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7.
서리
날이 밝았다. 장화 끄는 소리가 느긋하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좁은 숙소보다는 넓은 실습장이 훨씬 더 좋다. 맑은 아침 공기를 실컷 마시는 산책은 산미 높은 핸드 드립 커피만큼이나 싱그럽다. 텃밭과 비닐하우스 농작물을 살피러 가는 길이다.
첫서리가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고구마잎이 새까맣게 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서리의 피해다. 이제 고구마 줄기는 먹을 수 없게 되나 보다. 서리를 맞아가며 여무는 서리태는 여전히 콩잎이 파랗다. 위쪽 콩깍지는 누렇게 말랐는데 아래쪽 콩깍지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해 보인다. 쪽파 키가 얼마나 컸는지 쪽파가 포기를 몇으로 나눴는지를 살펴본다. 어제와 다를 바 없지만 비닐하우스보다 노지의 쪽파가 더 굵고 싱싱하다.
배추밭에 들어섰다. 배춧잎이 젖었다. 이슬인가? 서리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의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단단하게 노란 속이 차고 단맛이 깊이 들었으면 좋겠다. 튼실한 배추 25포기면 이 세상 모든 행복이 내 것이 될 것 같다. 11월 말까지는 3주 정도 남았다. 시간은 충분하다. 이제 김장 계획이 필요하다.
무잎도 촉촉하다. 하나, 둘, 셋. 총 이른 넷이다. 무보다 무청이 더 욕심난다. 잘 말린 무청을 무시래기라 부른다. 나와 아내에게 배추 시래기는 안중에도 없으니 시래기라 하면 말린 무청을 일컫는다. 된장에 버무려 한소끔 끓이면 어머니도 할머니도 기억나게 한다. 고등어 아래 두툼하게 시래기를 깔고 고춧가루 듬뿍 뿌려서 뽀글뽀글 끓이면 그 맛이야 두말해서 뭣 할까. 다들 아는 그 맛인데.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이런 걸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고 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시래기가 간절하다. 일장춘몽이 아니길 소망한다. 암세포의 증식과 전이를 억제하고, 칼슘이 풍부하여 골다공증 예방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혈관 질환 예방, 노화 예방, 빈혈 및 변비 개선, 간 해독, 비타민과 미네랄 공급, 동맥 경화 예방 등 만병통치약이다. 고구마 줄기에 이어, 또 하나의 건강보조식품을 내 손으로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 그 이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딱히 몸을 써서 일한 것도 없다. 허리를 굽혀 풀 한 포기 뽑지도 않았지만, 아침밥은 먹어야겠다. 사실 한 바퀴 돌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야말로 짧은 산책이다. 장화 끄는 소리가 빨라진다. 땅콩이 잘 익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잡곡밥과 갓김치, 풋고추를 상상하니 빨라질 수밖에 없다.
마무리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준비 없는 마지막은 늘 아쉬움이 크다. 서리는 유종의 미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아름다운 마지막을 고민하고 있다.
첫댓글 이때만 해도 행복햇네 무우청도 많이 말리고 김장도 맛있게하고
끝까지 가봐야 안다니깐 이노무 진드기
끝나야 끝이란 사실을 받아 들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