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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타고 길을물어(대한불교 조계종 관음사 열린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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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스크랩 “이것뿐이야. 바로 이것뿐이거든”무심선원 김태완님의 불이법문을 듣고
佛頂 慈悟 추천 0 조회 462 16.07.09 13: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것뿐이야. 바로 이것뿐이거든무심선원 김태완님의 불이법문을 듣고

 

 

어느 사찰 대화방에서

 

어느 사찰 대화방이 있다. 스님이 초대해 주어서 종종 글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어느 법우님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다니고 있는 선원을 소개 하였다. 소개한 사이트를 찾아 보니 선종과 관련이 있다. 재가법사가 법문한 것을 유튜브에 수 십 편 욜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법문 몇 편을 들어 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만 두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을 유발하는 법문이었기 때문이다.

 

법우님이 소개한 법문은 불이법문에 대한 것이다. ‘둘이 아니다또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여 不二(불이)’ 또는 不異(불이)’라 하는데 들어 보면 별로 남는 것이 없다. 법문 내내 둘이 아니다라든가 그것이 그것이다라는 말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법우님은 그 선원에 가서 재가법사의 법문을 들어 보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쓰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최근 대화방에서 법우님이 글을 남겼다. 글의 내용은 역시 재가법사가 이끄는 선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법우님은 제가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님 법문을 듣다가 문득 본래면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 하는 것이 바른 불교인의 자세라고 글을 남겼다. 그러자 법우님은 우파니시대에 불이중도를 깨달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가지 방편으로 불이법을 알려 주시는 경전이지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우리 안에 원래 있는 불성을 찾는 길이겠지요. 나무석가모니불이라 하였다.

 

동네 친구 부르듯이 석가모니가

 

법우님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무심선원 김태완님의 법문을 들어 보았다. 증도가 1편 법문을 들어 보니 이전에 들었던 없다는 식의 이야기 일색이다. 특히 부처님의 깨달음 이전에 대하여 불교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였다. 증도가 1편 초입에 부처님의 깨달음의 과정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꾸 우리가 석가모니를 따라 가야 된다고 그러는데, 석가모니가 이런 중도 불이법을 깨달았는데, 그걸 석가모니가 출가해서 공부한 과정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석가모니 당시의 바라문교는 우파니샤드거든 그때가. 우파니샤드 기본적인 철한은 그런거에요. 영혼은 깨끗하고 육체는 더럽다. 기본 전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왜 번뇌 속에 있느냐. 깨끗한 영혼이 더러운 육체를 자기로 여겨가지고 집착하는 바람에, 육체는 생노병사를 겪는 더러운 거거든. 무상한 것이고. 깨끗한 영혼은 허공처럼 맑고 깨끗해서 아무 그게 없는 겁니다. 그런데 윤회라는 문제가 등장하는데, 영혼이 자기를 육체라고 착각해가지고 육체에 집착하는 바람에 육체를 따라서 윤회를 하게 된다. 그럼 윤회로부터 해탈이라는 것은 육체를 떠나서 깨끗한 영혼을 얻으면 된다. 이게 그당시 바라문교 주장이에요.”

 

(무심선원 증도가 01 (2013))

 

 

김태완님은 부처님에 대하여 석가모니라 하였다. 마치 동네 친구 부르듯이 한다. 그래서 자꾸 우리가 석가모니를 따라 가야 된다고 그러는데라든가 석가모니가라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선종의 선사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석가모니라 하지 부처님이라는 말을 좀처럼 쓰지 않는다.

 

부처님이 출가해서 바라문교 공부했다고?

 

김태완님은 부처님이 깨닫기 이전에 바라문교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도 그것을 당연히 그것을 진리라 여기고 출가해가지고 그 공부를 했거든이라 하였다.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도 그것을 당연히 그것을 진리라 여기고 출가해가지고 그 공부를 했거든. 그 당시 바라문교에서는 깨끗한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해 내는 수행방법으로 두 가지를 가르켰다는 말이죠. 하나는 요가고 하나는 고행이에요.

 

그래서 요가를 통해서 분별심을 멈추면 그게 요가의 최고의 경지는 비상비비상처정이라 하는거죠. 그거는 뭐냐하면 무념삼매에요. 그냥 아무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무념 삼매 속에 있으면 영혼도 잊어 버리고 육체에 관련된 모든 생각을 다 잊어 버리게 되지.

