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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行書란
흔히 행서는 해서를 조금 흘려서 이어지듯 쓰는 서체라고 한다. 그러나 행서는 원래 해서나 초서와 함께 예서로부터 출발하여 한나라 이후 독립 서체로 발전되었으며 실제 해서에 앞서 정비된 서체이다. 행서는 초서와 함께 전서나 예서에 비해 좀더 자유롭고 비정형적이기 때문에 글씨의 예술적 영역을 넓히는 주된 역할을 맡아 왔다. 전통적으로 동한시대의 유덕승(劉德昇)이 행서의 창시자로 전해오지만,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초기의 명서가는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종요(鍾繇)와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이다. 이들의 행서는 서예사에 오랜 기간동안 전형적 모범으로 여겨져왔으며, 그들의 해서와 함께 원․명대의 대표적인 복고주의 서예가들에 의해 고법(古法)의 핵심으로 귀중하게 여겨졌다.
2. 唐나라 이전의 행서
<鍾繇 - 삼국시대 魏나라> 종요의 행서 필적은 후대에 새겨진 각첩으로 전한다. 종요가 국가의 전승을 축하하고자 임금에게 올린 (賀捷表)가 그 예이다. 행서의 초기 발전 단계에 해당되는 필적이기 때문에 뒤에 정비된 왕희지 등의 행서와는 상당히 다른 요소가 있다. <왕희지 - 동진> 왕희지의 행서 필적으로는 「난정서(蘭亭序)」,「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홍복사단비(弘福寺斷碑)」 유명하다. 「난정서」는 이미 진적이 없어진 지 오래이고, 당나라 태종 때의 명서가와 모사(摹寫)전문인이 베낀 임모본이나 후대에 모각한 각본이 전할뿐이지만, 여러 예가 전하므로 왕희지 행서의 장법이나 운필의 특징을 살피는 데에는 충분하다.
3. 唐나라 행서
<초당(初唐)> - 우세남(虞世南)의 행서 필적으로는 「여남공주묘지명(汝南公主墓誌銘)」이 있으며, 구양순(歐陽詢)의 필적은 「사사첩(史事帖)」등이 있다. 저수량의 필적으로는 「고수부(枯樹賦)」가 있고, 당태종(唐太宗)의 필적으로는 「온천명(溫泉銘)」과 「진사명(晉祠銘)」이 전하는데, 당태종의 書는 왕희지 서예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당(中唐)> - 이 시기에는 문학, 예술등이 문화면에서도 귀족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것으로의 전환하는 기운이 일고 있었다. 이옹(李邕)의 행서 필적으로는「이사훈비(李思訓碑)」가 있으며, 안진경(顔眞卿)의 필적으로는 「제질고(祭侄稿)」와 「쟁좌위첩(爭座位帖)」이 있다.「제질고」는 안록산(安綠山)의 난으로 살해된 조카 안계명(顔季明)의 영령을 추모한 제문으로 당나라 명서가의 진적으로는 매우 드문 예이다. <만당(晩唐)> - 이 시기에는 안록산의 난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삶의 생기를 잃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는 것만이 고난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화려하던 盛唐文化도 자연히 침체해 버렸다. 안진경에 이어 새로운 꽃을 피운 사람은 유공권(柳公權)을 들 수 있다. 그의 행서 필적으로는 왕희지의 風인「성자첩(聖慈帖)」,「욕문첩(辱問帖)」이 있다. 이 사람들 외에 행서의 필적으로서는 정심즉의 「죄징장래목록발(最澄將來牧跋)」, 두목의 「장호호시병서(張好好詩幷序)」, 임조의 「심위첩(深慰帖)」 등이 빛나고 있다.
4. 宋나라 행서
초기의 약 610년간은 특별한 진전이 없었다. 반세기를 지날 무렵부터 학문예술이 성행하여 이 시대 특유의 문화가 생겨났다. 서예는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인간성을 천진한 모습대로 표현하고 거기에 개인의 성품이나 인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겼다.(개성-意중시) 이른바 <宋四大家>라고 하는 채양(蔡襄),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불(米불)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행서에서 일가의 성취를 이루었다. 채양은 楷, 行, 草를 다 잘 썼고, 그 중에서도 행서가 가장 뛰어 났다고 한다. 미불의 필적으로는 「촉소첩(蜀素帖)」, 「소계시(소溪詩)」가 있으며, 황정견과 소식은 自由淸新하고, 진실한 인간성을 書를 통해서 독창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 황정견의 필적으로는 「송풍각(松風閣)」,「동파한식시발(東坡寒食詩跋)」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식의 필적으로는「황주한식시(黃州寒食詩)」가 있다.
