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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⑮
용서, 가장 위대한 신의 명령
마르크 샤갈, 축제날(레모라 랍비), 1914
헨리 나우웬(1932-1996)이란 가톨릭 사제의 삶은 나를 고양시키는 지성인 중 한 명이다. 미국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 남미 페루 빈민가에서 봉사를 하고, 다시 하버드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 중 다시 캐나다 토론토의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박약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를 떠났다. 그는 자기를 넘어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용서’를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용서는 사랑을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인 ‘인간 가족’이라는 연약한 공동체에서 행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나우웬이 지적한 것처럼 자기희생적이며 이타적인 삶을 살진 못하지만, 우리가 용기를 내어 일상생활에서 연습해야 하는 가장 큰 덕목이 ‘용서’가 아닐까?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 받을 만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인 것 같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기원전 6세기에 잃고 1948년 독립할 때까지 거의 2500년 동안 소위 ‘디아스포라’ 생활을 했다. 이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심지어는 중국에서 유대인들만의 집단촌인 게토를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차별받으며 살아왔다. 자신들의 민족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처럼 종교의식과 절기를 지켰다. 안식일 준수와 유대절기 준수, 그리고 그들만의 음식법인 코셔(Kosher)는 이들이 생존을 담보하는 마지노선이었다.
여기 19세기말 폴란드 바르샤바에 거주하던 가난한 유대인 부부 이야기가 있다. 이 부부는 자기 집 마당에 가건물로 집을 지어 7일 동안 머무는 ‘장막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가건물을 ‘수카’(Sukkah)라고 부른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던 시절을 기억하며 새로운 땅에 들어갈 것을 기원한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그들은 10월 말 ‘장막절’이 되면 수카 안에서 음식을 먹고 일부 신실한 유대인들은 그 안에서 자기도 한다. 과거 이스라엘인들이 사막에서 40년 동안 지낸 후 가나안으로 들어가 나라를 세운 것처럼, 이들도 언젠가 이스라엘로 돌아가 나라를 독립할 것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례이다.
유대인들을 다음 네 가지 식물을 들고 기도한다. ‘룰라브’(대추야자나무) ‘하닷사’(도금양나무) ‘아라바’(버드나무) 그리고 ‘에트록’(시트론)을 들고 기도한다. 이 네 가지 식물은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의 4가지 유형이기도 하다.
우선 ‘룰라브’(대추야자나무)는 맛은 있으나 향기가 없는 식물이다. ‘룰라브’는 경전연구와 오랜 묵상을 통해 박식한 사람이나 선행으로 옮기지 못한 사람을 상징한다. 아무리 공부하면 뭐하나? 공자(孔子)도 <논어>에서 “시경 300편을 외우고도 정치를 맡아서 민심을 통달하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전문적으로 잘 대처하지 못하면, 비록 많이 외우고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룰라브’는 선행이 없는 믿음은 소용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두 번째, ‘하닷사’(도금양나무)는 향기는 있으나 맛이 없는 식물이다. 이 식물은 천성적으로 착하긴 하나 토라를 공부하지 못해 그 선행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경전연구와 마음의 훈련을 통해 항상 영감을 받고 선행이 습관이 되지 못한 사람의 유형이다.
세 번째, ‘아라바’(버드나무)는 맛도 없고 향기가 없는 식물로 토라를 연구하지도 않고, 천성적으로 선행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에트록’은 시트론(유자)이다. 에트록의 특징은 향기도 좋고 맛도 있어 토라를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가장 모범적인 유대인의 상징이다.
'집 없는 시대'에 외치는 복음 헨리 나우웬은 자신의 아픔과 상처, 불안과 염려, 기쁨과 우정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영적 위로와 감동을 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이다. 그는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사, 교수, 성직자로서의 삶을 성실히 수행했다. 수많은 강연과 40여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모범을 보여줬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우기 위해, 그래서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종종 일터에서 물러났으며, 마침내 안착한 곳은 지체장애자들의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였다.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했던 수 모스텔러 수녀는 "당신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 관계가 힘들 때는 사랑을 선택하라, 서로 하나 되기 위해 상처 입고 쓰라린 감정 사이를 거닐라, 마음으로부터 서로 용서하라"는 것이 헨리 나우웬의 유산이라고 요약했다. 그의 유산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는 1932년 네덜란드 네이께르끄에서 태어나 195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1966년부터 노트르담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의 강단에 섰으며, 1986년부터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를 섬겼다. '탕자의 귀향',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상처 입은 치유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적 발돋움' 등 그의 대부분의 책은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
'두려움을 떠나 사랑의 집으로'(포이에마)는 탁월한 영적 유산을 남기고 떠난 헨리 나우웬의 주옥같은 명저들을 유려한 번역과 새로운 편집으로 다시 펴내는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작품이다. 하버드 대학교 강단을 떠나 평생을 보냈던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 완전히 정착하기 전, 그는 1985년 8월부터 1년 동안 임시로 그곳에서 피정생활을 했다. 그가 이 공동체에서 지내면서 몸도 성치 않고 가난한 그들이 어떻게 사랑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관찰하며 쓴 책이다.
