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10월 다라니기도에 참석했다.
5년전 부산 여래사와 인연
불교대학·산사순례로 발전
명상 때 흘러내렸던 눈물
일일수행 등 불연 깊어져
축원문을 찾아도 없기에 그냥 기도를 했다. 박동범 부산불교교육원장이 병중에 있는 남편을 염려했다. 그동안 참석하지 못한 나와 남편을 위한 축원을 해주고 있었다. 지금도 귓가에 그 축원이 맴돈다. 참 감사하다.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로 삼고, 선한 인연이 법보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글을 쓴다.
부산 여래사와 인연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덕행 법우 소개로 사찰답사 일정에 동참해 박 원장과 함께 수덕사를 다녀오면서부터였다. 그때 박 원장이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흔들리는 버스에서 인사할 때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앞에 서서 모두를 보니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전생이든 그 전생이든 언젠가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들처럼 친근했다. 2년이 지났고 여래사불교대학을 다니게 됐다. 108산사순례도 동참했다. 5년 전 사찰답사 당시에는 지도법사로 스님이 동행했는데, 경률 스님이라고 했다. 불교대학을 다니기 위해 다시 여래사를 찾았을 때에는 스님을 뵙지 못했는데 이후 108산사순례로 직지사를 찾아갔을 때 다시 뵙게 되었다.
경률 스님은 우리를 위해 10분 명상을 직접 지도했다. 명상을 하는 동안 자기 마음을 살펴보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무슨 인연일까. 돌이켜봐도 잘 모르겠다. 잠깐 눈을 감은 순간, 눈물이 흘렀다. 주체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나니 왠지 가슴 한 구석의 후련함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불교는 내게 더 깊게 다가온 것 같다.
깊어진 불연과 달리 일상은 늘 바빴다. 살아가는 그 치열함 가운데 불교대학에 다니는 것은 조금의 위로인양, 또 보상인양 느껴졌다. 불교공부를 하면 할수록 어떤 마음이 샘솟았다. 늘 지쳐 하루를 마감하기 바빴던, 그렇게 살아가는 지금의 삶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다는 발원이 생겼다.
특히 한 가지 수행법은 꾸준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반들의 제안으로 2년 전 용기를 냈다.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08배를 일과수행으로 정했다. 매일 108배를 한다는 것이 일을 하는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다. 수행하면 어떤 게 좋고 어떤 점에서 이롭고 어떤 부분에서 긍정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등 주변의 독려는 스쳐가는 말일 뿐이었다.
수행의 공덕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매일 목표한 바를 완성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루하루 108배를 이어가던 중 일(?)이 터졌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교통사고를 경험했다. 딸과 함께 모처럼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경사로에서 자동차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속도 제어가 되지 않는 차량의 핸들을 간신히 꺾었다. 큰 충돌과 함께 차량은 정지했다. 천만다행으로 맞은편에 오는 차량이 없었고 딸과 나 모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자동차는 폐차를 시킬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간단한 찰과상과 통증 이외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했다. 그 순간 108배가 떠올랐다. ‘수업 시간에 항상 듣던, 주변 도반들이 수없이 얘기하던 수행의 공덕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있는 것인가….’ 사고를 수습하면서 감사한 마음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무릎의 통증으로 인해 108배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대신 불교대학 졸업식 때 선물로 받은 신묘장구대다라니 사경집을 꺼내 들었다. 막상 사경을 한다고 펼치긴 했지만 붙들지 못했다. 수행은 결코 쉽게 습관으로 젖어들진 않았다. 결국 완성을 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긴 나날을 보내던 중 지난해 여래사에서 다라니 기도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등록을 했다. 첫 다라니 기도수행의 날을 잊을 수 없다. 매월 첫 번째 주 화요일 저녁마다 ‘천수경’의 원본경전을 읽으며 외우는 1시간 동안의 다라니 주력을 포함해 2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계속 말을 해야 되는 수행이기에 당연히 물을 많이 마시게 될 것이라는 짐작에 녹차를 가득 담아 가지고 법당에 올라갔다. 그런데 나의 짐작은 빗나갔다. 2시간 수행하는 내내 물 생각이 나지 않았고 오히려 입안에는 달달한 침이 고여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평소보다 더 부지런해지는 날이 있다.
