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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상의 길 위에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홍성태
요즘 우리가 나누는 큐티의 본문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이번 주일 나눌 부분은 고린도전서 6장부터 8장까지인데
이 글을 먼저 읽어보면 큐티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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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의 기원
1. 고린도
바울은 주후 50년 내지 52년경에 아덴으로부터 고린도에 도착하였다.(행 18:1-8) 그가 그 도시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을 때는 그는 약하고 두렵고 떨렸다.(고전 2:3) 디모데와 실라는 마게도니아에 남아 있다가 조금 후에 고린도에 왔기 때문에(행 18:5) 처음에는 바울 혼자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 후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살전 3:6) 실라는 아마 빌립보로부터 선물을 가지고 와서(고후 11:9) 바울은 기쁨으로 복음만 전할 수 있었다. 바울의 전도전략 가운데 하나는 그가 대도시를 찾아 복음으로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제 바울은 이 희랍의 고도(古都)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방문했던 고린도는 본래의 고린도가 아니었다. 희랍의 광채요 장식이라 불리우던 옛 고린도는 로마의 루시우스 머미우스에 의해 파괴되었고(주전 166년) 그 후 주전 46년에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도시 고린도였다.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지로 총독 거주지이자 아가야 지방 원로원의 수 도로서, 양면에 바다를 접한 곳에 위치해서 동쪽과 서쪽 항구를 갖고 있어 서 동서간 자연적인 무역의 중심지가 된 상업 도시였다.
그리고 북 그리스 본토와 남 펠레폰네시스 반도 사이의 주요 시장이었고 수공업이 번 성하였다. 주민으로는 로마인, 그리스인, 동방인, 유대인 등이 섞여 있었고, 문화적 종교적으로는 혼합주의가 성행하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들 외에 이시스와 세라피스 그리고 소아시아 신들의 어머니들인 성소들이 있었다. 또한 고린도는 그리스 철학의 심지는 아니었으나 디오게네스의 무덤이 있다는 것과 함께 견유주의자들의 철학자였음을 고려한다면 통속철학이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지방엔 당시 여러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종교적 혼합주의가 생겼다. 그래서 낮은 윤리생활과 무너진 윤리기준은 기존 종교를 퇴폐케 했으며 오히려 종교가 부도덕을 권장하는 자리에까지 나갔다. 바울이 고린도 지방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고린 도인들의 도덕성에 대해 그 도시명에 붙여진 풍자적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고린도 창부). (고린도 난봉꾼), (고린도 탕부)와 같은 말들이 있어, 당시 "고린도인이 되어라"는 말은 창녀(부)가 되라는 욕설의 은어였다고 한다. 이런 곳이 고린도 지방이었고, 이러한 부도덕한 면이 교회에까지 침투되게 되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부패한 고린도지방의 교회에 안타까움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편지를 쓴 것이다.
