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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우리의 예배 영역에도 달린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그 욕망은 다름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기복신앙이요, 개교회적으로는 교회성장지상주의다. 예배 자체의 목적이 변질되고, 예배의 요소들인 설교나 찬양의 목적이 바뀌었다. '세상적인 복을 받고 교회가 성장하기 위하여 이런 예배를 기획하고 드려야 한다.'거나 '전도를 위해 예배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세를 이룬다. '찬양이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아야 한다', '뜨겁게 찬양하도록 드럼이나 전자 기타 같은 악기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버헤드프로젝터나 빔 프로젝터로 찬송 가사를 확대해 보여 주어야 한다'는 충고가 소위 예배 갱신 세미나마다 정석처럼 나온다. 이와 맥을 같이 하여 세상적 복을 얻어 누리라는 축복 선포 일색의 설교나 듣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해서 감정적인 충족을 주고는 그 감정적 고양을 은혜 받은 것의 실체인 양 고백케 하는 행태들이 아무런 신학적 성찰 없이 정당화되고 있다.
개인이 축복을 받고 교회가 성장한다는 목적들이-축복이나 부흥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는 상관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차지하더라도-모든 수단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예배에 대한 이런 합목적적인 행위가 아무런 신학적 비판이나 성찰 없이 행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비판과 성찰은 구약의 증거를 살펴보지 않은 채 온전히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본고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회복을 위한 구약의 교훈을 살펴보는데 있다. 이런 맥락 하에서 예배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아야할 점들은 첫째,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다.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예배는 수많은 실용적인 목적들에 의해 변질될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는가? 라고 할 수 있다. 규정된 방식에 따라 드리지 않는 예배 역시 결과적으로 이교적 예배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가장 극명하게 대답하고 있는 곳은 바로 십계명이다.108) 출애굽기 20장 4절-6절에 있는 제2계명은 여호와만을 배타적으로 섬기는 세 가지 세부 규정이다. 첫 번째 것은 여호와를 경배하는데는 어떤 형상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여호와께서는 있는 그대로 예배 받기 원하신다는 것과 여호와께 바쳐야할 충성심으로 다른 대상을 예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109)
Ⅱ. 예배의 구약적 기초
2.1.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하는 이유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의 본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만물가운데서 보고 하나님을 알고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이다(롬 1: 20-21 참조). 인간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 복종해야할 존재임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은 선악과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으로 이 엄연한 사실을 표현한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한 한계를 받아들임으로 고백해야한다.110)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이러한 한계를 받아들이기 보다 자신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한다.111) 그 타락의 결과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의 폐쇄였다.(창 3:22-24). 아담의 불순종 이후 인간의 반응은 피조물로서의 마땅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수와 버리지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롬 1: 21-23 참조).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피조물의 마땅한 의무는 창조주를 경배하는 것이다. 타락은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기를 거부하고 피조물 자신이 스스로가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며 그 본분을 회복하도록 명하실 때에 단지 창조주로서의 권한으로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은혜를 베풂으로 구속하신 이를 섬기게 하신다. 구속하신 은혜를 알게 하심으로 구속하신 이를 신뢰하며 사랑하고 충성케 하실 뿐만 아니라 구속하신 이가 바로 창조주요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경배를 받으셔야할 분이심을 계시하신다. 그래서 타락이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상대하시는 방식은 이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된다.112) 또한 이스라엘 안에서 행하신 일들은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전체 구원 경륜의 일부라는 것이 구약성경의 증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심으로 열방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하여 (온 세계에 대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진행시켜 가시기를 계속하셨다.113)
