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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불교의 역사 >
1. 후한의 불교
고대 아시아에 성립하였던 두 개의 커다란 문화권은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이다. 이 두 개의 문화권은 지리적으로는 같은 아시아 대륙에 존재하며 땅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기후나 풍토 등의 자연적 조건은 물론 인종, 언어, 풍속, 관습, 사회구조 등의 차이도 뚜렷하다. 기원전 1500년 경에 인도에서는 베다 문명이 꽃을 피웠으나 중국에서는 은주(殷周) 문명이 발달하였다.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붓다가 활약하였던 기원전 5, 4세기 경에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였고 공자나 노자를 비롯한 많은 사상사들이 출현하였던 시대였다.
이 두 개의 단절되었던 문화가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말 중앙아시아를 횡단할 수 있는 동서교통로가 열린 무렵부터였다. 서쪽 로마제국에서부터 동쪽 장안(長安)에 이르는 실크로드가 개설되고 동서교통에 의한 통상교역이 확대되었다. 서북 인도에서부터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지방으로 전파된 불교는 실크로드의 상인들과 함께 점차 중국에 전파되었다. 불교는 서북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파한 것만이 아니고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를 우회하여 남부해로를 통하여 베트남을 경유하여 중국남부에도 전해졌다.
인도 승려와 서역 승려가 중국에 건너오기도 하였으나 중국 승려인 법현, 현장, 의정 등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전을 가져오기 위해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긴 세월에 걸쳐 서역을 순례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빈번한 문화교류에 의하여 불교는 이질적인 문화권인 중국에 점차 전파되었던 것이다. 중국에 전해진 경전을 다라니를 제외하고 모두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자기들의 언어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한 노력의 결과이다. 그로 인하여 불교 전래가 시작되면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경전의 한역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후한 이후 송대에 이르기까지 천년 동안 이러한 작업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또한 현장의 역경사업을 완성시킨 번경원 처럼 국가적 사업으로 조직적으로 행해진 번역사업의 결과로 세계의 번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한역대장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한역대장경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중국불교이다.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한자문화권의 성립과 아울러 한역경전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경전의 번역뿐만 아니라 중국의 불교인들은 많은 불교전적을 저술하였다. 세일론, 버마, 타이 등의 남방불교와 중국불교가 다른 점을 대승불교권이라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중국에서 발전되고 형성되어 천태종이나 화엄종 같은 교학을 형성하고 선이나 정토와 같은 실천불교를 탄생시켰다.
인도에서는 원시불교에서 부파불교가 발달하고 다시 대승불교가 흥기하였는데, 중국에는 인도불교의 발전단계와 상관없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소승경전과 대승경전 간에 교리상 해석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모든 경전에 대한 가치판단을 위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이 행해지게 되었다. 교상판석으로 각 종파는 자신들의 위치를 결정지었으며, 또한 나름대로 경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교상판석은 중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연대에 대해서는 중국문헌에 몇 가지 설이 기록되어있다. 그것은 주대(周代)에 이미 중국인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고도 하고, 그보다 뒤인 후한대의 명제(明帝)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수백 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된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앙아시아에 전해져서 중앙아시아와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어느새 불교가 들어와서 그 정확한 연대를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는 민족 신앙인 도교와 불교의 항쟁이 계속되었고 불교교단이 성립하여 상당한 세력을 갖게 됨과 동시에 그에 자극되어 도교교단도 형성되어 이 두 세력간에 우열이 논해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불교는 전래가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내세워서 그 권위를 유지하려고 불교전래의 역사를 아주 오랜 시대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불교전래에 대한 여러 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구법설(求法說)이다. 명제의 구법에 대한 기사는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후한의 명제가 꿈속에서 금인(金人)을 보았는데 그 금인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고 사절을 서역으로 보내서 불법(佛法)을 얻어오도록 하였다.
도중에 白馬(백마)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오는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사람을 만났는데, 영평 10년 그들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때문에 명제는 크게 기뻐하여 국도의 낙양문 밖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우고 그들을 거기에 주석하도록 하였으며, 여기에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 역출되었다고 한다. 이 설은 삼국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것으로 오랫동안 이것을 사실로서 인정해 왔다.
