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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4:1-37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20여년 전에 기독교계를 센세이셔널하게 흔든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 그 책 제목만 보고도 끌렸습니다. 필립 얀시의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입니다. 이 책이 제 호기심을 끌었던 이유는, 그동안 내 안에 있었지만 크리스천으로서 감히 끄집어 놓을 수 없는 질문이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질문을 건드린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숨어 계시는가?’ 라는 세가지 질문으로 글을 이끌어갑니다. 지금이 중세시대였다면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불경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사실 이 질문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불경한 것도 아닌 것은, 그 동일한 질문을 우리는 욥기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은 지 오래 되어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이 책을 읽을 때 저는 인간의 삶과 고난, 그리고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선하심, 이 모든 것이 엉켜서 사라지는 희뿌연한 안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삶이 좀 명확했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필립 얀시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고, 침묵하시며, 선하지도 않아.” 라고 감히 결론은 내리지 못하나, 그렇다고 딱히 내 안에 확신은 없는, 희뿌연한 질문이 남아있는 채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욥도 이 불명확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하나님을 악하다 결론 내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이 악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세 친구를 비롯해 사람들의 평가는 욥을 향해 화살을 쏘며 “네가 잘못했어” 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하는 변명과 논쟁은 하면 할 수록 욥에게 의미가 사라집니다. 이제는 사람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욥은 31장 35절에서 말합니다.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세상에는 악이 가득합니다.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악인은 판을 칩니다. 그리고 선한 자들의 고난 소식도 계속 들립니다. 악을 행한 적이 없는 욥도 고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 고난으로 인해 친구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욥이 친구들과 변론을 하다가, 이 모든 변론과 논쟁의 끝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모입니다. 우리가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나쁜 사람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을 때, 그 상황과 사람을 원망하다가도 결국 전능자 하나님께 우리의 원망과 절망이 귀결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왜 그 때 막아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필립얀시가 물었던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일상에서 기도할 때 많이 울부짖는 그 질문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성경 중에서도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맞닿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아직 고난을 겪어 질그릇으로 몸을 긁고 있는 욥에서 멈춰 있습니다.
욥의 죄목을 들어 지혜자들에게 판결을 요구(1-9)
오늘 본문은 엘리후의 첫 번째 변론에 대해 욥이 대답하지 못하자 두 번째 변론을 전개합니다. 변론 전개의 분위기는 마치 재판장 같습니다. 엘리후는 욥을 피고인으로 고소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근거로 그를 유죄 판결합니다. 이와 같이 엘리후는 욥의 원망조 탄식을 하나님 공의에 대한 도전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결코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원망과 의심은 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결국 세 친구와 같이 엘리후도, 피상적이며 이론적인 추론을 통하여 욥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겪은 경험과 알게 된 지식을 뇌에 도식화하여 저장한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생체적, 정신적 한계에 의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경험과 지식을 다 저장하면 그 경험과 지식을 다시 꺼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서 일상 조차도 과부하가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도식화의 편리함과 합리성에 전제가 있습니다. 압축되며 정제된 그 도식이 언제든 잘못 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에 대한 인식과 그렇기에 가지게 되는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나의 짧은 경험과 다 알지 못하는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3-4)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려보자고 합니다. 이런 논쟁의 추세는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가려보자고 합니다. 물론, 욥의 회개가 이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이기에, 그를 생각하는 마음에 시작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가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서 ‘주5일 근무’를 외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욥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 가운데 있는데, 친구들은 저 멀리 전쟁 너머 안전지대에서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훈수는 중요하지도 않지만 옳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과 어려운 상황을 셈하여 주시는데, 그런 고려 없는 친구들의 판단은 훈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어떤 명제도 전후상황과 맥락없이 명제만으로 진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명제에는 그 명제가 참이 되게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단들이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이 전후 맥락없이 성경말씀을 그 부분만 빼서 도식화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논리로 들으면 처음에는 그럴 듯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왜 규칙이나 명령형태만으로 쓰여진 것이 아닌, 이야기로 쓰여진 지 아십니까? 바로 진리는 단 한 단어로 단정할 수 없는, 시간과 삶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명령만 하지 않으시고, 혹은 천사들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수행하게만 하지 않으시고, 직접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사의 많은 불합리와 인간의 연약함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전능자 하나님께서도 우리 삶의 무게를 간과하지 않으시는데, 욥의 친구들은 간과했습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결과론적인 판단만 하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6)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하나님이 욥의 의를 부인하셨고, 욥이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욥이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욥이 의롭고 정당하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과 친구들은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의를 부인하고, 욥을 거짓말쟁이로 판단하신다고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부터 욥의 괴로움과 친구들의 판단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욥을 그렇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인 고난을, 욥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여기까지 묵상하면서, 참으로 예수님이 오신 후에 태어난 것이 큰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생기려고 할 때마다, 예수님을 묵상하면 그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생각과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과 행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왜 예수님이 중보자의 역할을 하시는지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사를 직접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자 되시며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우리가 오해없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한 섭리를 변론(10-30)
