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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8일 추수감사 주일설교
본문: 신8:1-10
제목: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I. 들어가는 말
여름이 막 끝나 가던 날 떠나서 낙엽이 모두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 막바지에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기쁘고 즐겁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지만, 빈자리를 바라보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리고 그 간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던 과정을 생각하면 제가 모든 일의 원흉인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바로 추수감사절이네요. 참으로 절묘한 시간의 어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상해하고, 슬퍼하는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누구의, 또는 어떤 잘잘못을 가려서 반성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 우선적인 일 뒤에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제가 저의 책임을 감추거나 혹은 축소하려고 꼼수로 생각해 낸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 속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입니다. 레23:14절과 21절 마지막 구절을 보면,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명령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고 못을 박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주어진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지금 그들은 자기들을 광야로 이끌고 나온 모세를 원망하고 사사건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때입니다. 출14:11을 보면, 홍해가 가로 막혔을 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불평했고, 민수기 11:4이하를 보면, 만나만 먹어서 정력이 떨어졌으니 고기와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같은 것 먹고 싶다고 불평하고 있습습니다.
감사할 좋은 형편을 만들어 주신 뒤에 ‘봤지? 이제 받았으니 받은 만큼 감사해라!’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가나안 땅은 아직 들어가 보지도 못한 땅이죠? 추수는 아직 해 보지도 않은 일입니다. 막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불평과 불만, 그리고 원망이 가득한 상황일 뿐입니다. 환난이 겹치고 겹치는 환경 가운데 놓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러한 때에 절기를 정하여 매년 지키라고 강하게 명령하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비록 감사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감사해야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환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환난 뒤에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II. 감사의 이유
1.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음을 감사하라(2-3)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시골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가장 문명이 발달한 애굽과 비교하면 가나안 땅은 시골도 너~무 시골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면 뭐가 달라지기에 기를 쓰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나라를 탈출해서 그 미지의 땅으로 가야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노예의 굴레를 벗고 주인의 옷을 입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존재의 변화입니다. 물리적인 외형만의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본질의 변화인 것입니다. 며칠 전 저녁 식사 중에 한빛이 역사시간에 배웠다면서 일본이 대한민국을 지배하면서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방권사님은 일제시대를 겪어 보신 분 아닙니까.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그 시대가 생각나시는지 ‘말도 마라.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우리를 학대했는지 말로 설명해도 다 모자란다’고 치를 떠셨습니다. 주권이 없는 민족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지요. 주인이 된다는 것은 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산 자 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려면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본문 2절과 3절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3절을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체가 생존을 유지하려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거부하면 사망에 이르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의 주인으로서 주권을 누리며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살 때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죠? 그들은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주인의 말만 잘 들으면 됩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다가 주인이 안 보이면 쉬고, 그만 하라면 그만 하고, 자라면 자고, 주면 주는 대로 먹는 삶을 사는 존재였기에 하나님을 알 필요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그들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책임 하에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잖아요. 주인이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 토요일 저녁에 양재동에서 약속이 있어서 급하게 차를 몰고 올라갔습니다. 약 25분 정도 걸리더군요. 만난 분과 헤어져서 좀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2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이유가 뭔가 봤더니 경마장이 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차 안에서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인생길을 가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도박의 노예가 된 한 가지 예만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잘못된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환난을 주지 않으셔도 말씀만 하시면 되잖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신 4:30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요, 고난을 겪지 않으면 쓴 맛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출1장 15-16을 보면, 애굽의 바로왕이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산모들이 아이를 낳을 때, 딸이면 살려두고 아들이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요. 그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왜죠? 배는 굶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원래 신분이 주권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되찾아야할 신분이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노예가 주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긴 훈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 꼴랑 광야에 나와서 기고 만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그 땅에 주인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교만해졌을 때,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민족에게 40년 동안의 시간이 시험기간으로 주어졌습니다. 과정은 길고 지루하고 험난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때때로 아이들이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서태지가 ‘난 알아요!’라고 외쳤을 때, 당시의 많은 청소년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미처 버렸습니다. 아이들을 선동한 대가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떼돈을 벌었지만, 그 노랫말에 속아서 제멋대로 산 아이들은 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 이것은 교만이죠.