그러나 현재는 몽견(蒙見) 구법사절단 파견의 연대, 사자의 이름 등이 문헌마다 갖가지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당시 중국과 서역과의 공식사절은 없었으며, <사십이장경> 그 자체가 후세의 초출(抄出)이라는 점에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는 아마도 불교가 황제에 의해 중국에 받아들여졌고, 또 황제의 존신(尊信)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들어 불교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역사가들이 주목하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하나는 <위략>의 기록이고, 또 하나는 <후한서>의 초왕영전이다. <위략(魏略)>이라는 글은 <삼국지> 가운데 <위지(魏志)> 서융전(西戎傳)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인데, 위인(魏人) 어환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 속에 전한말(前漢末) 애제(愛帝)의 원수(元壽) 원년(기원전 2세기)에 박사제자(博士弟子)인 경려(景慮)가 대월지국왕의 사자 이존(伊存)에게서 <부도경(浮屠經)>을 구수(口受)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료로서 신빙성도 있고 불교전래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후한서> 72권 초왕영전(楚王英傳)의 기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영(英)은 명제가 이복동생으로 영평 8년 황제에 대해 이심(異心)이 있다고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명제가 영에게 내린 칙서 가운데 영이 평소에 불교를 존경하고 사문, 우바새를 공양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 때에 영이 명제에게 헌상한 재물을 돌려보내고 그 봉불을 도우려 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초왕영의 봉불은 명제의 구법설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불교는 전한말기, 즉 서력기원이 시작되기 전후 무렵에 중국인의 이목에 띄게 되었고,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장안(長安), 낙양(洛陽)으로부터 다시 초왕영의 봉지인 평성(彭城) 근방까지 발달하여 후한왕족의 귀의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존의 불경구수설(佛經口受說)이나 초왕영의 봉불이 모두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일 뿐, 이것이 곧 중국인이 불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거나, 혹은 귀의했다는 최초의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력 기원이 시작되는 전후 경에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었다는 것은 육로에 의한 동서교통이 열렸다는 점에 유래하고 있다.
중국인이 불교를 알고 초왕영이 불교를 신봉했다고는 하지만 불교가 확실히 중국에 기초를 굳힌 것은 후한 말에 불전의 한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후한 말엽 환제(桓帝) 때 중국에 도래한 승려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讖)이 있다.
안세고는 안식국의 태자였는데 부왕의 죽음으로 인해 출가하였으며 아비달마교학과 선경(禪經)에 통달하였다. 그는 환제로부터 영제(靈帝)시대에 걸친 약 20년간 오직 경전의 한역에 종사하였다. 역출 경전은 <사제경(四諦經)>, <전법륜경(轉法輪經)>, <팔정도경(八正道經)>,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등 34부 40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것들은 모두 소승경전에 속하는 것이다. 안세고는 뒤에 후한 말의 소란을 피해서 남방으로 건너가 회계(會稽)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지루가참은 안세고보다 조금 늦게 중국에 들어왔다.
월지국 출생으로 환제의 말경 낙양에 이르러 영제시대에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수능엄경(首楞嚴經)>,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등 13부 27권을 역출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가 대승경전이다. 이 두 사람이 2세기 중엽에 후한의 수도 낙양에서 각기 대승과 소승의 경전을 역출한 것은 각자의 출신지에 따른 불교계통의 차이에 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들을 대하는 중국인들은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하는 원시적인 사상형태의 소승경전과 교학의 발달한 대승경전을 동시에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성립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았고 그 동안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2. 위진 남북조의 불교
위진(魏晋)의 360여년 간은 진(秦)과 한(漢)에 걸친 400여년의 통일시대를 이어 다시 중국이 분열한 시대였다. 안세고와 지루가참이 중국에 건너왔던 후한의 환제와 영제시대는 후한의 정치적 통제력이 약화하여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후한 말이 되어 관신이 발호하여 명사나 학자가 탄압을 받아 한나라 왕실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군웅이 봉기하고 종교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침내 한제국은 무너져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 분립시대가 되었다가 다시 진(晋)에 의해 통일되었다.
삼국 중에서 위는 화북을 점유하고 그 세력도 강하였으며, 오도 강남의 옥토에 근거하였으나 촉은 사천의 분지에 위치하고 영역도 작았다. 이 촉에 들어간 불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촉의 불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촉을 제외하면 삼국시대의 불교의 중심지는 북에서는 낙양(洛陽)이었고, 남에서는 건업(建業)이었다. 위, 오, 촉 삼국의 정립시대에 강북에서 활약한 번역가는 중인도의 담가가라(曇柯迦羅) 등이며, 강남에서는 오의 지겸(支謙), 강승회(康僧會) 등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담가가라가 가평 2년(250) 낙양에서 역출한 <승지계본(僧祗戒本)>과 담제가 역출한 사분율(四分律)의 수계작법인 <담무덕갈마>는 이제까지 중국의 승려가 단지 삭발만을 할 뿐 정규적인 수계작법을 알지 못하던 것을 엄격하게 시행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 법에 따라 중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출가한 사람이 주사행(朱士行)이었다고 한다.