엘리후는 10절부터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한 섭리에 대해 말합니다. 엘리후는 15절까지는 일반적인 말을 하다가 16절부터 욥에게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16-17)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엘리후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인데 욥이 하나님을 정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욥은 하나님을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욥 자신도, 고난의 상황과 자신의 의로움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욥이 죄를 지었다고 단정 짓습니다. 아무리 욥이 자신을 변명하고 아니라고 해보아도, 그 간극에 대한 물음은 자신도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온갖 물음표에 대해 욥의 변명과 변론은 긴 논쟁 후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그제서야 욥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무리 표현하고 설득해도, 사람은 온전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받고 공감받고 싶지만 기대만큼의 만족스러운 반응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이는 인간 본성에서 오는 한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만큼만 이해하고, 그나마 그 경험도 자신이 중심이기 때문에 같은 경험이라 할지라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힘든 상황 중에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 혹은 이해 받으려 변명과 변론을 하다가 혹은 스스로를 표현하며 어필하다가 실망하신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 앞에서 멈추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그 이상을 넘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욥도 재산 많고 자식들 살아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망정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식과 경험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었기에 굳이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들이 무너지자,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마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욥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도 더이상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이해받기 위해서, 기대하거나 의지하는 것을 거둡시다. 물론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상황의 필요 때문이지, 자신을 인정받거나 이해받기 위해서인 목적은 거둡시다. 좀 답답하고 때로는 전혀 안 들으시는 것 같더라도, 결국 근원적으로 나를 아시고 이해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은 인정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혼나고 심지어 맞더라도, 사랑받고 있는 자녀라는 관계적 충만함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21절부터 엘리후는 사람의 일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변론하고 있습니다.
(21-22)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걸음을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심판을 하신다며 권선징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하나님에 대해 당연하며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많은 종교와 역사에서 보여주는 전능자에 대한 인식 수준입니다. 즉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시지만 거기까지이며, 심판자의 역할은 하시지만 아버지는 아닙니다. 혼내실 수는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으로 혼내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의 입장에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기 전, 당시 하나님에 대한 경험상 당연한 인식이기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지금 우리로서는 많이 아쉽습니다.
징계 중에도 자기 의를 주장한다고 여긴 욥에 대한 정죄(31-37)
(33)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엘리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신경이나 쓰시겠느냐. 욥에게 마치 “네가 징징거려도 소용없어. 그래봤자 인간에 불과한 너를 하나님이 신경이나 쓸 것 같아?” 라고 잘라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기 앞부분에 등장하셨던 하나님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욥을 엄청 신경쓰셨습니다. 욥을 주의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도 엄청 신경쓰고 계시고, 주의하여 보고 계십니다.
징징거려 봅시다. 하나님께 하소연해 봅시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고 스스로 재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들어도, 심지어 친구와 가족도 안 들어도, 하나님께 하소연해 봅시다. 언제까지 마치 하나님을 배려하며,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미리 “안 될 텐데 굳이 구하지 말자.” 하시겠습니까? 욥도 친구들과 긴 변론 후에야, 자기 스스로 어찌 해보려 해도 안 되고 주변에 의지하고 이해받을 사람이 없어져서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어도 살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잘못했다고 혼을 내시던, 자신의 누명을 벗겨 주시던, 이제 하나님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세 친구 뿐 아니라 엘리후도 지혜자처럼 논쟁하지만 본인들의 제한된 경험과 권선징악이 확실한, 그리고 고난과 힘든 여정을 걸어보지 않아서 그 상황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겪어보지 않은 제한된 경험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또한 불확실과 불명확이 가득한 이 세상을 흑백으로 재단하여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기에 욥이 의롭지 않다는 결론, 악이 창궐하기에 하나님이 선하지 않으시다는 결론, 지금 기도에 응답이 없으시기에 침묵하신다는 결론은 그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좀더 다면적이며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시간마저도 초월하실 만큼 입체적인 분입니다.
다시 처음에 필립 얀시와 함께 했던 질문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숨어 계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그 질문에 답하는 것 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희뿌옇게 안개 같은 세상과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내 힘과 경험과 판단으로 길을 찾으려 하는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빛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도 한발한발 더듬으며 간 그길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요, 함께 하신 길인 줄 믿습니다. 아직도 도대체 답을 모르겠는 것들이 너무 많지만, 상관 없습니다. 모든 것 함께 겪으신 예수님만 믿고 하나님의 얼굴 구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하나님에 대해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지 생각해 봅시다.
2.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고 공감받는데 집착하는 부분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에서 자유해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안 될 텐데 굳이 구하지 말자.” 라고 생각하고 단념한 기도가 있습니까?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해 봅시다.
4. 다른 사람의 상황을 내 경험의 잣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없는 지 생각해 봅시다.
(작성자: 윤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