성경은 하나님이 이러한 타락 상태의 인간을 위한 구속의 역사를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구속의 목적은 창조의 회복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삶, 하나님이 여전히 그의 피조물들을 향하여 의도하시는 삶을 다시 살기 위하여 구속함을 받는다.114)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삶을 다시 살기 위하여 구속받는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려는 것이고,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중요성, 구속사의 중요성은 창조에 비추어서만 온전히 인식될 수 있고, 피드백 과정을 통하여 창조는 오직 이스라엘과 구속사에 비추어서만 온전히 인식될 수 있다.115)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계신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속은 단지 이스라엘만의 구속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한 세계 전체에 대한 구속인 것이다.116)
2.1.1. 모세 이전 족장들과의 언약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그 아내에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에 대한 약속을 주신다(창 3:15). 하나님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으로 표상된다(창 3:14). 이 약속은 아담과 그 아내와 그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대망된다(창 4:1 참조). 아마도 아담과 그 아내는 번제를 드릴 때마다 짐승의 희생을 통해 표상된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였을 것이고, 그 구속의 결과로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회복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아벨은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림으로써 열납되는 제사를 드린다(창 4장 참조). 이것은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식으로 드려진 예배라는 의미 외에도 그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을 대망하고 있음을 뜻한다(창 3:14 참조). 그는 그 부모로부터 하나님이 구속의 방법으로 내신 짐승으로 드리는 희생 제사의 의미와 방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인 구속 사역의 계시라는 차원에서 자신의 약속을 선포하신다. 그 약속은 동일한 것이지만 점점 더 구체화되고 분명해진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을 때마다 그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삭이 듣고 그 약속의 성취를 확인하고, 자신도 그 약속에 대해 감사하며, 그 약속을 받은 자로 살기로 결단한다. 야곱 역시 그 약속이 자신에게 선포될 때 그 약속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자신 역시 그 약속에 대해 감사하며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헌신한다.
족장들이 단을 쌓는 본문들의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되거나 기억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는다(창 12:7).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알 땅으로 가고 난 뒤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이 단을 쌓는다(창 13:14-15).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은 아브라함 편에서는 자손에 관한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 것이며 하나님 편에서는 자손에 대한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창 22장).
이삭 역시 아비멜렉에게 계속해서 우물을 빼앗기던 차에 나타나신 여호와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신 뒤에 단을 쌓는다(창 26:23-25).
야곱도 에서를 피해 외가로 도망하던 길에 밧단아람에서 나타나신 여호와를 만난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창 28: 13-15)고 말씀하시자 베개하고 있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다(창 28:18).
야곱은 또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여 욕을 본 일로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 그 아들들이 세겜 성민을 도륙하자 벧엘로 올라갔다가 돌아온다. 그 때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신다(창 35:9-12). 이에 야곱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는다(창 35:14).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약속의 이미 성취된 면과 장차 완전히 이뤄질 것에 대한 소망이 그 약속의 복됨을 인해 감사하며 그 약속과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예배로 이끌었던 것이다. 아벨로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르기까지 족장들이 드린 예배의 동기는 약속을 그대로 이뤄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감사와 장차 이뤄질 약속에 대한 소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2. 시내산 언약 체결과 언약 회복 또는 갱신
모세 시대에 시내산 언약117)이 체결된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을 형성하게 된 뒤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공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이 관계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상호관계이다.