오의 지겸은 대월지국의 말예(末裔)로서 어려서 그 조부인 법도와 함께 중국으로 귀화하였는데, 지루가참의 문인 지량(支亮)에게서 배웠고 손권의 총애를 받아 박사가 되고, 동궁의 보도(輔導)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아미타경>, <유마경>, <서응본기경>, <대반니원경> 등을 번역하였고, 또 <무량수경>, <중본기경>에 의하여 <찬보살연귀범패삼계>를 제작하였으며, <요본생사경>의 주해도 달았다.
강승회는 원래 강거(康居) 사람으로 후에 인도로부터 교지(交趾: 베트남 중부)로 옮겼다가 출가하여 적오 10년(247) 건업(建業)에 이사하여 육바라밀의 실천행을 설하는 <육도집경> 등을 번역했는데 그의 본 뜻은 실천포교에 있었으며, 오주 손권을 귀의시켜서 강남에 처음으로 건초사(建初寺)를 건립한 것은 유명하다. 또 그는 지겸과 마찬가지로 범패에 뛰어나 미성(美聲)이었다고 한다.
위는 촉을 멸망시키고 위의 장수인 사마염은 제위를 뺏은 뒤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진(晋)이라고 했다가, 다시 오를 멸망시키고 약 50여년 동안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것을 서진(西晋)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번역승으로서 대표적인 인물은 축법호(竺法護)이다. 월지인의 말예(末裔)로서 돈황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월지보살, 돈황보살이라고 존칭되었다.
그는 8세에 출가하였고, 당시 방등(方等)경전이 서역에 많다는 말을 듣고 서역을 순례하여 많은 범본을 얻었다. 돈황으로부터 장안으로 들어가 태시(泰始) 원년(265)부터 영가 2년(308) 78세로 입적하기까지 약 40년간을 오로지 역경에만 종사하였는데 <광찬반야경>, <정법화경>, <무량청정평등각경> 등 모두 154부 309권을 번역함으로써 중국불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축법호가 범어나 서역어에 정통하였다는 점과 그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승려가 늘 수천에 이르렀으며 특히 섭승원, 섭도진 부자처럼 역장에 있으면서 그의 역경을 전어(傳語), 필수(筆受), 권진(勸進)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어서 중국은 북방에 오호(五胡: 흉노, 선비, 갈, 저, 강)가 다투어 일어나 서진을 멸망시키고 진의 일족은 남하하여 건강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東晋)이라 불렀다.
오호가 세운 나라는 이조(二趙: 전조, 후조), 삼진(三秦: 전진, 후진, 서진), 사연(四燕: 전연, 후연, 남연, 북연), 오량(五凉: 전량, 후량, 서량, 남량, 북량), 하(夏), 성(成) 등의 16국인데 그 중 전량, 서량, 북량은 한족이지만 이것을 통틀어 5호 16국이라고 한다. 따라서 북지는 모든 종족이 서로 쟁탈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고 인심도 극히 각박하였으나 불교는 오히려 성행하였다.
이것은 한족에 있어서 불교는 외래종교이며, 그 설하는 바도 외래의 사상이라는 풍조가 있었는데 반해, 5호 사람들은 원래 고유문화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스러운 입장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통치자도 군사나 그 밖의 결단을 필요하는 사건에 대처하여 명확한 판단을 얻는 데에 주술에 능하거나 통달한 신이승(神異僧)을 환영하였다. 그 중에서도 후조, 전진, 후진, 북량의 4국에 있어서는 불교의 융성이 특히 두드러졌다. 후조는 업에 수도를 정하고 한 때는 북지 전역을 통일하였다.
불교계에서는 구자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이 대표자이다. 그는 오장과 계빈에서 수학하고 서진의 영가 4년(310) 낙양에 들어갔는데 뒤에 후조의 건국자인 석륵(石勒)의 패업(覇業)을 도와 존숭되었다. 이어서 석호(石虎)에게 깊은 예우를 받게 되었으며 건무 14년(348) 117세로 입적하기까지 약 38년간에 걸쳐 불교의 홍포에 힘썼다. 불도징의 문도는 항상 수백을 넘었으며 전후 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중 도안, 법화, 축법태, 축법아, 법상 등이 다음 대의 불교계를 이어갔으며 그 가운데 도안이 으뜸이었다.
