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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시작
한국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개신교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전파된 것은 1985년이 되어서입니다. 이전에도 한국(당시는 조선)에는 여러 경로에 의해서 서구의 개신교 신자들이 발을 디뎠으며, 또한 개신교의 선교사가 들르기도 했고, 한국 땅에 와서 죽음을 당한 선교사도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이미 나라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모두는 그리스도교의 종교가 아직 국가에 의해서 폐쇄되어 있던 때의 경우였습니다.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허용이 된 때는 1883년에 있은 영국과 독일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입니다. 이 조약문에는 비록 지정된 거주지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종교의식을 집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86년에 불란서와 맺은 수호조약에는 그들이 믿는 종교를 전할 수 있는 자유로 해석될 수 있는 ‘교회’(敎誨; 잘 가르치고 타일러서 지난 날의 잘못을 깨우치게 한다는 뜻)라는 문구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1884년 9월 22일에 알렌(Horace N. Allen)이 아직은 서양 종교를 경계하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들을 처형하는 법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서 선교사의 신분을 감추고서 의료선교사로 들어와 활동을 하고 있었고, 1985년 6월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한국 의료선교사로 임명한 헤론(W.J. Heron)이 들어와 협력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1885년 9월 20일에 북 장로교회로 불리우는 미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선교부로부터 직접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파송 받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가 한국에 공식적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들어옴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비로소 자유롭게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미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아펜셀라(Henry G. Appenzeller) 부부도 언더우드 목사와 동행하여 함께 입국을 했었으나, 당시 한국의 상황이 두 달 전인 19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신변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타고 왔던 배로 되돌아갔다가 그해 6월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북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에 의해서 미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되고 서울을 중심으로 의료, 교육 활동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복음 전파가 시작되고, 또한 그리스도인을 얻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장로교회에 국한하여서 보게 될 경우, 언더우드 목사는 복음을 전파한지 1년 남짓이 되는 1886년 7월 24일에서야 첫 신자로 노도사(본명은 노춘경)를 얻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솔내(소래)에 있는 솔내교회(또는 소래교회;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1884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교회)에서 세례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편지를 받고 그곳을 방문하여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솔내교회는 그 다음 해에도 7명이 세례를 받아 10명의 세례 교인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에는 장로교회의 경우 미 북 장로교회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에 의한 복음 전파의 활동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언더우드 목사의 입국이 있은 후에도 그 뒤를 따라 입국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호주 장로교회 선교사, 미 남 장로교회 선교사, 캐타다 장로교회 선교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의 활동으로 장로교회의 신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회 선교사들에 의한 초기의 복음 전파 사역에서는 교단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점차 그 필요성이 점차 대두가 되었습니다. 먼저는, 선교사(목사)의 활동에 있어서 서로 연합하여 회의를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되어 협의기관을 만들었습니다. 헤론 부부(의료선교사)에 의해서 조직된 '미국 북장로회선교회'가 있었으며, 그리고 후에 각 교파에 속한 여러 선교사들이 계속 파송되어 들어오게 됨에 따라 이들이 갖고 있는 선교회의 선교 활동에 있어서 서로 마찰과 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 등의 낭비를 줄일 필요성을 갖고 상호협의를 하고자 해서 선교사들 사이에 협의체가 구성이 되었는데, 먼저 장로교 선교사들 사이에 협의체가 구성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회 선교회인 빅토리아 선교회가 조직한 '장로회선교연합공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 남북 양장로교회 선교회가 조직한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인 총대가 참가하게 되면서 영어만이 아니라 조선어를 쓰는 회(會)가 필요하므로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로교회가 교단으로서 오늘날의 교단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독노회’가 조직됨으로써 입니다. 