모세 시대에 시내산 언약이 체결 이후 구약 예배의 중심은 성막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로 옮겨간다. 성막과 성전 제사는 시내산 언약을 유지하고 회복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이다.118) 구약이 말하는 제사의 본래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오경에서 사실과 사건을 기록하는 순서에 있어서도 이 점이 명백해진다. 먼저 시내산에서 언약관계를 공식적으로 체결하였고(출 19-24), 이스라엘은 여호와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을 자신의 보배로운 백성(segullah, 출 19:5, 신 26:18)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어서 언약 당사자들이 더불어 살아갈 장소이자 그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이 준비되었다(출 25-31, 34-40). 그리고 제사에 대하여 언급되었는데(레 1-7), 이 사실은 제사가 독립적인 하나의 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앞에서 맺은 언약과 관계된다는 점을 나타낸다. 즉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관계가 깨어졌을 경우에 이것을 회복하거나, 더 나은 관계로 발전시키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레위기의 제사에는 언약법을 어긴 죄에 대한 회복하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죄와 관계없이 이스라엘이 사랑과 자비를 역사에 보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서원하며 자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언약관계를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의미가 포함된 제사인 것이다. 이것은 소위 5대 제사가 속죄의 목적과 헌신이라는 이중적 목적으로 드려질 수 있음에서 드러난다.119) 성막과 성전 제사는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를 깨뜨렸을 경우에 그 관계를 회복하거나 언약 관계를 유지하며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언약의 다른 당사자인 여호와께 헌신하는 수단이었다. 구약의 제사는 이 언약관계가 깨어졌을 경우에 회복시키거나, 이미 있는 언약관계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구약 예배의 중요한 부분인 제사는 언약 갱신에 깊은 관련이 있다. 시내산에서의 최초의 언약 체결 이후 최초의 언약 갱신은 소위 출애굽 세대가 사라지고 광야 세대가 이스라엘 백성의 주축으로 등장하였을 때 모세와 여호수아에 의해 모압에서 시작하여 세겜에서 완전히 갱신된다. 시내산 언약 속에 있는 십계명(출 20: 1-17)과 모압-세겜 언약 본문 내에 있는 십계명(신 5: 6-21)을 비롯해 언약 갱신을 다루는 본문에서 구속사의 선포가 나오는 소위 구속사 신경들은 언약 갱신의 한 주체인 하나님이 다른 주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충성의 근거가 된다.120)
이후 사무엘 시대와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언약 갱신을 다루는 본문들에서 구속사 선포와 언약 갱신의 주체들에게 요구되는 충성 사이의 관계가 이후 갱신되는 언약을 다루는 본문인 신 6: 21-23, 신26: 5b-9, 수 24: 2-13, 삼상 12장, 느 9장에 나타나는 구속사 신경들과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을 포함하는 본문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신 26: 5b-9의 역사적 신경은 언약의 갱신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시고 땅을 주는 데서 절정에 이른 여호와의 구속적 행함을 간략히 상기하는데 관심을 둔다.121) 각 세대는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나 언약 갱신의 기회에 신 26: 5b-9가 제시하는 계약의 기본 요구에 대해 응답하도록 요청된다.122) 즉 신 26: 5b-9의 구속사를 재낭송함으로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여호와께 바쳐야 할 충성을 상기하고 재무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명기 내에서 6: 21-23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유형은 수 24: 2-13에서도 나타난다.123) 수 24: 2-13의 구속사 나열은 14절 이후에 나오는 여호와를 섬기라는 요구에서 분리할 수 없다. 여호와의 구속 역사 열거는 같은 장에 있는 다른 훈계 및 경고와 함께 언약에 성실하라는 요구의 바로 그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24장의 신경은 신 6: 20ff에서와 같은 기능을 한다.124) 이스라엘 왕권이 등장한 시기에 사무엘의 중재로 길갈에서 실시된 언약 갱신도 시내산 언약에서부터 언약 갱신 시점까지 여호와께서 행하신 구속을 선포하는 구속사 신경을 포함하고 있다.125)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는 포로기를 겪고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과 성벽을 재건한 뒤 에스라의 주도하에 이 실시한 언약 갱신을 다루고 있다.126)
언약 갱신에서 구속사를 선포하는 구속사 신경이 나타나는 예는 구약 성경 시대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각 구속사 신경은 그 신경이 선포되는 시대까지의 구속 역사를 요약한다. 신명기 본문과 여호수아 24장은 정착기 때까지를 다루고, 사무엘 12장은 사사시대를 포함하고, 느헤미야 9장에서는 에스라-느헤미야 시대까지를 언급한다.127)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나는 언약 갱신들은 세대마다, 달라진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언약을 각 세대가 자기 고백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언약 갱신에 의해 형성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한 폭 넓은 배경을 형성한다.