도안은 상산부류(常山扶柳) 사람으로 12세에 출가하여 불도징에게 사사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뒤에 후조 및 전연의 병란을 피해서 동학 5백여명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그가 양양(襄陽)의 단계사에 있을 때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따르는 자가 많았으며 문필가로 알려진 습착치 같은 사람도 도안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그는 양양에 15년간 살았는데 전진의 부견은 강북을 통일하여 도안의 명성을 듣고 10만의 대군을 보내 양양을 공략하여 도안과 습착치를 장안으로 모셔왔다.
그는 이때로부터 7년간 장안의 오중사에 주석하였으며 그의 승도는 항상 수천명이나 되었고, 가르침을 전하는데 힘쓰다가 건원 21년(385) 7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도안은 전역된 수많은 경전에 대한 목록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종리중경목록>이며, 이를 세상에서는 <도안록>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양(梁)의 승우(僧祐)는 새로이 역출된 경전을 여기에 보강하여 <출삼장기집>을 편찬하였으며 이것으로 <도안록>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다. 그 뒤 <역대삼보기> 이하 각 시대를 통하여 경전의 목록이 편찬되어 후대의 불교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도안은 <방광반야경> 등을 강의하고, 여러 경전에 서문을 작성하고 주석을 단 것이 거의 22부에 이르렀다. 종래의 경전해석이 노장의 무(無)사상을 빌어서 불교의 반야사상을 설명하는 이른바 격의불교였고, 축법아, 강법랑, 동진의 축잠의 본무의(本無義), 지둔의 즉색의(卽色義), 축법온의 심무의(心無義) 등이 이 뒤를 따랐으나 도안은 이를 비판하고 공(空)을 일체제법 본성공적(一切諸法 本性空寂)이라고 풀이했다.
이것은 이어 구마라집에 의해 전해지는 용수의 사상을 이해하는 근저가 되었다. 종래의 출가자들의 성은 주로 출생국이나 스승의 성을 따랐는데, 도안은 이를 비판하고 출가자는 모두 불타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이므로 석(釋)씨로 성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석도안으로 칭하였다. 또 도안은 승니궤범, 불법헌정삼례(佛法憲章三例)를 제정하여 종래 잡다한 행의방법을 통일하였다.
전진의 뒤를 이은 후진에서는 불교가 더욱 성행하였는데, 그 대표자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인인 구마나염이며, 어머니는 구자국왕의 누이인 가비가였다. 그는 7세에 출가하여 9세 때에 어머니와 함께 계빈으로 가서 반두달다에게서 소승을 배우고, 수리야소마에게서는 대승을 닦았으며 그 밖에도 여러 스승들에게서 수학을 거듭하고 구자로 돌아온 뒤로는 대승의 선양에 전념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서역제국은 물론 한토에까지 알려졌다.
이 때 전진의 부견은 도안으로부터 구마라집의 명성을 전해듣고 여광(呂光)에게 구자국을 멸망시키고 구마라집을 붙잡아 오려고 했으나 도중에 전진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장(姑藏)에 할거하여 후량국을 세웠다. 그 때문에 구마라집은 10여년 동안 머물렀으며 후진의 요흥(妖興)은 후량을 토벌하여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데려갔다. 그 때 그의 나이 58세로 홍시 3년(401) 12월이었다.
요흥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여 서명각과 소요원을 하사하고 후에 그를 위하여 장안대사를 건립하여 경전번역의 도량으로 제공하였다. 구마라집은 장안에서 역경에 12년 동안 종사하다가 홍시 15년(413) 4월에 70세를 일기로 장안대사에서 입적하였다.
그 동안 역출한 경전은 70부 384권에 이르렀으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반야, 법화, 유마, 미타 등의 여러 대승경전과 <중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성실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대승론부는 이 때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졌으며 뒤에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삼론, 성실 등의 종파가 흥기하였다.
한편 북량에서 활약한 담무참(曇無讖)이 있다.
그는 처음에는 소승을 배웠다가 뒤에 대승으로 돌아갔는데 계빈, 구자, 돈황을 거쳐서 현시 원년(412) 고장(姑藏)으로 들어가 하서왕인 저거몽손의 예우를 받았으며 현시 10년에 <대반열반경> 40권을 역출하였고, 당시 이 지역에 있던 혜숭, 도랑 등이 필수자가 되었다.