장로교회는 1907년에 한국에 장로교회가 들어온 지 23년 만에 한국장로교회로서는 첫 조직이 되는 조선전국독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것은 장로교회가 정식 노회의 형태를 갖춘 장로교회 교단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에 장로교회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장로교회 교단이 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된 것은 1907년이지만, 신학교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오고 있었습니다. 장로교회 최초의 신학교가 되는 평양신학교는 1901년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평양신학교의 토대가 되는 신학교육이 1890년부터 행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1890년 가을부터 ‘신학반’(Theological Class)이라는 이름으로 언더우드의 집 사랑방에서 신학교육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좀 더 체계적인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서 1900년 마펫 선교사의 제안에 따라 당시의 장로교선교공의회는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1901년 평양에서 오늘날 평양신학교(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로 불리우는 장로교회 신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장로교회 신학교가 되는 평양신학교는 장로교회가 신자를 얻고 목회자로 육성하는 일을 위해서 장로교회의 교단이 되는 독노회가 조직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옴으로써 사실상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그리고 또한 교단과 더불어 함께 항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 9월 30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으로 인해 일제에 의한 강압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자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신학 또는 고등교육을 받은 신학자들이 1940년 4월 19일 서울에 조선신학교(설림자 김대현)를 세웠습니다. 이 조선신학교는 해방 이후인 1946년 6월 장로회 총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로 승인을 받고 고려신학교가 세워질 때까지 장로회 총회의 유일한 신학교로, 그리고 이후로는 고려신학교의 인허와 인허 취소가 거듭되는 가운데서 총회 인준을 받은 유일한 신학교로 있어 왔습니다.
2.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분열 역사
그런데 장로교회 교단과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신학교는 분열의 역사를 걷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1911년 대구 남문안교회에서 모인 제5회 독노회에서 다음해인 1912년에 7대리회(代理會)를 7노회(老會)로 승격시켜 노회를 조직하여 총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황해노회, 전라노회, 경충노회, 경상노회, 남평안노회, 북평안노회, 함경노회 7개 노회를 조직하고 총회의 모습을 갖춤으로써 그해 9월에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로 제1회 총회로 모여 마침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되는 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면서 많은 교단의 분파를 이루게 됩니다.
1차 분열 : 예장 총회측과 고신측의 분열
한국교회에서 장로교회의 첫 분열인 1차 분열은 1951년에 있었습니다. 장로교회는 일제 치하를 거쳐 6.25사변 속에서 교회 재건에 힘을 씁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협력하여 신사 참배 가결에 협력한 자들과 그렇지 않고 신사 참배를 거부한 자들과의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함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옥한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는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던 자의 권징을 요구하며 대립하여 있는 상태에서 보수적인 장로교회 신학교로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할 것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고 경남노회의 지지 속에서 1946년 7월 제47회 임시노회에서 고려신학교의 인가를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재건운동에 반대하는 자들은 12월에 가진 경남노회 정기노회(제48회)에서 다수의 회원을 확보하여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경남노회는 앞서 결정한 고려신학교의 인허를 취소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고 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경남지역의 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제48회 노회의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측과 그 반대측이 대립하는 혼란 속에 있었는데, 이러한 중에 고려신학교는 전 평양신학교 학생 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박형룡 목사가 귀국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1947년 12월의 경남노회 제49회 정기노회에서 한상동 목사가 탈퇴 선언을 취소함으로 노회와 고려신학교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운영 체제 방식에 있어서 전국적인 노회와 교회의 지지를 받는 총회신학교를 염두에 둔 박형룡 목사에 반하여 한상동 목사는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회와 독립장로교 선교회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신학교를 총회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으므로 이견의 충돌이 생기자 박형룡 목사는 교장직을 고신에서 이탈하여 서울에서 중도보수주의자들과 함께 1948년 5월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고려신학교는 제2대 교장으로 박윤선 목사가 6월에 취임하였습니다. 