2. 고린도 교회의 기원
고린도 교회는 최초 바울의 회당 전도를 통하여 설립되었다.(행 18:1-11) 교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지방으로부터 유입되어 온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삶과 행위에 대한 규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처음 서신에서 바울이 강하게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성과 행위에 대 한 문제는 놀랄 것이 없고, 믿지 않는 자들과의 교제에 대한 강한 경고도 그러하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 왔고 그는 여기에서 A.D 49년 글라우디우스(Claudius) 칙령에 따라 로마로 부터 추방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대인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곧 유대인들의 방해에 부딪혀 다른 모임 장소를 찾아야만 했는데 찾게 된 곳이 바로 디도 유스도(Justus)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그의 청중들은 회개 하였으며, 그러던 중 마게도냐로 파견했던 실라와 디모데도 돌아와 합세함으로 바울은 점차 안착하게 되고 복음 전도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니 교회는 더욱 견고해져 갔다.(행 18:4-18) 고린도 교회내의 신자들의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은 각양각색이어서 시(市) 재무관과 같은 높은 신분을 가진 에라스도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 그런가하면 노예의 신분을 가진 비천한 자도 있었다. 또 이중에는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 대다수는 가문이나 지식 교육 정도에서 그리 높은 수준을 가지지 못한듯 싶다.(고전 1:26)
그들은 또한 반도 국가로서, 또한 도시국가로서 작은 국가들이 할거해 온 영향으로 그 성향이 극히 분파적이었다. 이것은 또 그들 공동체가 여러 곳 여러 인종들이 유입되어 합류되고 또 그들 각자의 신분이 큰 차등이 있다고 하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실로 대륙국민의 자긍심, 도서국민의 배타심, 그리고 반도국민의 분파심은 세계를 관통한 일반적 심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개종한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또 그런가 하면 그들 가운데는 아직도 지적인 자랑을 하는 쓸데없는 경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고전 1:18-20; 3:18;19: 8:1) 또한 이에 더해 아직도 그 들 출생지에서의 이전 버릇대로 감각적인 죄에 끌려가는 자들도 있었다. (고전 5:1; 6:15-18; 11:21)
또 유대인들은 회당의 훈련받은 사람들로 대체로 유대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복음보다 율법을 중시하려 했다.(고전 6:11) 고린도교회의 회집장소와 시간은 분명치 않다. 다만 고린도전서 14:23에 "온 교회가 함께 모여"라고 기록한 사실로 보아 평소에는 소집단으로 모였을 것이다. 또한 그 모임의 날짜는 매주 첫째날(고 전 16:2)이 암시되어 있으나 확실치는 않고 매주 모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며(고전 14:23; 11:33) 그 시간은 매주의 첫째날이 시작되는 안식일 밤(행 20:7)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자신이 천막을 만든 것은 토라를 가르치면서도 생업은 자신이 꾸려 가는 랍비의 관습을 따랐다고 보았으나, 호크(R. F. Hock)는 그것은 2세기 이후에나 나타난 관습이며 바울은 헬라철학자들의 삶의 유형을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로 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린도교회를 위해 다른 곳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고후 11:8) 바울은 그의 첫 고린도 방문에서 18개월을 지냈다.(행 18:11) 그의 체류가 거의 끝날 무렵 아마도 주후 52경 늦 여름에 갈리오가 아가야주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바울의 고린도전도 역시 유대인의 방해로 인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의 목회활동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그를 총독 갈리오에게 소송하였기에 결국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게 된 것이다.(행 18:12-17) 바울이 떠난 후 이 교회는 급성장을 하였고, 이후에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였다. 이것이 후에 이 교회에서 아볼로파가 생기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행 18:24,19:1) 때문에 바울이 고전 12장에서 "그리스도 몸"의 개념으로 그의 교회관을 기술한 것도 위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3. 당시의 상황
고린도교회에서의 1년 반의 사역 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와 계속적인 접촉을 가져왔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온 사람들 - 글로에의 집 사람들 - 을 통해서, 또한 고린도교회가 일련의 문제 들을 질문하기 위해 보내온 편지를 통해서 그 교회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전해진 모든 교회의 소식은 좋은 교회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러한 좋지 못한 일련의 교회 모습들을 접하고 바울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고린도전서를 쓰게 되는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일일이 제시되어 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고린도교회의 문제 상황은 구체적으로 다음의 것들이었다. 우선은 부도덕성의 문제였다. 어떤 사람은 교회로 부터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계모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람은 자신들의 행동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자유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또한 자신들의 영적인 충만함이 결코 자신들의 육적인 문제들에 의해서 속박당하지 않음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인 문제에서 더욱 더 난잡해졌으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성적인 것을 죄된 것으로 여기는 금욕주의적인 태도들이 나타났던 것이다.(7:1-40)
또한 교인들 간의 의견대립으로 싸움이 생기고 급기야 세상법정에 고소하는 일까지 생겼으며,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가 제공되는 식사초대에 응하기도 하였고(10:27ff), 이교사원에서의 식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다.(8;10)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술 취하는 자가 많았으며, 애찬에서 부자는 먹을 것을 많이 가져오고 가난한 자는 적게 가져옴으로서 서로 간에 위화감이 조성되었다.