2.1.3.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의 언약 갱신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의 구약 예배는 중단된 모세 시대 이후의 성전예배의 중단 속에서 회당 중심의 예배와 귀환 이후 성전 제사를 회복하고 철저히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 언약에 충실하다는 표시의 하나로 성전을 재건하고 거기서 행해지는 제사를 회복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이어 바사의 통치하에 포로로 있던 그 백성을 다시 귀환케 하사 하나님의 집의 회복케 하셨다. 그 회복은 3단계로 성전의 재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 확립, 성벽의 재건으로 일단락된다. 이 일들은 3차례에 걸친 귀환에 의해 이루어졌다. 먼저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이끄는 1차 귀환(B. C. 538년)이 있었고, 두 번째는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가 이끄는 무리들의 귀환(B. C. 458년)이었고, 세 번째는 총독 느헤미야가 이끄는 무리의 귀환(B. C. 444년)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으로 시작되고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끝난 회복에 이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을 다시금 낭독하며 그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이 되겠다는 언약을 맺음으로 옛 언약을 갱신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매 단계마다 넘어야 할 고비들이 많았다. 성전을 재건하는데 외부적으로는 산발랏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그들은 바사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유다 백성들의 성전 건축을 지연시켰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내부적으로는 성전 재건보다는 자기 집을 짓는데 몰두하고 있었고(학 1:1-4 참조), 임시 제단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성전의 필요성을 잊어가는 어려움이 있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에 힘입어 고레스의 칙령으로 귀환한 뒤 25년 만에야 성전을 완공하고 봉헌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집은 성전의 완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다움을 회복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전의 완공으로 예배 공동체로서의 성격이 뚜렷해졌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의 영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자기 직무에 싫증난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여호와께 병들고 흠있는 짐승들을 바치면서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말 1:6-14). 더욱이 율법을 집행할 때 편파적인 처신을 함으로써 성직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말 2:1-9). 일반 백성들도 안식일을 무시하고 버젖이 장사를 하고(느 13:15-22),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느 13: 10이하). 이들은 신앙에 충실해 봐야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종교적 타락은 도덕적 문란으로 이어져 이혼이 성행하고(말 2:13-16), 부자들은 임금을 착취하는 등 약한 이들을 이용하고(말 3:5), 가난한 자들은 노예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느 5:1-5). 더욱이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유다인 공동체의 순수성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느 13:23-27). 에스라의 개혁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게 하사 하나님의 도성 전체가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셨다. 이를 위해 느헤미야를 사용하셨고 모든 백성이 이에 참여하였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세겜과 그들의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였으나 성벽이 재건됨으로 하나님의 집이 완성되었고, 언약이 갱신되었다. 포로기 이후의 예배의 정신은 바로 언약의 갱신이었다.
2.1.4 결론
언약 신학의 핵심에는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다.128)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알리시되 자신만이 창조주요 유일한 신이심을 증거한다. 그 주장은 구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제시되고 받아들이도록 요구된다. 제1계명은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에게 그런 배타적인 충성을 요구할 권한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구가 타당함은 구속하신 은혜 때문이다. 그 타당성은 하나님과 그 백성에게 공히 인정되는 것이다. 언약관계에서 하나님은 홀로 그 백성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시고 받으실 권리가 있으신 분이시다. 이 언약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또한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것이 계시되고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경배 받으실 분이심을 계시하시며 그에 합당한 경배를 요구하신다. 이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할 이유였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해야할 이유를 제시해 준다. 그것은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마땅히 경배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아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에게나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이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129)에게나 그들이 드려야할 예배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들은 제1명뿐만 아니라 제2계명도 철저하게 준수하여야하였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하는지도 알아야했던 것이다.