뒤에 강남에서 혜엄, 혜관 등이 사영운 등과 함께 법현의 6권 <니원경>과 이 40권본을 대교하여 새롭게 6권의 <열반경> 남본을 만들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열반경의 연구가 성행하여 제(齊), 양(梁) 사이의 보량(寶亮), 양의 지장(智藏) 등은 각기 의소를 찬술하여 열반학파가 강남에서 번영하게 되었다.
도생, 각현 등의 강남에서 활약한 배후에는 장안의 구마라집과 쌍벽을 이룬 혜원(慧遠)이 있었다. 혜원은 21세에 그의 동생인 혜지와 함께 도안문하로 들어가 양양에 있었으나 때마침 병란이 있어서 스승과 헤어져 여산으로 들어가 동림사에서 30여년을 주석하였다. 그 동안 손님을 전송할 때도 호계까지에 그쳐 산을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불법홍포에 전념하여 원흥 원년(402) 유유민, 주속지 등 230명의 도속들과 함께 결사하여 염불을 행하였다. 그의 염불은 오로지 <반주삼매경>에 의해서 시방현재불의 하나로서 미타불을 염하는 것으로 후세의 미타염불과는 다른 것인데, 뒤에 정토교에서는 혜원을 정교종의 시조로 삼고 있다. 혜원이 강남에서 명사들을 많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훌륭한 반야학자였던 데에도 원인이 있지만 유학과 노장사상에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혜원은 의희 12년(416) 83세로 동림사에서 입적했는데 그 사이에 그의 요청에 의해 각현은 <달마다라선경>을 역출하여 강남에서 선정의 보급에 힘썼다. 혜원 자신은 불교의 난해한 사상에 대해서 구마라집에서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이 서신은 <대승의장>으로 현존하고 있다. 또 그의 저작인 <사문불경왕자론>은 당시 환현이 사문으로 하여금 왕자에 예배하도록 한데 반론하여 저술된 것이다.
(1) 남북조의 불교
남북조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남조와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북조를 가리킨다. 북위의 태무제가 화북의 여러 나라를 통일하고 나서 수가 남북을 통일하기까지 150년간을 말한다. 동진시대와 마찬가지로 화북은 호족 지배하에 있었으며 강남지방은 한민족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왕조의 변천은 어지럽게 행해졌지만 불교는 동진시대를 계승하여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던 시대이다. 엄청나게 번역되었던 한역불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 불교의 여러 학파가 성립되었던 것도 남북조 시대이다. 불교교단의 사회적 세력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북조에서는 북위 태무제의 폐불과 북주 무제의 폐불이 행해져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교단의 탄압이 행해졌다.
또한 종교교단으로 성립된 도교와의 대립항쟁이 있었던 것도 남북조 종교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북위의 낙양이나 남조 건강(建康)에서 이루어진 불교사원의 아름답고 우아한 건축, 미술이나 운강, 용문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교문화의 발달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남조(南朝)의 불교
남북조에 있어서 불교의 활동양상은 이전과 다르다. 강남의 불교는 귀족사회의 고답적인 사상의 논의에 의해 교학이 발전했다는 것과 법사(法社)의 형성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강북에서는 오호의 국왕이 불교의 신이(神異), 방술(方術)을 환영하고, 이것을 열렬하게 신앙하였으며, 왕이나 고관이 행하는 사탑(寺塔)의 건립, 불상(佛像)의 조립 풍조가 일반 민중에게까지 유행하였다.
송(宋)의 무제는 처음에는 승려의 수를 줄이려고 했으나 시행하지 않고 구마라집의 문하인 혜엄(慧儼), 승도(僧導) 등을 예우하고 문제(文帝)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불교교리를 연구하고 상서령인 하상지(何尙之)에게 인과(因果)의 이치를 하문하였으며 고승을 내전으로 청해 경전을 강설하도록 했으며 또 중흥사에서 팔관재를 여는 등 크게 보호했다.
그리고 또 혜림(慧琳)으로 하여금 국정에 참여하게 하여 세인들이 그를 흑인의 재상이라고 불렀다. 그런 까닭에 당시의 이름난 귀족들이 불교에 관계하였으며 따라서 건강(建康)의 불교는 융성하였다. 혜림은 또 <백흑론>을 저술하여 유불의 같고 다름을 논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하승천(何承天)의 <달성론>, 혜원문하의 종병(宗炳)이 쓴 <난백흑론>과 <명불론>, 안연지(顔延之)의 <석하형양달성론> 등이 계속해서 저술되어 모두 불교교리를 논하였다.