여러분 중에 혹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노력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우리는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합시다. 이 시간이 지나고 아면 우리 각자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더욱 뚜렸해 질 것입니다.
2. 환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감사하라(4)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끼리 한번 고생해봐’하시면서 그들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4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신32:10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이스라엘)을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머리가 나빠서요? 천만에 말씀이요. 성경의 인물 중에 야곱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형제에게 사기 친 사람입니다. 사기꾼치고 머리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도 사기를 치고 야반도주를 하죠. 그것은 야곱이 자신의 삶을 악착같이 버텨온 삶의 방식입니다. 왜 그렇게 악착같았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형 에서를 만날 때, 그대로 들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창32:1-2절에서 분명하게 알려 주고 계세요. 하나님의 군대를 야곱이 발견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고 정하잖아요. 하나님의 군대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보였단 말입니다. 그 뜻이 뭐겠어요. 그 하나님의 군대는 야곱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누가 널 건드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그러니 너는 담대하게 너의 갈 길을 가는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데, 그 똑똑한 야곱도 그걸 못 깨달아요. 그래서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온갖 인간적인 궤계를 꾸며냅니다. 그러다가 외동딸 다나가 세겜족속의 추장에게 못된 짓을 당하고, 둘째 셋째 아들들이 대 학살을 저질러서 가문이 멸절될 위기를 격어내면서 비로소 깨닫는 거예요. 창35:3에서,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요1:12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가 아파서 울고 있을 때, 귀찮다고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보내 버리십니까? 절대로 못하죠. 오히려 그 아이를 끌어안고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잖아요.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그것을 감사하라는 거예요.
우리 교회도 많이 아팠습니다. 아니, 아직도 아픕니다. 그러나 그 지독한 고통의 시간에 우리만 홀로 모든 아픔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지난 주 주일 오후에 윤석호 집사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받고 나서 많은 걱정이 있었습니다. 떠나간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도, 무너진 새벽 제단을 다시 세우는 일도 걱정이었습니다. 교회가 운영되어 나가자면 경제적인 힘도 필요합니다. 새벽기도를 시작하면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붙들고 기도했죠. 그러한 저의 염려는 정말 불피요한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나의 증표를 보여 주셨습니다. 목사가 목회를 두 달 반을 쉬더니 영적인 감각이 둔해졌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것이지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제 핸드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감사합시다.
3. 환난 뒤에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라(5-10).
야곱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후손 중에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 배출이 됩니다. 그는 야곱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굳세게 견딥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 천년왕국의 기틀을 세운 성군 다윗입니다. 다윗은 시27편에서 원수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와도, 군대가 나를 치려고 진을 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실지로 그랬습니다. 시27:5를 보면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죠.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그가 환난 날에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27편 마지막 절, 14절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본문 5-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외하라구요. 다윗은 이 명령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무려 13년이었지요. 그 대가는 7-10절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아니 다윗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그 이상이었습니다. 7-10절을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교회가 큰 일을 겪고 있음에도 동요함이 없이 자리를 지켜주신 여러분에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 그리고 개입하심을 믿고 교회를 지켜주신 여러분에게 삶의 약속은 물론이거니와 이 교회를 통하여 영적인 풍성함도 허락하셨음을 믿으십시오.
III. 적용 및 결론
우리의 형편이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추수감사절은 돌아왔습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습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때때로 형식적으로 치루는 그저 행사를 위한 행사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처럼 힘든 상황에서는 더욱 감사가 형식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절은 절대로 형식적으로 드릴 수 없는 절기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시편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어떻게 감사절을 형식이 아닌 진심으로 맞이하고 또 보낼 수 있겠습니까? 감사의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심지어 환난을 이용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때에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견딘 자에게 크신 축복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필요없죠.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일에는 반드시 결과가 나타납니다. 미래를 약속하신 하나님게 감사합시다.
첫댓글 너무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교회가 하루속히 안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환란중에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며 이것 또한 감사할 조건이기를...
말씀과 관심과 기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 질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