2.2.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하는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그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해야만 함을 확증한다. 가인은 계시되지 아니한 방법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열납되지 못한 제사를 드렸다(창 4장). 레 10:1-2에서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를 불로 쳐서 죽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상한 불로 향을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향을 태워야할지를 미리 말씀하셨다(출 30:9). 그들은 제단의 불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들 자신의 불을 가져왔다.130)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이 계시하신 방식대로 드려야함을 보여준다.131)
2.2.1. 족장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는가?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예배에 관한 언급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창 4:3-5).132)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결과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전후문맥을 살펴볼 때 희생제사와 그 제사의 방식이 이미 전달되었고. 아벨이 그 계시에 의존해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그 아내에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에 대한 약속을 주신다(창 3:15). 이 약속은 아담과 그 아내와 그 후손들에게 구원의 전해지고 대망된다(창 4:1 참조). 하나님은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으로 시작된다(창 3:14).
아벨은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림으로써 열납되는 제사를 드린다(창 4장 참조). 이것은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식으로 드려진 예배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내신 구속의 방법에 따라 용납됨을 뜻한다(창 3:14 참조).
노아는 홍수 후에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로 드릴 것을 취해 번제를 드린다(창 8:20-21).
족장들은 벧엘, 세겜, 헤브론과 같은 종교적인 성지에 단을 쌓고(창세기 12:7-8; 13:18),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창 22장). 이 부분은 희생제사를 자세하게 서술한다. 1) 나무를 모으고 2) 희생제사를 드릴 곳으로 이동하고 3) 산 위에 제단을 쌓고 4) 제물을 죽일 칼을 준비하고 5) 제물을 죽여 불로 태운다. 이 사건은 하나님꼐서 인신번제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야곱이 돌단을 쌓고, 음식을 먹고, 희생제사를 드린다(창 31:43-54). 여기에는 자세한 희생 제사의 방식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희생제사가 야곱에 대한 약속을 지키심의 일환으로 자비와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언약의 증인이 되심을 볼 수 있다. 야곱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는다.
이런 단편적인 내용들을 얻을 수는 있으나 구약 예배가 모세 시대 이전에 어떤 의미를 지녔고, 어떤 순서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오늘날 기독교 예배와 어떤 연관이 있는 지를 밝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만 성경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족장 시대의 제사의 공통점은 제물을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 형식으로 제단에 드려 졌고, 그 제사들이 열납되고 있음을 볼 때 그것은 최초에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명하신 제사방법이 후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계시에 따라 드려진 것임에 틀림없다.
모세 이전에도 드려진 제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제사 방식에 따라 드려짐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규정대로 드려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2.2..2. 모세 시대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렸는가?
모세 시대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제사를 드렸는가를 알 수 있는 보다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러나 제사가 구약 예배의 중심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것이 구약 예배의 전부는 아니었는고로 구약 예배를 말하는 데 있어서 역시 자료의 한계가 있다. 모세 시대 이후의 예배는 성막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배와 회당을 중심으로한 예배로 구별하여 말할 수 있다.
성막과 성전에서는 주로 희생제사 예배가 드려졌다. 그러나 성막과 성전은 기도의 장소이기도 했으며(왕상 8:22-53; 사 56:7; 마 21:13; 행 3:1), 맹세를 하며(왕상 8:22-53), 찬양을 드리고(대상 15:16-22; 25:1-31), 가르침이 베풀어지는(마 26:55; 눅 2:41-52; 행 5:21) 곳이었다.133)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성전에서 드리던 예배 요소중 희생 제사와 같은 제사적, 모형적 의식이라는 요소를 제외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예배 형태에 대해서는 레위인의 직무와 관련해서도 추론 가능하다. 모세는 레위인의 임무로 주의 법도와 율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것과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단 위에 드리는 것으로 명하고 있다(신 33:10).134) 이 명령대로 레위인들이 실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 명령을 실행하였을까?