제(齊)의 고제(高帝)와 무제(武帝)는 모두가 불교에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특히 무제의 태자인 문혜태자, 숙자량은 깊이 귀의하여 늘 고승을 초대했으며, 숙자량은 스스로 불법을 강의하고 화엄회, 용화회, 도림회를 설치하여 사신(捨身), 방생(放生), 시약(施藥)을 행했으며 일반인들을 위하여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불교를 설한 <정주자정행법문> 20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번역가로서는 <무량의경>을 번역한 담마가타야사, <선견율비바사>를 번역한 승가발타라, <백유경>을 번역한 구나비지, <법화경제바달다품>을 번역한 달마마제 등이 있다.
양(梁)대 55년간은 남조불교의 전성시대로서 특히 치세 48년에 걸친 무제(武帝)의 불교신앙은 역대 제왕 중에서 가장 돈독했다. 무제는 원래 숙자량의 문인이며 천감 3년(504) 4월 8일 불탄일(佛誕日)을 기하여 도속 2만여명을 이끌고 중운전에서 사도봉불(捨道奉佛)식을 거행하였고, 천감 10년(511)에는 스스로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표하였으며 다시 천감 16년(517)에는 제사(祭祀)를 위해 생류(生類)를 죽이는 것을 금지함과 함께 천하의 도관을 폐하고 도사를 환속시켰다. 이 때문에 양의 도사들은 북제(北齊)로 이주했다고 한다.
강남의 역경은 송(宋) 초에는 활발했으나 제(齊)와 양(梁) 2대에는 불교의 융성에 비해 완만해지다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남해를 경유한 역경가를 맞이하여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 대표자가 진제(眞諦)이다.
진제는 서인도 사람으로 양무제의 초청을 받고 대동 12년(546) 해로를 따라 광주에 이르러 태청 2년(548) 건강으로 들어가 무제를 만났으나 후경(侯景)의 난 때문에 부춘(富春)으로 옮긴 다음 뒤에 잠시 건강으로 돌아왔다가 양(梁) 말엽의 난을 피해 예장(預章)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던 끝에 진(陳)의 대견 원년(569)에 광주에서 입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역경에 전념하여 49부 142권의 경론을 역출하였다. 그의 역경 가운데 특히 <섭대승론>, <섭대승론석>, <대승기신론>, <십칠지론>, <결정장론>, <중분별론>, <전식론>, <금광명경>, <불성론>, <유식론>, <삼무성론>, <아비달마구사석론> 등의 번역은 섭론종, 구사종을 낳게 했으며 유식학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진(陳)의 5세 33년간은 양의 불교를 이어받았다. 즉 문제는 양말의 전란으로 파괴된 금릉의 사찰을 복원했으며 무차대회를 열었는데 문제, 선제, 후주도 이를 따라 사신(捨身)공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혜사(慧思)가 있었는데 그는 북제의 혜문(慧文)에게서 법화의 미묘한 이치를 체득하였는데 양 원제의 승성 3년(554)경 광주 대소산으로 들어갔다가 후에 다시 남악(南嶽)으로 옮겨 10여년간을 머물면서 오직 행화(行化)를 일삼았다. 그를 세상에서는 남악대사라고 부른다. <대승지관법문>, <무쟁삼매법문>, <안락행의> 등이 그의 저술이라고 알려져 있다.
(3) 북조(北朝)의 불교
북위(北魏)에 있어서도 불교는 성행했으며 특히 교단의 발전은 눈부시게 이루어져 사원수가 3만, 승려가 3백만 명이었다고 하며, 특히 태조 도무제 자신도 불교를 신봉하고 보호하였고, 태종 명원제도 마찬가지였고, 세조 태무제도 관중(關中)에서 국도인 평성(平城)으로 온 담시(曇始)를 중히 여겼는데, 뒤에 도교로 전도하여 드디어 폐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도교는 한말 삼국시대의 장각, 장수, 장노 등이 주창한 태평도 및 오두미도에 비롯하여 <노자도덕경>을 독송하면서 기도, 부적, 주술에 의해 치병을 일삼는 속신으로 같은 시대의 좌자, 갈현 등에 의해 창도된 신선(神仙), 양생(養生), 단약(丹藥)의 방술과 합류하여 조직화되어 천사(天師) 밑에 도강, 제주, 도둑, 주부, 간령, 귀사 등의 직제를 두고 널리 신도를 획득하였다. 다시 거기에 노장의 철학을 가미하여 서진시대에는 제주왕부가 하내의 불승인 백원(帛遠)과 더불어 도불의 논쟁을 하여 <노자호화경>을 만들 만큼 발달하였다.
