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결정적인 위사(僞史)들(3)(마지막)
현재까지 알려져 있기로는 요(遼)의 남경(南京)이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다고 한다. 또 당(唐)의 유주(幽州) 대도독부가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구당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幽州)는 당(唐)의 경사(京師)인 장안(현 서안)에서부터 동북 2,500리, 동도(東都)인 낙양에서부터1,60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영주(營州)는 장안에서부터 3,589리, 낙양에서부터 2,91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앞서 (2)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척 1리=540m, 굴곡지수χ=1.725를 적용하면, 유주와 영주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유주와 영주(근거:『구당서』, 위사임)

즉, 당의 유주가 있던 곳에 요 남경이 있었으며, 그 위치는 현재까지 북경시로 알려져 있는데, 『구당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인근지역으로 나타나며, 영주는 현재의 하북성 승덕시 인근지역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유주와 영주의 위치가 『구당서』지리지에 기록된 것과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청(淸) 대에 제작된 『대청광여도』에 따르면, 유주와 영주가 [그림 2]와 같이 표기되어 있다.
[그림 2] 유주와 영주(근거: 『대청광여도』, 위사임)

즉, 유주는 현재의 북경시에 표기되어 있으며, 영주는 현재의 요령성 북진시에 표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대청광여도』에도 유주와 영주의 위치가 『구당서』지리지에 기록된 것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만약 당(唐)의 유주와 요(遼)의 남경이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다면, 앞서 (1)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요(遼)의 동경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요령성 요양시에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 3] 요 남경과 동경

그러나 요(遼) 남경과 동경의 위치가 현재의 북경시와 요령성 요양시가 될 수 없음을 『삼국사기』 지리지가 입증해 주고 있다. 즉, 비록 『삼국사기』가 1512년에 뜯어 고쳐졌지만, 요소요소에 감추어져 있는 내용들이 올바른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근거와 논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사신이 요(遼) 동경에서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이틀 가면 의주(醫州)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서 요(遼) 남경[南京, 연경(燕京), 연계(燕薊)]에 바로 이를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요령성 요양시에서부터 북경시까지 당척 1리=540m와 굴곡지수χ=1.725를 적용하면, 직선거리가 약 580km로서 실제 이동거리는 1,853리에 달한다(아래 공식 참조).
요양에서 북경까지 직선거리 580km÷540m/리×1.725=약 1,853리(실제 이동거리)
하루이틀은 잠을 자지않고 이동할 경우 약 24시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의주에서 북경시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요양시에서 의주(醫州)라는 곳까지 과연 하루이틀만에 갈 수 있는 거리이겠는가?
과연 그 당시 이동속도가 어느정도이었겠는가?
그런데 이 또한 『삼국사기』에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隋) 양제의 군사들이 을지문덕의 꾐에 빠져 장안성(長安城) 인근 살수(薩水)까지 쫓아갔다가 매복에 갇혔음을 알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나오는데, 30만명 중에서 겨우 2,000명만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낮 하루 밤에 걸쳐 모든 군사장비들을 버리고 정신없이 도망쳐 나오는데 살수에서 압록수까지 450리였다고 한다. 하루 낮 하루 밤은 대략 24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조금도 쉬지 않고 이동했을 경우, 시간당 약 19리(약 10km)를 이동한 셈이다. 이는 현대 정상급 마라톤 선수가 뛰는 속도의 약 절반에 해당하며, 현대 정규군 이동속도의 약 2배에 해당한다.
즉, 현재의 요양에서 북경 인근지역(의주)까지 쉬지않고 이동한다면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약 4.1일이 걸려야 하는 거리임을 알 수 있다.
1,853리÷450리/일=4.1일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근거로 말미암아 현재의 북경시와 요양시는 요(遼)의 남경과 동경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는 게 아닌가?
또한 당(唐)의 유주도 현재의 북경에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삼국사기』가 1512년에 재간행되면서 뜯어고쳐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사관(史官)들이 동방(東邦)의 역사를 되살려 낼 수 있는 근거와 논리들을 남겨놓았으므로, 『삼국사기』는 우리 민족의 보물 중에서도 보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앞서 (2)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요사』에 따르면, 요(遼) 남경이 있었던 곳을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신당서』지리지 안동도호부에 따르면, 연군성에서 서쪽으로 180리 거리에 영주(營州)가 있었으며, 동쪽으로 500리 거리에 안동도호부가 있었다고 [그림 4]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4] 안동도호부(근거: 『신당서』)

연군성은 진(晉) 대의 연국(燕國, 광양군)으로서 당(唐)의 유주(幽州)와 요(遼)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앞서 (2)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요(遼) 남경(南京)의 본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4]의 연군성을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에 위치시키면,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둔유현에서 서쪽 180리 거리에 있는 현재의 산서성 안택현을 영주(營州)로 추정할 수 있으며, 동쪽으로 500리 거리에 있는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에 안동도호부(요동고성)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5] 영주, 유주, 요동성(안동도호부) 등(근거:『신당서』)

또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요동고성(고구려 요동성)에 두었으며, 요(遼)는 동경 요양부를 요동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바로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주변 지역이 요동임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요동고성을 고구려 요동성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고구려 요동성이 바로 현 하북성 한단시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遼) 남경의 본래 위치와 당(唐)의 안동도호부(또는 요 동경)를 두었다는 고구려 요동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앞서 [그림 4]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당서』에서 연군성, 즉, 요(遼) 남경에서부터 동경(고구려 요동성)까지 500리라고 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하루이틀만에 갈 수 있었다는 거리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여기서 의주(醫州)는 바로 현재의 둔유현 동쪽 인근에 있는 로성시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도리해구, 박작성, 평양성 등의 위치는 위사(僞史)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동도호부(도는 요 동경)가 마치 현재의 요령성 요양시에 있었던 것처럼 안동도호부로부터 도리해구, 박작성, 평양성 등의 방향을 바꿔치기해 놓았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진국(발해) 상경 용천부와 개모성, 신성, 건안성 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끝으로 『삼국유사』발문(跋文)은 국사와 유사를 같이 거론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발문을 겸하고 있는데, 동 발문에 기록되어 있는 아래 내용을 우리 역사를 경애(敬愛)하며 민족의 미래를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분들과 함께 음미하고자 한다.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러한 이치를 알아 때가 되어 일어나면, 동방(東邦)의 역사를 영원히 전하여 줄 것을 후세에 나타날 은혜로운 학자들에게 간곡히 바란다(亦有望於後來之惠學者云)"
학자를,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유세계가 놀랍기도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이 후세에 나타날 혜학자들에게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밀코드를 심어 놓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