우선 레위인들이 이 직분을 수행하였던 것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기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위인들이 할 일은 신 33:1-11에 언급된다. 신 33:1-11은 레위인의 직무를 (1)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가르치고, (2) 주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대하 1:7:7-9; 스 7:10)으로 기술한다.135) 성전 봉사자들은 1반열 당 1천명씩 24반열로 나누어 1반열이 1주간씩 년 2회 순번제로 성전에서 봉사한다.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고 레위인들을 보조적 역할을 한다. 성전 봉사자들은 1반열 당 1천명씩 24반열로 나누어 1반열이 1주간씩 순번제로 성전에서 봉사하고. 년 2주간만 성전에서 봉사하고 나머지는 48개 성읍 중 자기가 속한 곳에서 생활한다. 이때 백성들에게 율법을 강론한다. 레위인에게 배워 각 가정의 가장과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이로 미뤄보건대 모세 시대 이후 포로기 이전까지의 예배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중앙성소인 성막과 성전에서는 제사적, 모형적 의식이 이뤄지는 것은 물론 그것들과 동시에 기도, 찬양, 율법의 낭독과 해석으로 이뤄진 예배가 드려졌고 전국 각 지방의 회당에서는 기도, 찬양, 율법의 낭독과 해석으로 이뤄진 예배가 드려졌을 것이다.(신 33: 10).136)
이와 같은 예배가 어떤 규례에 의해 드려졌는가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구약 예배의 요소들이 오늘날 신약 예배의 요소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바로 연관시키는 일도 쉽지 않다. 구약 예배의 요소들을 잘 이해하는 것과 구약 예배가 어떻게 드려졌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성막과 성전 제사
레위기 1-7장 각 제사에 대해서 두 번씩, 한번은 제사인의 관점에서(1-5장), 또 한번은 제사장의 관점에서(6-7장), 기록하고 있다.137) 이 제사 및 절기에 관한 규례 등 예식적, 모형적 의식은 레위기 등에 기록된 대로 행해졌다. 이것에 대한 규례는 분명하다. 그러나 신구약 통괄적 요소들(transcovenantal elements)138)은 그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s)139)하에 있는지의 여부가 논쟁이 되고 있다. 구약 예배의 요소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제사적, 모형적 의식이 성전 예배에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140) 더군다나 제사적, 모형적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고 폐해졌다. 따라서 제사적, 모형적 의식을 제외한 신구약 통괄적 예배 요소들을 구약성경이 어떻게 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도
성막이나 성전은 기도의 장소였다(왕상 8:22-53; 사 56:7; 마 21:13; 행 3:1), 한나는 매년제를 드리면서 사무엘을 얻기 전에와 얻은 뒤 서원대로 바치기 전에 실로에 있는 성소에서 기도했다(삼상 1-3장 참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기도를 감사와 함께 종교적 예배의 특별한 한 부분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말한다.
기도에 관하여 최근 야베스의 기도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 까닭은 야베스의 기도 내용이 인간적인 성공을 바라는 욕망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야베스의 기도는 물론 구약에 대한 해석방법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야베스처럼 우리도 간절하게 바라며 애타게 구하면 다 응답되고 그 결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신학에 의해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고 바른 기도관이 왜곡되는 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뜻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된다면 그것은 성경이 우리게 가르치는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 성경은 우리가 열심히 간절하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해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우리 기도가 받아들여지려면 각자가 이해, 존경, 겸손, 열성, 신앙, 사랑과 이내로써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의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141)
찬송
구약 예배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와 역사적인 교회에서 찬송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구약 예배에서의 찬송에서 오늘날 교회의 찬송을 위한 규정적 원리들을 찾으려할 때 논쟁이 되곤 하는 것이 성가대의 존재와 역할일 것이다. 레위인들은 성가대로 명해져 그 직분을 감당하였고,142) 성가대의 찬양에 회중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143) 구약 예배의 찬송은 성가대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고 회중이 그 찬양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대상 15: 16). 그래서 교회 역사의 최근에 이르러 그런 성가대의 존재와 역할을 평가하고 적극 활성화시켜 왔다. 