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
그리스도의 순결한 생애를 예표하는 소제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장은 “소제”(素祭)에 대한 규례입니다. 소제는 5대제사 중에 유일하게 피 없는 제사로써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순결한 생애”를 예표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소제는 죽어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산제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만이 자신을 드리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하십니다. 이것이 소제의 삶입니다.
도표를 보시면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1)을 중심으로, 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아, 제단 위에 불사를지니”, ②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2)합니다. ③ “화덕에 구운 것”(4), ④ “철판에 부친 것”(5), ⑤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7), ⑥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9)합니다. ⑦ “소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치라”(11, 13)하시고, ⑧ “첫 이삭의 소제를 드리려거든,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14)하십니다. 이에 대한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첫째 단원(1-10) 고운 가루 무교병을 드리라
둘째 단원(11-16)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치라
주제(主題) : 그리스도의 순결한 생애를 예표하는 소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제사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드려주실 대속제물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서는 아니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도 번제의 삶, 소제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소제”는 죽음을 뜻하는 “피” 흘림이 없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소제는 단독(單獨)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라 번제 등 “피 흘리는”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지는 것이 상예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느냐 하면 “소제”, 즉 “성화의 삶”도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복음이 이끄는 삶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구조를 보면 사도 바울은 먼저 1장-11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복음(교리)을 말씀한 다음에 12장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성도들이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교리(敎理)와 성도들이 행해야 할 윤리(倫理)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만합니다. 이는 마치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를 모른다든가, 확고하지 못하게 되면 성화의 삶도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제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10), 즉 제사장들의 식물(食物)로 삼으라 한 “나눔”입니다. 소제의 삶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는 “이웃 사랑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첫째 단원(1-10) 고운 가루 무교병을 드리라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1상),
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라”(1하)하십니다.
㉠ 소제의 주 제물은 곡물입니다. 그런데 “번제”로 드리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소제의 제물은 “고운 가루”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1, 4, 5, 7)하십니다. “고운 가루”의 삶이란 1분 1초를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경건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제”는 주님의 순결한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 또한 2장에는 “기름”이라는 말이 9번이나 등장합니다. 고운 가루에, “그 위에 기름을 부으라”(1, 6, 15)고 말씀한다면 이는, “소제”의 삶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롬 8:14) 삶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그 위에 유향을 놓으라”(1, 2, 15, 16)고 말씀한다면 “소제”의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를 풍기는 삶임을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단 위에서 불사를지니”(2상)합니다.
② 그리고 하는 말씀이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2하)합니다.
㉠ “소제”에 있어서도 명심해야 할 점은, “화제와, 향기”입니다. 도표에 나타난 대로 소제에도 “화제”(火祭)라는 말이 5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는 소제의 삶이란 고난의 길임을 나타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소제의 삶을 살아간다면 무엇을 다 바라겠는가? 소제를 공식으로 나타내면 “고운가루+기름+유향+고난=소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소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신앙인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3)합니다. 10절에서도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리라”고 거듭 말씀합니다.
여기 “번제”와 다른 특성이 나타나는데, “번제”는, “그 전부를 제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1:9)한 반면, “소제”에는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즉 제사장들의 식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만을 사신 것이 아니라,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자신을 주셨습니다.
㉢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3, 10)하십니다. 하나님께 소제를 드린 후에 남은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요,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요 6:54)하심은 자녀들에게만 허락이 된 특별은총인 것입니다.
㉣ 이점에서 설교자가 유념해야 할 점은 예배에 있어서 찬양이 “찬송의 제사”(히 13:15)임과 같이 “설교”도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제사요, 성도들에게는 나눠주는 영적 양식이라는 경각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③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4),
④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5-6).
⑤ “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7)하십니다.
㉠ 소제로 드리는 방법이, “고운 가루”를 그냥 불사르는 것과, 화덕에 구워서 드리는 것과, 철판에 부처서 드리는 것과, 냄비에 삶아서 드리는 방법 등 다양한데 여기 공통점은, “불”(火)를 가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한 고난이 따른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 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허용하신 의도가,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리라”(10)하신 제사장에 대한 배려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구운 것, 부친 것, 삶은 것” 등 다양한 메뉴를 맛있게 먹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다양한 “말씀”을 제공해야 할 것으로 적용이 된다 하겠습니다.
둘째 단원(11-16)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치라
둘째 단원의 중심점은 소제물에 첨부해서는 아니 될 금기(禁忌)사항으로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라 하겠습니다.
⑥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11상)하십니다.
㉠ 소제물은 “떡이나, 빵”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누룩을 넣으면 보기도 좋고 먹기에도 맛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금하십니다. 왜냐하면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대청소를 하여 집안에서 누룩을 제거해야 했고,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으라 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누룩뿐만이 아니라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11하)고 “꿀”도 넣지 말라 하십니다. 고운가루에 기름과 유향과 꿀을 섞는다면 좋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12절에 보면 “꿀”을 예물로 드릴 수는 있으나 “제단”에 올리지는 말라하십니다.
㉢ 하나님은 금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13)고 빼서는 아니 될 것도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누룩과는 정반대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言約)이니라”(민 18:19)한 불변의 언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심지어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라”(겔 43:24)고 “번제”에도 소급을 치라 하십니다. 그래야만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2, 9)고 기쁘게 받으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라, 3대 절기를 지키라“하심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임과 같이 “누룩과 꿀”은 넣지 말라 하신 반면 변하지 않는 “소금”을 치라 하심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살전 2:5)합니다. 반면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합니다. 그러므로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라 하심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 24:45)하신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라 하겠습니다.
⑦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14),
㉠ 레위기에는 “첫 이삭”이 4번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23:10절에 가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만 “첫 이삭”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말씀인 것입니다. “볶아, 찧은 것”이란 역시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하시고 2장은 “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16)고 마치고 있습니다.
㉡ 주님 자신이 “기름, 유향, 불사를지니”한 소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의 삶도 “고운 가루+기름을 붓고+유향을 놓고+소금을 더한” 소제의 삶을 살기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⑧ 묵상해보겠습니다.
㉠ 소제의 세 가지 요소(1)와 의미에 대해서,
㉡ “첫 이삭의 소제”(14)의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 소제에 넣어서는 안 되는 것과, 빠져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