이어서 동진시대에는 갈홍이 <포박자>, <신선전> 등을 저술하였고, 여산의 도사인 육수정이 송의 명제의 명을 받아 건강의 숭허관주가 되어 <상청진경>을 비롯한 도교경전을 증보하고 모든 파의 도교를 정리하여 통진, 통현, 통신의 삼통으로 분류하여 그 목록인 <현도관경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양의 도사인 도홍경도 모산에 은거하면서 <진고> 7편을 만들었고, 북위의 구겸지에 이르러서는 도교가 국가적 종교로까지 발전하였다. 구겸지는 20년간 숭산에서 수행 후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에게서 천사의 위와 <운중음송신과지계> 20권을 전수받았다고 칭하면서 북위의 수도인 평성으로 나와 사도 최호의 존경을 받고 그의 추천에 의해 태무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태무제는 이 때문에 평성의 동남부에 천사도량을 세우고 스스로 태평진군이라 칭하고 연호도 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바꾸고, 사문을 탄압하고 가혹한 폐불을 단행하였다. 그 주모자는 구겸지와 최호이지만, 그 배후에는 당시 호족과 한족과의 항쟁이 있었고, 당시 교단의 경이적인 발전은 승려의 타락과 교단의 부패를 가져왔으며, 거기에 사원과 승려의 증가로 인해 국가경제의 피폐도 폐불을 단행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던 것이다.
개오(蓋吳)의 난을 친정한 태무제는 태평진군 7년(446) 2월 장안의 한 사원에 많은 병기를 감추어 놓고 실내에 양주구나 부녀의 밀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개오와 내통한 모의와 불교의 타락에 개탄한 나머지 최호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폐불을 단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죽고 최호는 족주(族誅)되었다. 폐불 후 6년 태무제가 죽고 문성제(文成帝)가 즉위하자 불교부흥의 칙서가 내려졌다. 이 때에 담요(曇曜)는 사문통으로 임명되었고 교계에 군림함과 동시에 대동운강의 대석굴을 개착하였으며, 헌문제(獻文帝)도 장육석가상을 조립하고 또 높이 약 100m의 영녕사탑을 건립하였다.
효문제(孝文帝)는 도등(道登), 승연(僧淵) 등을 스승으로 하여 낙양에 천도하면서 용문에 대석굴을 개착하였다. 선무제(宣武帝)는 스스로 보리유지의 역경에 필수를 담당하였으며, 당시 서역에서 도래한 사문만도 3천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 때에 경전 번역사업이 가장 성행했다. 담요는 길가야와 함께 <잡보장경>, <부법장인연전> 등을 번역하였고, 인도승 보리유지, 늑나마제, 불타선다는 선무제 치하에서 활약했는데 그들이 번역한 <십지경론>은 지론종을 흥기시켰고 남북 2도파로 갈라져서 <화엄경> 중시의 풍조를 만들었다.
보리유지는 <금강반야경>, <입능가경>, <무량수경론>을, 늑나마제는 <보성론>을, 불타선다는 <섭대승론>을 번역했다.
북위는 분열하여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지고, 각기 업과 장안에 수도를 정했으며 동위는 고환, 서위는 우문태가 다스렸다.
이어서 고환의 아들인 고양이 북제(北齊)를 건국하고(550), 우문태는 형의 아들인 우문호가 혁명을 일으켜 북주(北周)를 건국하고(557) 우문태의 아들인 우문옹을 옹립되어서 무제가 되었다. 고양 즉 북제 문선제의 봉불은 강남의 양무제에 비유되며 혜광제일의 문인인 법상(法上)을 계사로 하여 천보 6년(555) 폐도(廢道)의 칙을 내릴 정도였으나 이에 대립하는 북주의 무제는 부국강병책을 강행하는 데 있어서 절과 승려가 많다는 것을 무익하다고 여겨 폐불을 단행하였다.