그러나 초대 이후 역사적인 교회의 예배의 찬송은 성가대 보다는 회중 전체의 찬양에 비중을 두어왔다. 그 까닭은 오늘날 찬양대 자체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 본문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하신 큰 일들을 지극히 높여드리는 제사의식의 한 요소로 여기기 때문이다.144) 이것이 신약에 와보면 더욱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드려진 이후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는 상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에 있어서 구약 시대의 레위인들이 주로 맡아 했던 찬양대를 중심으로 한 어떤 음악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145) 오히려 구약 시대에도 찬양이 찬양대 혹은 성가대만의 전유물이라기보다 회중의 찬양이었던 예가 많다.146) 신약의 찬송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주님의 은혜를 인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 찬양을 읊었다고 볼 수 있다.147)
또한 구약시대에 소고를 치며 비파와 수금과 십현금을 부는 등 악기를 사용하고 박수를 치고, 춤을 추며 찬양하는 것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논쟁이 되고 있다. 분명 시편이나 구약 성경은 그와 같은 악기 사용이나 박수나 춤을 명하기도 하고(시 68:24-25; 98:4-6; 149:3; 150:1-6) 그와 같은 식의 예배에 대한 실례도 있다는 것이 문제를 간단치 않게 만든다. 이와 같은 명령과 실례를 따라 하는 것이 정당하고 심지어 복종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 실정이다.
칼빈은 교회에서의 악기 사용을 구약 시대의 그림자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여 폐지하였다.148) 청교도들도 악기는 교회 안에서 사용되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회중이 아카펠라 식으로 노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악기 사용의 문제는 예배의 요소를 논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악기 사용 여부나 악기의 종류를 정하는 것은 예배의 환경과 형식들(circumstance & form)에 관한 문제이다.149) 성경은 예배의 요소들에 관해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과 형식에 관한 것들도 충분한 지침을 담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예배를 포함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위해 충족하다는 것을 믿는 신앙과 일관성을 가진다. 노골적으로 지시하거나 지침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진술로부터 정당하게 유추하는 방식을 통해 그 지침을 얻을 수 있다. 배너만은 이에 대해 세 가지 지침을 제공한다. 첫째는 예배 규례나 예배 의식과 같은 것을 위한 분명한 교훈이 있다는 것과 둘째 후대에 구속력을 가지는 특별한 실례가 있거나 셋째 분명한 교훈과 분명한 실례가 없는 경우 공적인 예배에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성경 원리들이 있어 지침을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회중찬양을 위한 음악적 반주가 예배의 한 환경이라고 제안한다.150) 악기로 찬송시에 반주를 하는 것이 예배의 요소가 아니고 환경에 속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시편 사용에 대한 지침 역시 논쟁이 되고 있다.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 시편이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신약의 계시를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이 대두된다. 그러나 시편을 제외하고 현대적인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시편의 영감성이나 구약 이스라엘의 예배와 예수님과 초대 교회가 시편을 부른 전통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솔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성경봉독과 교훈
레위인들은 각기 흩어져서 사는 성읍에서 성전의 봉사임무를 맡은 2주간의 기간을 제외한 기간에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언제 어디서 이와 같은 일을 하였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레위기 23:1-3에서 백성들에게 매 안식일에 "성회"로 모이라고 명령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51) 그들은 그 땅의 모든 곳에서 이 성회를 행할 수 있었다. 성막 이외에서도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고, 결국 그것이 전 영토롤 퍼져나갔을 것을 상당히 신빙성 있게 추측할 수 있다. 전국 48개 성읍에 흩어져 있던 레위인들이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 임무를 자연스럽게 담당했을 것이다. 왕하 4:23은 북왕국에 사는 신자들이 안식일이나 월삭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152) 그러한 제도에 대한 또 다른 암시는 레 23:3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구절은 매주 모이는 그 모임 속에서 무슨 일들이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안식일과 '거룩한 모임(한글 개역성경에는 "성회"로 번역됨)”을 연결시키고 있다. 