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니 새벽 2시 40분. 깜짝 놀란다. 어제 밤 몇 시에 잠이 들었던 걸까?
아마도 8시 이전일 것 같다. 태종 이방원 마지막 회 재방송을 보다가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8시 이전이다. 밤 9시에 먹는 노인양반 취침 전 약도 드리지 못한 거 아닌가?
물과 약봉지가 그대로 있다. "아차!" 7년 동안에 이런 실수는 처음 있는 일이다.
잠자고 있는 아해 같은 노인을 깨운다. "약, 먹읍시다. 미안 미안. 죄송죄송"
다시 잠을 청하기는 틀린 것 같아서 부엌으로 나왔다. 커피를 마신다.
요즘 들어 체력인지 정신력인지 기억의 문제인지 슬슬 쇠해가는 느낌이다.
이전의 내가 아니다. 이석증 어지럼으로 두 달 넘게 고생한 것이 아마도 빌미가 되겠지만
더욱 빈번해진 노인양반의 시도 때도 없는 환시와 착각에 나의 어딘가가 조금씩 좀먹어가는 감이 드는 것이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아침 잘 먹고 점심도 잘 드셨다.
점심시간에 일어나려면 애를 엄청 먹이는데 순조롭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횡재한 마음까지 들었다.
요양사가 물수건으로 얼굴과 목 귀를 닦아주고 면도 시켜주고 로션까지 발라주고....
어제 막내가 와서 미장원에 까지 모시고가서 컷트를 했기에 더 젊어진 모습으로 거실에 앉아 큐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당신, 빨리 동숭동 옆집에 가서 쌀을 가져와" 하는 것이다.
정오쯤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다녀온 노인. " 최소장집 마당에 괘짝이 있는데 거기 쌀이 있어" 라고 말을 했었다.
동숭동 옆집은 서울공대출신의 공무원이 살던 집이다.
노인이 자기집에 짐 가질러간다고 열 번도 더 넘게 다닐 때 따라가 보니 거의 빈집상태로 있었다.
40년 전이니 그 동안 주인이 몇 번 바뀌었을 것이고 아마도 헐고 빌딩을 올리려나보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거기 마당에 쌀이 있다는 것이다. 빨리 가져와야 된단다. 빨리. 요양사와 둘이 가란다.
내가 혼자 가겠다고 하니 막무가내 요양사를 떠민다. 15년 요양사 경력의 여인이다.
"사모님, 같이 가요. 이럴 땐 말을 들어야 끝이 나요"
장바구니용 케리어를 노인이 안긴다. "이거 가져가야 돼"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시장에 가서 쌀과 비닐 봉투를 사고 쌀을 비닐 봉투에 담아 케리어에 넣어1시간쯤 후에 집으로 가서
"여기 쌀 가져왔수" 라고 보여주면 되려나?
그렇다면 그의 환시를 인정하게 되고 노인은 자기가 본것에 확신을 가지게 될 것 아닌가?
그리고 또 다른 환상을 봤을 때 맞다고 우길 것이 아닌가?
“저번에도 쌀이 있어서 가져왔잖아?” 라고..
일단 쌀을 케리어에 둔채 빈 몸으로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설을 썼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쌀을 찾으려고 집을 뒤지니 도둑으로 알고 112에 신고를 당해 파출소로 끌려갔어요.
당신이 요양사선생을 데리고 가라고 한 것은 아주 잘 했어.
그녀가 도둑이 아니라고 신분 보장을 해주었어요.
주민등록증 복사해 놓고 다시는 남의 집에 안 들어간다는 각서에 인장 찍고 겨우 풀려났어요.
"멀쩡하게 생긴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나? 또 남의 집 들어가면 콩밥 먹을 줄 아슈!" 순경이 말합디다.
"나는 이제 절대로 동숭동 근처에는 못가!!"
"분명 쌀이 있었는데...?내가 두 눈으로 봤는데...."
기가막힌 노인이 소파에 잔뜩 찡그린 얼굴로 벌렁 눕는다.
나는 다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가서 침대에 누라는 권유도 "쌀"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머리속이 혼돈으로 가득하겠지. 이럴 때는 어떤 음식도 먹지 않는 노인이다.
점심을 실하게 들었으니 저녁밥을 건너뛰어도 괜찮다는 생각에 저녁밥상도 차리지 않았다.
모른척 했더니 침대로 올라와 누운다.
TV를 켜니 시사토크 시간이다. 총리와 장관후보 청문회 이야기다. 듣기도 싫다.
채널을 돌리니 태종이방원 마지막회를 재방송한다. 그걸 보다가 꺼버리며 잠이든 것이다.
그 와중에도 6시간을 꿀잠을 잔 내가 신기하다.
새벽 3시. 고구마도 삶아 놓고, 우엉조림도 했다. 참치 캔을 따서 기름을 빼고 양파 다져넣고 마요네스에 버무렸다.
그리고 2022년 5월 2일 일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늙은 아해와 사는 노마님의 하루>라고 제목을 부친다.
첫댓글 목소리도 너무예뿐 노마님. 노마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밝고 젊은 소리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엊그제 계곡의 물고기들을 보고 있는데 매실때문에 하신 전화. 맑은 물속에서 놀고 있는 저 물고기들에 방울을 달아 주면
아마도 이모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읍니다. 산행 끝의 피곤한 다리에 이모님의 예쁜 목소리가 힘을
실어 주어 감사했어요."
"생떼장이 미운 아홉살과 사는 꽤꼬리우렁각시의 하루. 쓰담쓰담. 힘들게 보낸 어제. 느리게 흐르는 오늘. 내일은 "말잘듣는
예쁜 아홉살 아해와 예쁜 목소리의 소녀의 하루"가 되시길.....
길선의 윗트는 어디서 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