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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우두머리로 구원의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하늘에서는 왕관을 쓰신 주님이시지만 땅이라는 객지에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고난이 복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요셉, 야곱, 다윗 모두 이와 같은 복을 전제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배웁니다.
시편 23편은 신앙의 다섯 단계를 말해줍니다. 1절 여호와가 목자이십니다.
여호와가 목자이신 것은 분명한데 그 과정을 잘 보면 처음에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참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영혼을 일으키십니다.
헌신하게 하고, 섬기게 하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 전엔 사랑까진 안 해도 되었는데,
똑똑 한 척 구원에 대해 말하고 남의 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 아는 체 하고,
남에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일러바칠 것 다 일러바치고, 섬기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너는 이제 성숙하라 요구하시면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가정교사가 되셔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십니다.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의의 길로 인도받는 순간부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갑니다. 필수 코스입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그 길을 안 갈래야
안 갈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과정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빨리 통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세처럼 자기처리가 40년이 걸리고 야곱처럼 20년에 걸쳐 통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같으면 아직도 설익었지만 말씀 받은 후 36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지나가다 보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주님을 압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 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푸른 초장에서
하나님의 처소 아버지의 집으로 끝나는 게 신앙의 여정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은 굉장한 예언서입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장면입니다.
그리고 23장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현재의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또한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먹이시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더 높은 단계로 점점 인도하시는 가이드가 되십니다.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물론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됩니다.
따라서 어느 수준에 내 신앙의 여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시범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도 운명적으로
그 길을 가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경건훈련이 매우 중요합니다.
꼭 고난의 예방 주사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방주사를 맞는 이유가 뭡니까?
그 병균을 미리 넣어서 그 병균을 이기는 힘 곧 면역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말씀공부는 예방주사와 같습니다. 장차 닥칠 고난에 승리할 수 있는 근육을 키우는 겁니다.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자는 누구인가요? 단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복수인 성도들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입니다.
한 씨, 한 배는 바로 형제입니다. 다 하나에서 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부족하여도 나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아담 안에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
놓으시고 우리를 거룩한 자라 그리스도의 형제라 칭하심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12절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찬양하는 증인은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심령 속에서
찬송하는 성령의 역사의 장소입니다. 찬양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되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영광에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형제요 또 거룩한 자들입니다.
13절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시편 52편의 도엑 이라는 사람은 혀가 칼집에 꽂힌 삭도 같다고 말씀합니다.
사정없이 죽입니다. 세상에 이런 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혀는 여호와 집에
심겨진 감람나무와 같습니다. 그 혀가 말씀에 심겨 졌다는 겁니다. 이런 혀는 남을
살리고 고치고 일으키는 혀입니다. 우리의 혀가 이런 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표적과 기사보다 제자들의 혀가 확 달라진 것을 봅니다.
그러기 위해 주의 인자함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말하는데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나는 죄가 많다는 뜻만이 아니라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은 주님이 은혜를
베풀기만 하시면 선착순으로 달려가서 받겠다고 하는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제대로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도움은 별로 안 받아도 잘 살아 갈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걸 봅니다.
주님께 경외와 복종이 안 되면 만물도 우리의 말을 안 듣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니 그의 자녀들이 그의 말을 안 듣습니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종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만물이 우리의 말을 듣게 될 겁니다.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말은 언제나 주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쉬지 말고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성공을 합니다. 엘리는 하나님께는 복종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화를 내십니다. 너는 내 말을
복종하지 않고 우습게보면서 네 아이들을 나보다 더 좋아 하는구나 그래서
너의 집에는 늙은이가 없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주 큰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지만
실제적인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겁니다.
14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죽음에서 해방하기 위해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기 위하여 혈과 육에
속한 다음 우리를 그 약속의 주머니 속에 넣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손을 대지 못하는 십자가 반대편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질병이든지 반드시 이 죽음의 공포에서 이겨야 그 질병에서 낫습니다.
어떤 목사가 암과 싸우다가 5년 투병 끝에 암에서 벗어나 하는 말이 지금 천국에 가면
좋겠지만 살아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위해서라고 해서 당신의 지금 스코어는
죽으면 가는 곳이 뻔하니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해줬습니다.
사망의 공포를 이기려면 먼저 필요한 것은 영생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고 그리스도 안에
옮겨진 영생의 믿음을 굳게 잡으면 죽을 질병이 아니면 다 이깁니다. 할렐루야!
16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천사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성도들의 복을 말합니다. 다만 집을 다
지을 때까지 목수에게 돈을 많이 주어 집짓기를 하는 것처럼 완성될 때까지는 많은
사역자들에게 대접을 더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겁니다. 붙들어 주신다는 말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이며
우리의 힘과 반석이 되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풍랑 속에 들어가니까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가 너희를 남편처럼 붙잡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영혼을 붙들어 주십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떠받치고 치켜세워 주십니다. 그래서 나의 붙드는 종을 보라(사42장)고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세상을 이긴 이김은 믿음. 너희 안에 계신이가 세상보다 크심이니라. 우리는
날마다 도살할 양과 같이 죽임을 당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리로라고 우리는 고백하고 노래합니다. 사단은 죄와 사망의 법을
통해 우리를 계속 끌어 내리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를
항상 치켜 올려줍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붙잡으시는 이 은혜가 보통 복이 아닙니다.
17-18절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 제사장이십니다. 자비롭고 충성된 대 제사장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괴로움이나 안타까움을 이미 경험해 보신 분이십니다. 날 때부터
말구유에 나시고 천한 직업인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에서 자라시면서 인생의
비참함을 다 겪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세상을 좇을 수밖에
없는 본성도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겁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께 대변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 제사장이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대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왕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게 하는 권세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충성된 대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려 함이라 하시고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 하십니다.
이와 같은 중보 기도를 주님은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살아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십자가의 죽음은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드려도
하나님이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은 네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로 딱 결정하는 순간 천사들이 와서 수종을 듭니다.
사탄의 유혹은 지금도 치열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날마다 반복해야 합니다.
주께서 시험은 도와주시지만 우리가 십자가에 죽는 것은 방법만 제시하시고
결코 도와주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영광을 위한
길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우리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그리고 주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우리는 죽어야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내 자신이 오는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로 날마다 건너가야 합니다.
그 건너편에 옮겨 진 사실을 마음으로 믿어 동의를 하면 성령께서 붙드십니다.
영생을 얻었다 이것은 시온의 대로가 열렸다는 뜻이고 히브리서가 요구하는
것은 생육의 기본 구원은 다 받았으면 이제 영생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조화를 이뤄 가는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가야 하는데
그 주님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 제사장이시란 말입니다.
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고 있습니다(We do have 히8:1)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고 저 세상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세상의 왕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오는
세상의 왕에게 복종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의미입니다.
비록 몸은 이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자로서 주의 진리를 좇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땅의 소욕을 버리고 위엣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은 우리의 자비롭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셔서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은사를 채워 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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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입니다.
광야를 거쳐 요단강(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가나안땅(예수 그리스도)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야 내것이 된다는것을 여러번 경험 합니다.
삶속에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그 갈등은 깊지만, 일단 십자가 지기(자아의 죽음)를 "마음먹기"로 결심하고 발을 내딛을때 어느새 이미 "마음이 먹어짐" 상태를 발견합니다.
그 다음은 다 아시죠...
피동의 십자가가 능동이 될때에 나타나는 그 의, 하나님의 인정하심에 기뻐 뛰는 나의 영혼, 주님만이 나의 생명 나의 찬송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