"지금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집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면의 애통함 때문에 집이 없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과 나라에서 쫓겨나 집이 없습니다. 감옥에서, 정신병원에서, 난민촌에서, 구석에 처박힌 도시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요양원과 쉼터에서, 우리는 집 없이 사는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33쪽)"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우리처럼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궁극의 연약함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작은 아이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권력 없이 가난한 설교자로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범죄자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은 극단의 연약함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가난하고 실패한 인생의 열매가 바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생입니다.(92쪽)"
이 책에는 박애의 정신이 흘러 넘친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라는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앞에 서면 끝내 두려움의 집에 머물고 마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책으로 교육, 정치, 종교, 사회생활 곳곳에서 다양하게 또 미묘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통제하는 두려움을 떠나, 우리가 머물러야 할 '사랑의 집'이 있음을 가르쳐준다. 사랑의 집은 단순히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내세의 장소, 혹은 천국의 장소가 아니라 지극히 불안한 이 세상 한가운데서도 머물 수 있는 집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는 사랑의 집으로 인도하는 표지로 세 가지 - '친밀함(intimacy)', '풍성함(fecundity)', '희열(ecstasy)' - 를 들었다. 요한복음 15장을 증거로 들며 제시한 이 세 가지 표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 생명의 징후들이 두려움을 어떻게 몰아내는지, 어떤 식으로 사랑을 완성하는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우리 삶에서 드러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가르쳐준다. 또한 모든 인간은 그 상황과 상태가 어떠하건 이 세 가지 선물을 통해 삶을 누려야 함을 강조한다. 이 책은 두려움 가득한 이 시대에 위로와 영감과 도전을 동시에 안겨줄 것이다.
/ Inews 24
마음이 가난한 자
영성 신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헨리 나우웬(1932∼1996)은 50세가 되던 해 어느 날 작은 트렁크 하나를 들고 하버드대를 떠났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요, 하버드대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던 그가 학교를 떠나 정착한 곳은 정신장애인들의 공동체 라르쉬였다. 사람들이 궁금한 건 당연했다. 목회상담과 목회신학, 기독교영성신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세계를 지배하고 싶어 했던 지성이 말도 거의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간 이유가 무엇일까.
나우웬은 얼마 후 강연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25년간 성직생활을 했지만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모든 사람이 나의 성공을 부러워했지만 그 성공이 나의 영혼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를 하면서 영적 죽음, 곧 탈진에 이르렀음을 알았고 하나님께 해결책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은 라르쉬 설립자를 통해 해답을 전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네 심령을 치유할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당대 최고 지성 나우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해결책은 기묘하다. 누구라도 그것이 묘책이라고 믿기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비밀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있었고 나우웬은 그 말에 순종했다. 영적 거장의 탈진
‘마음이 가난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마음이 가난한 자의 이미지는 예수님 말씀 속에서 형상화되어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첫 대중 연설에서 첫 말씀을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복의 선포로 시작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 한계성을 느끼고 하나님 밖에 도와줄 분이 없음을 고백하는 자다. 오만한 자들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 또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사람들이다. 사회통념상으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힘이 없으며 정직해서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다. 겁이 많아 무슨 일이든 도전하지 못한다. 대체로 물질적으로 빈궁하고 가난하다.
이런 그들에게 누가 복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해 나가신다는 것을 나우웬의 라르쉬 생활에서 보여주셨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 베드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다.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고기를 잡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어부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자에게 순종하는 순수한 신앙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가난했기에 예수님이 따르라고 할 때 따랐고, 예수님 말씀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순수하고 가난한 마음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위대한 주의 종으로 쓰임 받는 복을 받았다. 소외된 이들과 살라
나우웬은 라르쉬 생활을 통해 자신의 명성과 지성이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알았다. 지금 장애인들과 함께 있는 그 상황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장애인들이 비록 상처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순전함과 순결함을 통해 위로를 받고 영혼의 탈진과 공허함에서 벗어났다고 고백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소외되고 여러 문제로 고통 받으면서 스스로 마음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위축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소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다. 이승한 종교국장 / 국민 일보
헨리 나우웬의 기도문
나는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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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의 기도 그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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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