이에 박형룡 목사와 박윤선 목사가 각각 교장으로 있는 ‘장로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그리고 김재준 목사가 중심으로 있는 조선신학교까지 해서 모두 세 개의 신학교 체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박형룡 목사가 없는 고려신학교는 1948년 9월 경남노회 제49회 임시노회에서 김길창 목사의 주도 하에 다시 한번 인허가 취소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경남노회 제50회 정기노회에서 한상동 목사의 제명동의에 의해 김길창 목사가 제명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는 1949년 3월 8일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신앙과 신조가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 장로교회 노회가 분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로서 첫 번째,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로서 첫 번째로 가진 분열 역사입니다. 비록 이 분열은 총회의 분열에 의한 교단의 분열이 아닌 노회가 분열을 겪은 것이지만, 이것은 이 분열로 해서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의 역사를 걷고, 또한 그렇게 해서 형성된 장로교회의 교단에서 계속적으로 분열을 갖는 시발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1950년 4월의 제36회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다루는 전권을 맡은 총회 특별위원회가 경남노회를 3분(分)함으로써 5월에 경남노회는 모두 5개의 노회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1951년 3월에 개최된 제36회 총회에서 특별위원회가 경남 산분노회파와 중간파를 통합하여 새로운 경남노회를 조직한 별노회를 승인하고 거기서 선출한 총대를 받아들임으로 소위 경남노회(법통)은 여기에 반발하여 불참하였습니다. 그러자 5월에 속회된 총회에서 새로 조직된 경남노회를 받아들이고 기존의 경남노회(법통) 총대는 배제함으로써 경남노회(법통)을 축출하였습니다. 그리고 1952년 4월에 개최된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에서 경남노회(법통)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신학과 그 관계 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선언함으로 경남노회(법통)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남노회(법통)는 따로이 노회를 조직하여 ‘경남법통노회’라고 하였는데, 이들을 일명 ‘고려파’ 또는 ‘고려파장로회’ 라고 부릅니다. 소위 고려파는 1952년 9월 제1회 총회를 진주 성남교회에서 개최하고 독립 총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고려파는 그 후 전국에서 고려파를 지지하는 교회들과 연합하여 1956년 4월 제5회 총노회에서 총노회를 6개 노회를 둔 총회로 개편할 것을 결의함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려)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측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고려측으로 양분되어 두 개의 장로교회 총회, 곧 두 개의 장로교회 교단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려파장로회인 고려측은 고려신학교를 두고 있었으므로 ‘고신측’으로도 불려지며, 지금에는 ‘고신측’이라고만 불려지는데 이는 고려파장로회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이후 ‘고신측’으로 통일함). 이것이 장로교회 교단의 1차 분열입니다.
2차 분열 : 예장 총회측과 기장측의 분열
장로교회 교단의 두 번째 분열은 장로교회 총회 인준을 받은 조선신학교의 분열로 인해서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한번 분열을 경험한 장로교회는 새롭게 총회를 구성한지 1년 만에 다시 분열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해서 세워진 조선신학교는 총회 인준 신학교이지만 ‘신신학’인 자유주의 신학노선이 가르쳐지고 있는 반면에 총회 산하의 교단 목사는 보수주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학 사상과 노선 논쟁으로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47년 4월 대구 총회에서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김재준, 송창근 교수 등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문제 삼아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조선신학교가 고등비평에 입각하여 성서절대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고 주장하면서“ 서울에 새로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탄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함으로 총회는 보수 신학의 교수를 목적으로 1948년에 박형룡 목사를 교장으로 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19468년에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의 제안에 의해서 설립된 고려신학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총회 안에는 모두 세 개의 신학교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고려파에 의하여 고려신학교가 분리되어 나갔지만 그래도 한 총회 안에 두 개의 신학교가 존재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총회에 큰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총회 안에 신학 사상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신학교가 존재하므로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으나 두 신학교 사이에 갈등의 큰 골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총회는 두 신학교를 해결하고자 1951년 5월 제36회 총회에서 두 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의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결정에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이에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는 김재준 목사를 제명 처분하고, 조선신학교 학생은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조선신학교 출신의 영향력이 강한 경기노회가 1952년 5월 노회에서 총회의 불법 결의를 부인한다는 성명을 내고, 동년 9월에는 대구에서 조선신학교측을 지지하는 신자들이 호헌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는 제36, 37회 총회의 결의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면서 김재준 목사의 파면을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선신학교측은 1953년 6월 조선신학교에서 법통 38회 총회를 개최하고 교단과 단절함으로써 교단과 완전히 분열하였습니다. 