처음에는 레위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을 안식일 예배가(어떤 방식인지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처음에는 회막 근처에서 시작되다가 후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아마도 48개 성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우리가 지금 흔히 회당 예배라고 부르는 모임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회당은 바벨론에 의한 파괴 전까지 팔레스틴에서 존속하였을 것이다. 시 74:8은 바벨론이 성전을 파괴했을 때 모이는 집들(회당)도 무너뜨렸다고 말하고 있다. 성전은 포로 귀환 이후 재건되었으나 회당은 보다 즉각적으로 재건되었을 것이다. 성전 파괴와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은 의심할 것 없이 회당과 같이 재건이 쉬운 형태의 모임의 방식을 더욱 더 중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153)
회당모임을 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아직 논쟁이 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프레임은 일단 이 물음에 대해 긍적적인 관점을 가진다. 구약에서 예배라는 단어는 전형적으로 성막과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회당에서는 희생제사가 드려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당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고, 경배란 예배를 정의하는 하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만일 회당 모임이 레 23:3에서 말하는 그 성회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었을 것이고 얼마든지 예배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154)
파이퍼는 프레임과 회당 예배의 규정적 원리의 적용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회당 모임을 예배로 보고 있음을 밝힌다. 파이퍼는 회당예배가 희생제사와 다른 모형적인 의식들이 없었지만 회당은 성전 예배의 연장이었던 것으로 본다.155) 회당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었고, 그 역사가 포로기보다 훨씬 이전이라면, 포로기 이후 나타나는 회당 예배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회당 예배의 형식을 이어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이 회당예배가 신약교회의 예배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156)
파이퍼가 프레임이나 쉴리셀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성막이나 성전에서의 제사적 예배가 아니라 소위 회당예배를 규정적 원리의 지배를 받는 예배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규정적 원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순한" 성회로 볼 것인가이다.157)
파이퍼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예배의 규정적 원리가 그 적용 범위가 성막과 성전 예배뿐만 아니라 회당예배와 신약예배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설교와 기도와 찬양, 설교, 성경읽기와 같은 신구약적 통괄적 요소가 구약 예배-그것이 성전예배든지 회당예배든지 간에-에 나타난다는 것을 통해 제사 이외에 구약 예배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158)
결론적으로 모세 시대 이후 예배는 성막과 성전 중심에서의 제사적, 모형적 의식의 요소와 회당 예배의 기도와 찬양, 설교, 성경읽기와 같은 요소라고 할 수 있으며 회당 예배의 요소들은 신구약 통괄적 요소로 구약과 신약 예배에서 공통적으로 예배의 요소를 이룬다. 구약 예배의 요소들은 제사적, 모형적 의식을 포함한 모든 예배 요소가 다 규정적 원리 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2.2.3. 포로기와 그 이후의 예배
포로기 이후의 예배는 성전 예배의 회복이다. 추방 이후의 예배가 회당 예배 중심이었다가 포로귀환 이후에는 다시 성전예배가 회복되고 아마도 포로기에 더욱 중요성이 대두된 회당 예배 역시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예배는 예배의 요소들을 회복함은 물론 규정적 원리를 따라 예배하는 것도 회복하였을 것이다.
2.2.4 결론
회당 예배나 신약 교회의 예배를 위한 규정적 원리가 따로 명령되어 있지 않은 까닭은 이미 구약에서 성막이나 성전예배를 명하실 때 주신 제2계명을 포함한 예배를 위한 규정적 원리들이 신약시대에도 우리가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159) 따라서 구약을 근거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확실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Ⅲ. 결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예배의 요소 중 기도와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것은 끝나고 경배와 찬양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구속 즉 창조의 회복과 완성이 이뤄진 뒤에는 더 이상 구속을 위해 기도하거나 가르치고 기억하도록 호소하는 일은 필요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기도하고 가르치는 수고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예배는 기도와 말씀 봉독과 가르침, 찬양의 요소를 중히 여기고 이 일을 위해 힘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