삶의 좋은 모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장독대에 스케치북을 기대어 놓고 주변 풍경을 그리곤했다. 여름 한낮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저녁 어스름이 숲에 드리울 때면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하는 붓질이 마치 시간을 그리는 것 같아서 아주 깊은 숨을 쉬며 그림을 그렸다. 그 순간에는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새 소리나 풀벌레 소리도 모깃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진공 상태 같았다.
초등학교 2학년 방학 숙제로 처음 파도를 그렸다 매일 보는 파도이니 익숙한 파도를 그릴 만도 한데, 나도 모르게 물거품을 표현해놓고는 바다는 보는 것처럼 행복했었다. 그 파도를 시작으로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5학년 때 아버지가 너무 아프셔서 병원에 가셨지만,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고 판단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늦둥이로 태어나 늘 연세 드신 부모님을 모습을 보며 자라온 나로서는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았다. 그때 공소 회장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사순 시기에 십자가의 길을 40일 동안 바치면 하느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신대.” 누가 들으면 기복 신앙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이 희망의 끈을 꼭 잡고 싶었다. 마침 사순시기였기에 아무도 없는 시간을 틈타 공소로 갔다. 밤 8시. 기도하러 산길을 오르는데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길은 어린 내게 너무 무서웠다. 그렇지만 나는 공소 안으로 뛰어 들어가 1처부터 14처까지 무릎을 꿇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주님!” 하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어느 날 누워 계신 아버지 곁에서 배를 깔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정 사진은 울 애기가 그려 줘” 이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면서도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얼굴이 아니라 풍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나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단짝 친구가 내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사순 시기가 끝나갈 무렵, 아버지가 병상에서 일어나셨다. 병원에서도 놀랐고, 우리 가족과 마을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울 애기가 기도해 줘서 나왔어.” 나는 곧바로 공소로 뛰어 올라가 엉엉 울었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주님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하고 말했다.
이제 나는 영정 사진을 그리지 않아도 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취미가 생겼다. 언젠가 어떤 노 신부님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신부님은 당신 초상화를 보시며 나에게 “부모님이 화가신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는 논의 그림을 그리시고 어머니는 밭에 그림을 그리세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막힌 대답이다.
나는 어릴 적 꿈을 모두 이루었다. 산골로 시집가는 것과 화가가 되는 것. 나는 가끔 복음서에 예수님과 만나는 이미지를, 그리고 매일 밭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안다. 철부지 어린 내 기도를 들어 주신 주님은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그림 그리며 사는 걸 꿈꾸고 계셨음을.
도서,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복사함
첫댓글 지성 감천.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을 감동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