그리고 1954년 6월에는 교단 명칭을 일명 ‘기장측’으로 불리우는 ‘대한기독교장로회’(후에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바뀜)로 명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장로교회 교단의 2차 분열이며, 조선신학교는 ‘기장측’ 총회신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기장측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측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와 ‘고려파측 신학교인 ’고려신학교‘와 함께 각각 장로교회 교단의 신학교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3차 분열 : 합동과 통합의 분열
장로교회(총회측)는 고려파측과 기장측이 분열되어 나가는 분열의 역사를 겪었으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시 1959년에 분열하였습니다. 이때의 총회측 교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진보적 성격의 목사와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 세계복음주의친교회)에 참여하는 보수적 성격의 목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NAE측의 목사는 WCC가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기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항하여 당시 총회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목사가 학교부지구입을 부정 지출하여 사기당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을 빌미로 WCC측 목사는 박형룡 교장의 면직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NAE측 목사는 박형룡 목사가 학교를 위하여 일하다 생긴 실수라며 일축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1958년 제43회 총회는 박형룡 목사의 교장 사임을 결정함으로써 마무리 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두 파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다가 1959년 제44회 총회에 파송할 총회 대표 선출 문제로 경기노회가 갈라짐으로써 교단 분열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59년 5월에 열린 경기노회에서 뽑은 총대 선거에 부정이 있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같은 해 6월에 임시 노회를 열어 새로 총대를 선출하였는데, 5월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NAE측의 목사가 많았으나 임시노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총대는 WCC측의 목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총대 명단이 1959년 9월 대전 총회에 동시에 제출되었는데 어느 쪽의 총대를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총회장 선출을 비롯한 영향을 받게 되는 결정이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로 대립하여 물러서지 않는 격렬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총회는 11월 2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를 하였는데,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목사들이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해서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을 연동측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WCC측 목사들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승동교회에서 속회를 목사들은 승동측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NAE측 목사로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할 것”을 가결했습니다.
이 일로 서로 다른 각각의 총회를 속회하므로 승동측과 연동측의 총회로 분열되고, 이 둘은 1960년 총회부터는 완전히 서로 다른 교단으로 분열되어 ,승동측인 NAE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일명 보수파, 또는 NAE 복음주의 동지회파 라고도 함)으로, 연동측인 WCC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일명 진리파 라고도 함)으로 각각 불려 졌습니다. 특히 승동측이 합동측으로 불려지게 된 데는 고신측과 1960년 합동한데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 고신측은 승동측과의 합동으로 양측간의 학교를 통합하는 일로 인해서 고려신학교를 폐합하고 서울 총회신학교(장로회신학교)로 옮기게 한데 대한 반발과 갈등으로 1963년 9월에 승동측과 갈라져 환원함으로(교단의 환원으로 고신측은 ‘환원파’라고도 불리운다) , 남은 승동측은 합동측으로 불려진 대로 그대로 ‘합동측’으로 계속 불려 졌습니다.
그리고 총회의 분열에 의한 교단 분열은 신학교의 분열도 가져와 합동측 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신학교’로 통합측 신학교는 흔히 ‘장신측 총회신학교’로 불려지는 ‘광나루 총회신학교’로 각각 존재해 왔습니다. 장로교회 교단이 이렇게 됨으로써 교단에 속한 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신학교, 장신측 총회신학교, 고려신학교, 조선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가 1957년 교회당 소송 문제에 대한 반대를 제기하고 교장직을 사표낸 후 떠나 서울에서 ‘개혁신학원’을 세웠으나 그해 9월에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복귀를 하였습니다.