수행에 의기양양하던 중
남편 병마 소식으로 상심
간절히 다라니기도·사경
불교로 오는 남편에 감사
다라니기도를 하는 날이다. 곧잘 미뤄두곤 하던 설거지도 즉각 해결한다. 다라니기도가 있는 날이면 오히려 시간을 더 아껴 쓰게 됐다. 미루던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면 쌓이던 피로도 물리칠 수 있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을 넘겼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매월 다라니기도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차츰 수행이 무르익어간다는 느낌도 있었다. 수행하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면서 의기양양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나름 ‘새로운 나’를 만난 느낌에 젖었다.
쉽게 부서지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겐 결코 없는, 아니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여겼는데…. 불현듯 남편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부처님 가르침을 더 알고 싶어 입학한 불교대학. 그때 남편은 너무도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남편은 불교라는 종교가 그저 샤머니즘, 그러니까 기복신앙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아무리 유명한 천년고찰에 가더라도 법당에 발 디디는 것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매사에 늘 강했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인생을 뚜벅뚜벅 걸어가며 개척해온 사람이었다. 그런지라 남편도 나도 병마가 왔다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편은 많이 힘들어했다. 상심이 누구보다 컸으리라. 늦은 밤 훌쩍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기도 했었다.
시간이 무심히 흘렀고, 상심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은 달라졌다. 조금씩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시간을 내 불교대학으로 수업 들으러 가는 나를 인정해줬다. 언제였던가. 남편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불교대학이나 절에 가면 그저 마음속으로 되뇌는 말이었다고 했다. “우리 마누라 절에 다니는 거 아시지예? 부처님!” 그만 웃음이 났다. 남편과 함께 웃었다.
점점 불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추석이었다. 놀랍게도 남편이 선뜻 이야기를 꺼냈다. 고향에 있는 다솔사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평소 산소에 가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먼저 절에 가자고 한 적 없었던 남편이었다. 그런 그가 절에 가자는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내게는 상상하지도 못한 큰 변화였다. 어쩌면 변화는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집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사경을 할 때 남편은 어깨너머로 내가 쓰는 다라니를 보고 종종 읊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이 이렇게라도 다라니를 읽을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그 정도로 남편은 내 의지와는 달리 좀처럼 불교에 다가오지 않던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남편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반가웠다. 기복신앙이라고 치부하던 남편이 절에 가자는 말을 꺼낼 땐 청량한 가을바람이 스쳐가는 것 같았다.
절로 향하는 길을 꽃이 반겼다. 코스모스가 핀 둑길을 따라 남편과 걸었다. 절에 도착했지만 남편은 주춤거렸다. 아직 법당에 발을 들여놓기가 낯선 모양이었다. 그래도 찬찬히 경내를 거닐었다. 남편의 시선이 멈춘 곳이 있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전탑을 한참 지긋이 바라봤다.
불교대학에서 수업 받을 때 수다처럼 되뇌곤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편이 절에 오면 성불하는 거야.” 농담처럼 했던 말인데 남편과 절을 찾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머지않아 남편이 부처님 전에 삼배로 절을 하며 예경하는 날이 오리라 여긴다. 그리고 불교는 자기성찰의 종교이며 하심의 종교이자 실천의 종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날도 곧 오리라 믿는다.
부처님의 가피가 있다면 지금 현재 나에게 닿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병마가 이만하기가 얼마나 다행인가. 무엇보다 아프고 나니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린 것 역시 가피일 것이다. 나 역시 남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한다. 원망이나 아쉬움이 없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하는 이 순간을 감사하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조금씩 불교에 대해 마음을 열어가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돌아오는 다라니기도 날짜를 손꼽아 본다. 지금에 감사하며 남편이 병마를 잘 견딜 수 있기를 부처님 전에 기원 올린다. 항상 격려해주시는 부산불교교육원장과 소중한 도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삼보에 귀의한다
/ 능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