 

그럼 텅빈 허공처럼 캄캄하고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봐 가지고 그래서 항상 무념삼매 속에 있는 것이 열반이라 착각했던 겁니다. 그게 열반이라는 개념이라는 것과 맞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영원하지 않다는 거에요.

 

무념상태로 든 상태로 통나무처럼 지낼수는 없다 이게야. 사람이. 다시 삼매에서 나와서 활동하면 똑 같에. 영혼이 육체에 구속되 있는 겁니다. 그래 일년만에 때려 치고 비상비비상처정까지 삼매를 맛보고 이게 아니다 해서 집어 치웠죠.”

 

(무심선원 증도가 01 (2013))

 

 

이 부분은 부처님이 비상비비상처정을 닦은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비상비비상처정에 대하여 바라문 공부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웃따까 라마뿟따가 바라문이었다는 말은 초기경전에 보이지 않는다. 경전적 근거 없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아서 일 것이다.

 

부처님이 출가한 이유는?

 

부처님이 출가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 설명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때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왜 나는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 있으면서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늙음에 묶여 있으면서 늙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병듦에 묶여 있으면서 병듦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죽음에 묶여 있으면서 죽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슬픔에 묶여 있으면서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번뇌에 묶여 있으면서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는가?

 

그러자 나에게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 있지만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생겨남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늙음에 묶여 있지만 늙음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늙음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병듦에 묶여 있지만 병듦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병듦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죽음에 묶여있지만 죽음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죽음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슬픔에 묶여 있지만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슬픔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고, 스스로 번뇌에 묶여 있지만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의 재난을 알고, 번뇌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M26)

 

 

부처님은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출가하였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구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다. 이는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찾아 간 첫 번째 스승은 알랄라 깔라마이었다. 또 한 사람이 웃따까 라마뿟따이다. 부처님은 알랄라 깔라마로부터 무소유처정을, 웃따까 라마뿟따로부터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다. 그러나 곧 두 스승으로부터 떠났다.

 

부처님이 두 스승을 떠난 이유는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M26)라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럼에도 김태완님은 떠난 이유에 대하여 무념삼매 속에 있는 것이 열반이라 착각했던 겁니다.”라 하였다. 이는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고행에 대하여

 

김태완님은 부처님의 고행에 대하여 그건 바라문교 가르침대로 수행했기 때문에 잘못된 겁니다.”라 하였다.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바라문교에서도 고행을 하긴 하였지만 부처님 당시 나체수행자 등 출가사문들이 고행하였다. 김태완님은 부처님 고행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설명하였다.

 

 

죽기직전 까지 갔는데도 맑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났느냐 그게 안되더라 이거에요. 허허. 그래서 석가가 아이고 내가 죽겠구나’ ‘이거도 아니구나이 뭐가 잘못됐다. 그래서 바라문교에서 가르킨 두 가지 수행방법을 해 보았는데도 잘못됐으니까 바라문교를 버린거에요. 거기서.”

 

(무심선원 증도가 01 (2013))

 

 

김태완님은 경전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다 보니 경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와 어긋난다. 그러나 불이법문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말이나 문자는 모두 방편이고 진실한 것을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 한다.

 

김태완님에 따르면 부처님이 6년 고행한 것에 대하여 바라문교에서 했던 것이라 한다. 그래서 바라문교에서 가르킨 두 가지 수행방법을 해 보았는데도 잘못됐으니까 바라문교를 버린거에요.”라 하였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바라문교를 믿었다는 말은 초기경전에 보이지 않는다. 고행은 부처님당시 나체수행자 등 사문들이 주로 하였다. 그럼에도 마치 고행한 것에 대하여 바라문교 수행을 한 것으로 설명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부처님은 왜 고행을 포기 하였을까? 이것과 관련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S56.11) 라 하였다. 고행이 괴로움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성현의 가르침도 아니라 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익하기 때문에 고행을 포기한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고 내가 죽겠구나라 하여 죽음이 두려워 고행을 그만 두었다는 식으류 말하고 있다. 더구나 믿지도 않았던 바라문교 수행을 버렸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불이중도를 깨달았다고?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 하였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김태완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 가지고도대체 뭐가 잘못 됐노?’ 한 거에요. 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 하다가 문득 새벽에 새벽별을 보는 순간에 체험이 왔다고 그러는 거에요.

 

처음에 오고 나서 보니까 애초에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육체라고 나눈 그 전제가 잘못된거야. 그게. 그래서 불이다 불이.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다. 둘이 없다. 중도로 이야기한 거야. 부처가.

 

그 중도라는 것은 그 전까지만 해도 없었어요. 바라문교에서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고.”