4차 분열 : 합동(예장총회 승동측 및 고신측의 합동)과 대신의 분열
예장총회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하여 ‘합동측’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 교단에 있는 목사들이 1961년에 분리되어 나가서 예장총회 성경장로회를 세움으로 합동측은 분열을 겪었습니다. 에장총회 성경장로회는 김치선 목사가 중심으로 있는데, 김치선 목사는 1948년 8월 남대문교회 안에 야간 신학교로 대한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생을 양성하여 오고 있었다가 미국의 성경장로회 선교회의 지원 속에서 1960년 9월에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창립하고, 1961년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독자적인 장로교회 총회를 형성함으로써 대신측 교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교단 총회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성장측; 성경장로회를 줄인 말)으로 변경하였다가 1971년 제7회 총회에서 다시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대신측으로 불리우는 이 교단 총회는 대한신학교를 총회 인준 신학교로 두고서 신학생을 양성 배출하였습니다. 현재는 총회 인준 신학교로 여러 학교를 두고 있는데, 대한신학교(대신총회신학연구원)를 비롯하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안양대신대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장총회 대신측도 1992년에 분열하여 각각 주류측과 비주류측으로 존재해 오고 있으며, 비주류측도 독자적으로 대한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5차 분열 : 합동(예장총회 승동측 및 고신측의 합동)과 호헌의 분열
WCC를 반대하는 목사들은 숭동교회에서 교단의 활동을 위하여 NAE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측 교단과 합동하여 일명 '합동측'으로 이어 오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1962년 9월 제47회 총회 때 다시 총회가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합동측 그대로 ,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호헌총회로 명칭을 달리하게 됨으로써 합동과 호헌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합동측과 분열한 호헌총회는 총회 직영 신학교로 호헌총회 평양신학교를 두었으며, 1978년 63회 총회에서 일명 호헌총신으로 불리우는 ‘호헌총회신학교’로 학교 이름을 바꿨습니다.
6차 분열 : 합동(예장총회 승동측)과 고신의 재분열
(1) 합동과 고신의 재분열
장로교회 총회측이 승동측(합동)과 연동측(통합)으로 분열한 후 앞서 언급한대로 승동측은 고신측과 1960년에 합동하여 예장총회 ‘합동측’으로 있었으나 1963년에 고신측이 탈퇴하여 환원함으로써 합동측은 전(前) 예장총회 승동측만 남게 됨으로써 예장총회(합동)로부터 고신이 재분열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 고신과 ‘반고소 고려파’의 분열
예장 고신은 승동측으로 불리우는 합동측과 합동하여 일시적으로 ‘합동측’으로 있었으나 여기서 다시 분열하여 고신측으로 환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환원 후 고신은 교단의 교권주의와 고신대학교 문제로 분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한상동 목사가 계속해서 총회장을 맡아 고신 총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교권주의에 대한 반발과 고려신대학교의 재산권 문제에 의한 정치적인 싸움으로 인해서 입니다. 이 일로 고신은 환원파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다가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석원태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서 고신측을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세웠는데 그 교단이 ‘반고소 고려파’로 불리우는 ‘고려측’입니다.
