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는,
어떤 그룹에서, 혹은 사회 단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행복한 사람' 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조건으로,
우리가 '꼴찌가 되어야 하고, 모든 이의 종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날, 어린 아이는, 귀여움, 순진함의 대명사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복음이 쓰여질 당시, 이스라엘 에서의 어린이 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나약함’,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보잘 것 없음’ 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귀찮은 사람, 더 나아가 짐이 되는 사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사람'조차
'끌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아닌,
나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
곧 꼴찌가 되는 것을 뜻하는데,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꼴찌가 되는 것, 종이 되는 것,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또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의미에서,
행복의 조건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참된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 자체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 내가 바라던 꿈을 이루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이룬 후,
나는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나는 얼마 동안이나 행복했습니까?
행복을 꿈꾸며,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성취한 후에도,
내가 찾던 행복을 찾지 못했다면, 더 나아가
내가 허무함만을 느끼고, 인생을 부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꿈꿔왔던 것들이,
나만을 위한 것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통해
어느 정도 만족한 삶을 살아가려면,
‘내가 마침내 소유하게 된 것, 내가 마침내 이룬 꿈,
내가 마침내,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것들’이,
나만이 아니라,
‘너의 행복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내가 바라고 꿈꿔왔던 것들이,
오로지 나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설령, 내가 그것들 이뤘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하고, 허무함을 남기게 됩니다.
신앙적으로 바라보면,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삶에 대하여
감사하거나, 그 삶에서 활력을 찾지 못하고,
아무런 감흥 없이, 마지 못해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게 되며,
그러한 의미 없는 삶을 살도록 하신 하느님을
원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하신 삶 자체가
나의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허무함만을 안겨 주거나, 삶의 의욕조차 상실하게 하는,
그런 삶일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며,
당신께 감사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도록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삶이 곧,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이며,
가장 작은 자를 상징하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옆 사람이 행복해할 때, 나도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해피 엔딩 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옆 사람이 고통스러울 때, 나도 고통스럽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창조 질서에 가장 민감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 이시며,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한없이 민감하시어,
지금도 우리의 목소리를 기꺼이 듣고
움직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화답하시기 위해
당신의 하나 뿐인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시며
지금도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 자신도,
이러한 창조 질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창조 질서 덕분에,
옆 사람이 고통 중에 있는데도,
그것을 모른척 하며, 나만의 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나에게 참 만족을 가져다 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삶 안에서 허무함만 느끼게 되며,
그동안 기울였던 나의 노력 만큼이나,
나 자신을 미워하고, 세상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내가 청하고 있는 것들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실만큼,
내가 청하고 있는 것들 안에
옆 사람의 행복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혹은, 내가 청하고 있는 것들이,
나만의 행복을 위한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찾던 행복을 찾지 못했다면,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이제는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를 위해, 먼저 행복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단 하나 뿐인 당신 목숨까지도 내어주시며,
우리가 찾던 그 행복을 찾아 얻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 한 없이 작은 자 인 나를 받아들이시고, 끌어안으시며,
첫째가 되는 방법을 몸소 사시며, 이제는 나도 첫째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나는 어떠한 존재인지 를 돌아보며,
예수님께서 그러한 나를 지금 어떻게 대하고 계시는지 를
들여다 봅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