 

(무심선 증도가 01 (2013))

 

 

김태완님에 따르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불이중도라 하였다. 둘이 아닌 중도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연기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그리고 세존께서는 밤의 초야에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였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율장대품) 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다. 그럼에도 불이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불교는 중도고 완전히 새로운 가르침이야.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불이중도이지 뭐 좌선해가지고 선정에 들고 뭐 고행하고 그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오해를 해가지고 아 부처님도 육년 했으니까 우리도 해야 안 깨닸겠나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내 몽댕이 있으면 때려 주고 싶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게.”

 

(무심선원 도가 01 (2013))

 

 

不二法門

 

 

 

김태완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중도이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중도라는 것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중도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불이중도가 아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S56.11) 라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사성제에서 도성제에 해당되고, 사성제는 연기법이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연기법에 기반한 팔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이중도라 한 것은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진다.

 

내 몽댕이 있으면 때려 주고 싶어

 

김태완님의 유튜브 동영상 법문을 보면 주장자 비슷한 막대기를 들고 있다. 그 막대기를 탁탁 치면서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답답함을 토로 한다. 자신이 말하는 불이중도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실천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태완님은 불이에 대하여 반야심경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래서 무명이 곧 불성이고 헛됨이 바로 법신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그대로에요. 오온이 공이고 공이 바로 오온이다. 공은 법신을 가리키는 말이고 오온은 환화공신이에요. 허망한거지. 그래서 생멸법이 불생불멸법이고 불생불멸법이 곧 생멸법이고. 생노병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노병사다 이말에요.”라 한다.

 

이와 같은 불이 법문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르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한다. 그래서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내 몽댕이 있으면 때려 주고 싶어라 하였다.

 

이것뿐이야. 바로 이것뿐이거든

 

김태완님에 따르면 무명이 불성이라 하였다. 이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논리이다. 그래서 불이법을 알면 배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고 한다. 그냥 알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딱 체험이 되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불이중도에서는 좌선하고 뭐 수행하고 이런 건 없어. 그냥 망상부리는 것이 실상이라니까. 지금 망상부리는 것 이것이 실상이여. 그래서 불이중도여. 근데 이렇게 얘기 하면 와 닿는 것이 없어. 망상이 실상임을 깨달아하는 것이죠. 망상이고 실상임응을 스스로 깨달아 버려야 사실은 망상이 실상이고, 망상도 없고 실상도 없고, 자유자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일 하나뿐이에요. 하나뿐.”

 

(무심선원 증도가 01 (2013))

 

 

김태완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교학이고 수행이고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불이법을 알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법문 내내 하는 말은 그냥 이거라 이거. 이겁니다.” “이와 같이 이것에서 다 끝난 겁니다. 이것뿐이야. 바로 이것뿐이거든.”라 하였다.

 

김태완님은 법문 내내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냥 오직 이 하나가 진실할 뿐 나머지 세속생활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 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하는가 하면, “오직 요 법 하나가 진실해서 그냥 이것 가지고 그냥 사는데 이거는 삶과 죽음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항상 변함 없이. 어쨌든 요거 하나 가르쳐 드리는 거고라 하였다.

 

김태완님은 이것만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라는 말을 무수하게 사용한다. 이것이 정작 어떤 것인지는 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방법을 찾고 교리를 따지고 경전을 보는 것이 다 헛일이라 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여시아문과 관련하여 이와 같이 이것에서 다 끝난 겁니다.”라 하였다. 법문 내내 이것 뿐이야. 바로 이것 뿐이거든.”라 하였다. 이는 생각으로 알음알이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처님의 일생부터 다시 공부해야

 

인터넷시대에 유튜브에서 수 많은 법문을 접한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올려 놓을 수 있는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꽤 되는 법문이 있다. 그러나 선종계열의 법문을 들어 보면 대게 비슷한 패턴이다. 중국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중시해서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찬밥신세같아 보인다. 부천님을 호칭할 때 친구 부르듯이 석가모니가~”라는 식이다.

 

선종의 법사들 특징 중의 또 하나는 교리에 대하여 무지 하다는 것이다. 이는 선종의 종지 중에 교외별전불립문자의 영향 때문이라 본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불이법이라든가, 부처님은 참나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런 법문은 불교방송과 불교TV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보급 되어 있다. 그럼에도 선종계열의 법문을 들어보면 넌센스에 가깝다. 선종의 스님들이나 선종의 재가법사들은 부처님의 일생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5-11-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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