5. 元․明나라 행서
원나라의 서예에 있어 조맹부(趙孟부), 선우추(鮮于樞, 1257?~1302년) 등의 복고주의 서예가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해서뿐만 아니라 행서와 초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맹부의 필적으로「작돌천시」,「한거부(閒居賦)」,「주자감흥시(朱子感興時)」,「난정십삼발(蘭亭十三跋)」,「낙신부(洛神賦)」,「지제기(止齊記)」,「행서천자문(行書天字文)」등이 있으며 선우추의 필적으로는 「투광고경가(透光古鏡歌)」가 있다. 명대에는 좀더 오래된 행서풍을 추종하는 복고적 서예가 유행되면서 북송시대의 행서풍이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소식의 행서풍을 따랐던 오관(吳寬, 1436~1504년) 황정견의 행서풍을 수용하였던 요수(1423~1495), 심주, 문징명, 미불의 행서풍을 따랐던 동기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문징명의 필적으로는 「과정복어십절(過庭復語十節)」,「차적원기(且適園記)」등이 있다.
6. 明末․淸나라 행서
이 시기의 약 120년은 정정불안과 인심 혼란의 시대였다. 이러한 세태에서 학술문예면은 도리어 융성을 극해, 서도 새로운 길을 걷고 있었다. 즉, 중기를 풍미한 문징명 일파에 반항해 권위를 버리고 다시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모습을 표현하려고 한 시대로 그 선구자는 동기창(董其昌)이다. 동기창의 필적으로는「행초서권(行草書卷)」, 「항묵림묘지명(項墨林廟誌銘)」, 「주덕송권(酒德頌卷)」 등이 있다. 송대의 표출주의(表出主義)의 탄생이후 南宋으로부터 元으로 또 明으로 반고전(反古典)의 바람은 확산되어 간다. 원의 조맹부(趙孟부)이나 明의 문징명(文徵明) 같은 훌륭한 고전주의 작가가 나타나서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반고전의 운동은 끊임없이 생겨나 명말에는 낭만주의(浪漫主義)의 흥성과 더불어 草書의 기법인 연면세(蓮綿勢)의 도입과 金石學의 행서 필법에의 도입등이 나타난다. 명말의 낭만주의는 해서 필세인 연면세를 행서에까지 도입하여 행서의 신경지, 즉 楷書적 구성을 초월하여 유동감을 가미하게 된다. 이 신경향은 명말부터 청초에 걸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청대에서는 老古學古文書學의 한부분이라 할 수 있는 금석학의 필세에의 도입이 시도된다. 이러한 시도를 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조지겸(趙之謙)으로 古法을 사랑하는 자의 눈에는 '파괴의 무법자'로 보여 많은 배척을 받았다. 원래 북위의 石刻이라면 해서로 극한되는데 그는 여기서 찾아낸 유형을 다시 행서의 형까지 끌어들여 북위의 석각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지성으로 새로운 행서를 등장시킨다. 조맹부의 출현은 중국적 현대의 출발을 의미한다. 이밖에도 명말 청초의 혼란기에 나타난 사람들은 장서도(張瑞圖), 황도주(黃道周), 왕탁(王鐸), 예원하(倪元瑕), 전산(傳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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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鄭台喜 讀, 中國書藝의 理解 - 圓光大學校 出版局, 1996 裵圭河 編著, 中國書法藝術史 - 梨花文化出板社, 2000 杜忠誥 著, 정철재 讀, 書藝技法 - 美術文化院, 1988 朴政根 編著, 行書入門 - 學一出版社, 1988 崔長潤 讀, 中國書人傳 - 雲林筆方, 1977 郭魯鳳 選讀, 中國書藝論文選 - 東文選, 1996 神田喜一郞 著, 李憲淳, 鄭充洛 讀 - 中國書藝使, 19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