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정원
- 황석영
- 창비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는 작가는 이유가 있다. '오래된 정원'을 통해 나는 중견작가의 무거움과 따라갈 수 없는 깊이를 읽었다. 또한 글을 쓰기 위해서 왜 다른 이의 훌륭한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하는지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전에 '대한민국사'를 읽으면서도 내가 몰랐던 한국 근현대사의 다른 부분을 많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마치 똑똑한 선배로부터 세미나를 통해 배우는 것과 같았다면, 이번 '오래된 정원'을 읽으면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절을 살아 낸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그 아픔을 피부로 느끼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그의 글 안에 문학의 위대함이 오롯이 살아있지 않은가.
이야기는 주인공 현우가 갈뫼로 숨어들었다가 이 후 끝내 검거되기까지 제법 긴박하게 서술되지만 그가 감옥에 갇히고 난 후로부터 매우 느려진다. 물론 다른 주인공인 윤희의 바깥에서의 삶은 몇년 단위로 빠르게 진행되고 그 친구들의 삶도 잡히기 전의 현우만큼 긴박하지만 나는 어쩐지 감옥 안에서의 현우에 시선이 맞추어져 세월의 속도가 달팽이 기어가듯 느리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그가 좁은 독방에서 작고 네모진 화장실 창으로 하염없이 바깥을 내다보고 선 듯이 말이다. 아마 나는 현우의 수인 생활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버린 모양이다.
그러니 치명적이게 슬픈 장면이 없는데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가 두어번 있었다. 기약없이 갇혀 있는 자로서 끝간데 없이 나약해지는 안쓰러운 인간의 영혼이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육체를 말려버린 단식투쟁 중 머릿속 세상만 또렷이 남아 어린시절 기르던 집개를 회상하는 장면이라거나, 감옥 안 수인들이 주변의 어린 것들을 거두어 먹이며 정을 붙이는 장면에서는 뜨거운 것에 가슴이 데인 듯 눈물도 함께 솟았다. 수인들은 참새라거나 고양이, 심지어 생쥐나 곤중마저도 잡아다가 - 작가는 그것들을 '감옥 주변의 미물들'이라고 표현했다 - 정성으로 길러낸다. 그 고독한 마음들이 하나의 어린 생명에 정을 붙이고 손이 타도록 길러내는 것은 결국엔 인간의 본능이지 않을까. 그러니 그것들을 정성을 돌보다 죽어버렸을 때 그 쓸쓸한 마음들이 느꼈을 박탈감과 상처에 내 마음이 다 쩌르르 아파왔다.
소설을 통해서 보자면 아직 우리는 이루어낸 것은 매우 미약하고 대부분은 실패했다. 전 세계를 관통하는 거대한 자본주의에, 스스로 변태하며 더 점점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그 괴물에 대단히 혐오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 작가는 아직은 모든 것이 진행중이라며 이야기를 끝내고 있다. 우리가 계속 살아나가듯이 말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 사회주의가 일제히 몰락했을 때 나는 이십세기가 끝나는 현장을 보면서 이러한 이행기를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온 작가로서뿐만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도 삶을 통하여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 중략 -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다시 출발할 것이다.' - 작가 후기 중
첫댓글 이학년때 박상철한테 야너재밌게읽은소설좀추천해봐하니 이걸 얘기해주길래 학교도서관에서 빌려다가 휘리리릭 읽어버렸습니다. 황석영이라곤 심청밖에 읽은게 없던 당시의 저는 이것도 야설인가 싶었는데ㅋㅋㅋ아름답기만 하더군요.
손님을 한 대여섯번쯤 읽으려다 첫 10페이지를 못넘기고 아 안맞네 하고 집어 던지길 수차례 하다 영화 나온다길래 후다닥 빌려 봤더니 문체가 참 곱고 여성적이면서도 아오 그 막 웅어리 지고 이런걸 가슴에 품으면서 담담한척 하고 이러는게 읽으며 수차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네요(아닌가;) 영화화한 임상수도 미치신 양반인데 영화로 보는 재미도 좋더군요.(흥행대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