7차 분열 : 합동과 합동보수의 분열
(1) 합동(주류)과 합동보수(비주류)의 분열
승동측(합동측)과 연동측(통합측)으로 분열을 겪었던 예장총회(예장총회 잔류파 승동측)는 고신측과 합동을 했었으나, 고신측이 환원함으로 합동측으로 남게 된 장로교회 교단이 되었는데, 복음의 이해와 성경 해석의 방법에 있어서 진보적인 신학 사상의 성격을 띠는 합동진보측으로 인해서 보수적인 신학 사상의 성격을 띠는 합동보수측간에 의견 대립과 충돌이 있게 되어 1979년 9월 대구 총회에서 합동진보측이 합동보수측을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합동보수측은 대구 은일교회에서 별도의 총회를 개최함으로 합동측은 다시 분열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교단의 세력을 장악한 파와 여기에 반발하는 소외된 파 간의 세력 투쟁이 원인입니다. 한상동 목사와 그 이후 정규오 목사로 이어지는 교권의 실세에 대해 이영수 목사를 비롯하여 소외되어 있던 자들이 힘을 합쳐 교단의 세력을 장악함으로 인해서 정규오 목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비주류’를 형성하여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독자적인 총회를 이루었습니다. 이 합동 비주류의 총회를 ‘합동보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영수 목사의 남은 계열의 합동 주류측은 그대로 ‘합동’이라고 부릅니다. 합동보수측은 홍은동에 교단 총회의 소재로 두고서 그곳에 ‘홍은개혁신학연구원’을 세웠습니다. 홍은개혁신학연구원의 설립으로 장로교회 교단 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신학교(후에 사당동 총회신학대학교로 바뀜), 장신측 총회신학교(후에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바뀜), 고신측 고려신학교(후에 고신대학교로 바뀜), 기장측 조선신학교(후에 한신대학교로 바뀜), 홍은개혁신학연구원, 호헌총회의 호헌총회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2) 합동보수(합동 비주류)와 합동개혁의 분열
장로교회 총회측이 합동 주류측인 합동측과 합동 비주류측인 합동보수측으로 분열된 뒤인 2년 후에 비주류측인 합동보수는 다시 그 안에서 내부적인 분열을 보여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보수측‘(현재 홍은동 소재 총회)과 호남세를 중심으로 한 '합동 개혁측'으로 분열됩니다.
(3) 합동보수(합동 비주류)와 기타 교단의 분열
합동보수인 합동 비주류측은 합동개혁과의 분열을 가진 후에도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함에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 교단은 합동, 통합, 고신, 대신, 기장, 호헌, 개혁, 합동보수 외에 수많은 교단을 형성하여 오늘날에는 장로교회 교단만도 80여개 교단이 넘는 실정에 이르러 있으며(이 숫자는 전에 한 글에서 본 것이며 그 후 더 많은 장로교회 교단이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기에 장로교회 교단의 숫자는 전보다 더 많은 그 이상일 수 있다), 그에 따라서 교단의 총회 직영 신학교 이름도 그 수만큼이나 많게 되어 소위 군소교단 신학교가 양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8차 분열 : 합동과 합신의 분열
예장총회 합동(주류)는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견지하는 중에서 거듭되는 분열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또 다시 분열하는 사태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교권주의자들의 간섭을 거부하고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계승할 것을 이유로 하는 목사들이 박윤선 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1980년에 설립 개교한 합동신학원(지금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총회를 소집할 것을 합의하고 1981년 9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총회를 소집함(제66회 총회로 소집)으로써 예장총회 합동은 일명 ‘합신’과의 분열을 겪었습니다.
3.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분열 이유
지금까지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분열 역사와 그와 함께 하는 신학교의 분열 역사를 보았습니다. 신학교는 교단 총회의 존재와 함께 따르기 때문에 장로교회 교단 수만큼이나 거기에 속한 신학교의 수도 존재를 합니다. 그러기에 님이 알고 있는 고신, 총신, 장신, 대신, 합신의 교단(신학교) 이름은 한국 장로교회 교단 중에서 대체적으로는 전국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것인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는 교단의 교세가 크건 작건 간에 교단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각 교단은 교단의 실질적인 정체성을 떠나 교단의 세력과 그 확장을 위해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 교단이 이렇게 자주, 그리고 또한 많이 분열하게 된 분열 역사에 대하여 이를 평가하는 분들은 분열 초래의 이유를 많은 복합적인 원인들에서 찾으며 이것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그러한 것을 크게 보면 다음의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일제의 신사 참배 동의자와 거부자 간에 생긴 신학 사상의 노선 이해 관계는 이후 이것이 종자 씨의 역할을 하여서 교단의 분열에서는 항상 진리와 비진리, 진보와 보수, 법과 은혜로 양분되는 견해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사실상 근본적인 이유는 교단 내에서의 목사들 간에 갖는 정치적이고 이해 계산적인 세력에 의한 싸움의 투쟁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