또한 영적 은사의 우위성에 대한 토론으로 서로 반목하게 되었고, 방언 등으로 인해 예배질서가 파괴되곤 하였다. 특히 이러한 영적인 경험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영성의 표현으로 간주했고 동시에 별로 뚜렷하지 못한 은사들을 갖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전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경시해 버렸다.(12:21)
또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15장) 이들은 이교도적인 불신앙의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 구성원들이 아니라 세례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은 교회 안에 파당과 분쟁이 있다는 소식에 가장 괴로워하였다.
이 파당과 분쟁의 문제는 위에서 나열한 여러 문제들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1:12에 보면 고린도교회 내에 4가지의 다른 그룹(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4가지 다른 그룹들이 서로 다툼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파당을 낳게 한 근원은 무엇일까? Merkel 은 이에 대해 이 근원이 세례를 준 사람들과 결합 되었다고 말한다. Perrin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주는 사람과 세례 받는 사람을 동일시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힘을 나눠 갖게 되는 일종의 신비한 의식으로 세례를 생각했다고 말한다. 큄멜은 이 파당이 단지 교회내의 다른 교사들이나 경향들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만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인간인 교사들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통해서 특히 세례에 대한 신비적인 이해를 한 결과, 고린도인들 사이에서 세례를 행했던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 볼 때 파당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세례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례의식을 통한 신비적인 요소들고 결합된 성령 소유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열광적인 과대평가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지혜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왜곡하게 하여 헬레니즘 종교(헬레니즘 세계는 종교를 신비적인 능력의 과시, 기적을 행할수 있는 능력, 여러 종류의 종교적 황홀경 현상들의 체험, 그리고 뛰어난 지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의 그것과 마찬가지 개념으로 해석하게 했다. 바울 자신도 헬레니즘 세계의 한사람이었기에 고린도인들에게 영적인 열심을 촉구했음이 틀림없지만 고린도 현상들은 손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와 관련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치를 호소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바울의 교회 이해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나타나고 있다.
4. 고린도전서의 구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치 문제를 강조하는 본서는 교회 내의 분열된 당파의 연합을 강조하면서 교회 내에서 성찬, 영적 은사 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회가 거룩해야 하듯이 개인생활도 그러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고린도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전체가 먼저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보고를 들은 후 그에 대한 응답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전반부를 형성하고 (1:1-6:21) 다음으로 고린도교회로부터 받은 질문들에 대한 응답으로 된 후반부를 구성(7:1-16)하고 있는 것이다.
a. 전반부 (1:1-6:20)
1. 교회내의 분열 (1:1-4:21) - 그리스도가 나뉘지 않았음을 주장.
2. 성적인 죄악 (5;1-13) - 몸은 성령의 전.
3. 세상법정에의 소송 (^:1-11) - 기독교인이 세상법정에서 심판 받을 수 없고 스스로 해결.
4. 모든 것이 가하다는 주장 (6:12-20) - 육체적 방탕에 대한 도덕적 영성 강조.
b. 후반부
1. 결혼과 독신 문제 (7:1-40) - 하나님이 주신 본분대로 살 것
2.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8:1-11:1) - 기독교인의 자유는 책임을 수반
3. 기독교 예배 규정 (11:2-34) - 관리의 준수
4. 성령의 은사 (12:1-14:10) - 은사 중 최고는 사랑이며, 모든 은사 는 교회의 덕
5. 죽은 자들의 미래 부활 (15:1-58) - 미래의 몸의 부활
c. 에필로그 (16:1-)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특징들은 예배드리는 교회의 공통적 신앙규범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론의 분야로서 교회에서의 바른 예배행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12-14장에서 상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이 고전 16장 전체를 교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썼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Climax장은 바로 12장이며, 12장의 맥락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개념 아래에서 볼 때 본서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목회자였고, 그의 관심은 그가 세운 "어린교회"의 성장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