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영 묵상노트]
용서와 사랑의 편지 빌레몬서(11)
빌레몬서 1장 23절-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몬 1: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몬 1: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제 이 빌레몬서를 끝내면서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을 거명하면서 같은 마음으로 문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빌레몬서는 바울의 로마 1차 가택연금 시기에 작성이 되었기 때문에,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작성 시점과 거의 일치하고 있어 바울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많이 중복되어 나타난다. 골로새서는 두기고가 편지를 전달하면서 여기 오네시모를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그 순서는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예수,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가 문안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빌레몬서는 2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나의 동역자(συνεργοί)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골로새서는 에바브라를 매우 칭찬하는 긴 글이 적혀 있으나 여기서는 나와 함께 갇힌 자로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이름을 거명하는 순서가 조금 다르지만 5명은 중복된다. 다만, 그 사정을 할 수 없지만 이들 두 서신 중 유스도만 빌레몬서에서 빠졌다.
특히 조금 더 살필 것은 골로새서에서 바나바의 생질 마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라고 소개를 하고 있는 반면, 빌레몬서에서는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하고 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마가가 전도 여행 중에 밤빌리아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일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행 15:38). 마가로 인하여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 후에 다시 함께 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바나바는 그의 고향 구브로에서 사역을 끝내지 않았을까 추측이 된다.
어쨌든 이와 같은 일로 인하여 바울은 마가를 심히 못 마땅히 여겼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골로새서는 물론 빌레몬서에서 마가는 어엿이 바울 옆에서 바울을 지키기 있는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본다. 바울은 이렇게 1차 로마 연금 상태에 있다가 풀려난 후 여러 곳을 다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는 마가는 아마 바울과 함께 하지 않은 것 같다. 바울이 그의 최종 서신인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때는 그는 로마감옥에 2차로 감금된 시기인데, 이제 그가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예감하고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를 향하여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라면서 로마로 부를 때에 그의 옆에서는 지금 여기 이름으로 거명된 자들 중에 누가만이 함께 하고 있었다(딤후 4:11).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하였다(딤후 4:11 후반 절) 왜 이처럼 바울은 마가를 좀 더 언급을 했을까? 내가 마가를 용서하고 그를 나의 동역자로 삼은 것처럼,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함께 군사 된 형제로 받아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 이름이 거명된 사람 중 두기고는 바울이 에베소로 보내었으며, 그 나머지 사람은 그 행적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그 중에 데마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라고 한다(딤후 4:10). 골로새서는 물론 빌레몬서에서도 안부를 전했던 데마,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바울의 말 속에 어쩌면 아픔이 서려 있는 것 같다. 데마가 완전히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배교의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필자는 이전에 데마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래도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은 가지고 그를 언급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는 바울과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좀 더 편하고 안전하고 자유스런 삶을 위하여 데살로니가로 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제 이 서신을 마치면서 그의 서신의 끝자락에는 대부분 강복선언적인 형식의 문장들이 나타난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 4:1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 4: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3, 2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8), “…지혜로운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7)
여기 빌레몬서도 이와 같은 그의 서신형식에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모든 서신 형식을 마침에 동일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강복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참에 한 가지 확인하고 갈 것은 축도(祝禱)와 강복선언(降福宣言)의 차이 문제인데, 강복선언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복을 선언하는 목회자의 행위이다. 만약 이것을 기도로 보는 경우에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교단이 선택한 형식을 따라 축도로 보아 “있을지어다”가 아니라 “…하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축도이면, 목회자가 축도전 기도를 하고 난 후에 아멘 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강복선언이라면 먼저 기도를 하고 아멘으로 그 기도를 끝낸 후에, 강복선언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것이 옳으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강복선언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 25절로 마치면서 강복선언을 하고 있는데,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3절에서 보는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빌레몬과 그 가족들 그리고 교회에 함께 하셔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인들답게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한다. 여기 “심령”이라는 말은 πνεύματος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성령(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을 말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한다. 이 단어가 딤후 4:22, 갈 6:18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영적 자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영적인 존재가 갖게 되는 마음(καρδίας)과 생각(νοήματα)을 다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빌 4:7 참조).
여기까지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늘 성령 안에서 말씀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잘 상고하셔서, 말씀을 통한 풍성한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누리시기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