즉, 천화 2년(567) 환속승인 위원숭의 폐불에 대한 상소 및 도사 장빈의 암약을 발단으로 무제는 천화 4년(569)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승려, 도사 및 중신을 불러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우열을 논하게 하였으며, 그 동안에 불교도측에서는 견란의 <소도론>, 북주 도안의 <이교론> 등의 상소도 있었으나, 무제는 건덕 3년(574) 3월 도불 2교를 모두 폐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로 인하여 사원의 경전과 불상은 모조리 파괴되고 승려도 모두 환속하게 되어 군민에 편입되었으나, 지조가 굳은 승려는 대부분 법란을 피해서 산중으로 숨거나 강남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폐불로 말미암아 북주의 불교는 한 때 파멸지경에 이르렀으나 얼마 안 가 무제가 병사하고 이어서 즉위한 선제, 정제 때에는 다시 불교가 부흥하였다.
3. 송(宋)의 불교
귀덕군의 절도사인 조광윤은 후주의 선양를 이어 제위에 오른 뒤 송(宋)을 건국하여 수도를 개봉에 정했다. 후주의 현덕 2년(955) 세종의 파불사건을 이어받은 송태조는 먼저 불교의 부흥정책을 취하여 민심의 파악에 힘썼다.
건릉 원년(960) 6월에는 천하의 제 사원에 칙서를 내려서 후주가 발한 무액사원의 폐훼에 대한 정지를 명하여 폐해야 할 사원으로서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사원의 존속을 허락하고 이미 폐한 사원의 불상을 옮기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조사나 도승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었으며 세종의 숙청정책을 답습하면서도 극단적인 면만을 시정하였다. 태조는 건국의 해에 황제 탄생일인 2월 16일을 장준절이라 정하고 수도인 개봉의 상국사로 백관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 후로 태조는 종종 상국사로 행차하여 기우의 건재를 올렸고, 개보 2년(969)의 장준절에는 천하의 사문에게 경율론의 교의 10조를 전시(殿試)하였으며, 이에 장원한 자에게는 자의(紫衣)를 하사하였다. 시경도승(試經度僧)과 전시(殿試)에 의한 교단의 숙청 및 승니의 향상을 기하였다.
태조의 칙서에 의해서 우가응제사문인 문승은 <대장경수함색은> 660권을 편수하였으며, 또 개보 4년(971) 고품의 장종신에게 촉의 익주로 가서 대장경판의 조조(雕造)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불교 보호정책은 태종에 이르러 송조(宋朝)의 기초확립과 함께 성과를 보게 되었다.
태종은 태평흥국 원년(976) 칙서를 내려서 천하의 동자들을 널리 제도하였는데 그 수가 17만명에 이르렀다. 그 다음 해 동경의 태평흥국사에 개선전을 세워 태조의 어용(御容)을 봉안하여 선제향화의 대사로 하였다. 이것은 후주이 세종에 의한 파불로 폐해졌던 용흥사가 부흥된 것이다. 현서, 감숙지방이 송의 판도에 들자 서역과의 교역도 열리게 되어 우진, 고창의 사문들이 왕래하였다. 창수의 사문 도원은 인도로 건너가 18년간을 내왕하면서 불사리와 패엽의 범경 등을 진헌하였다. 그 때 천축구법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승려를 모집하였는데 157명이 응모하였고, 그들에게 행장전(行裝錢)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다.
이 같은 기운을 타고 서인도의 사문 가지, 법견, 진리 등 세 사람이 오게 되었으며, 이어서 남인도 사문 미라 등 14명이 들어왔다.
중인도의 법천삼장인 범진이 집필철문하였으며 왕구종이 윤문하였다. 왕구정의 상소에 의해서 태조가 이를 알고 법천을 궁중으로 불러서 자방포(紫方袍)를 하사하였다. 또 법진은 법천삼장으로 하여금 불전번역사업을 일으키도록 진언케 하여 태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 무렵에 천식재와 시초 두 삼장이 내조하여 이때부터 역경사업이 착수되었다. 태종은 중사 정수균에게 명하여 동경 태평흥국사의 서쪽에 역경원을 세우게 했으며, 중앙을 역경당이라 하고 동서를 윤문당, 서서(西序)를 중의당이라 이름하였다. 태평 흥국 7년(982) 6월에 이 역경원은 준공하였고, 천식재 등 여러 삼장이 주석하여 가지고 온 범본을 역출하게 되었다.
송대의 국가사업으로 태평 흥국사의 역경원에서 새롭게 번역된 경전은 천식재의 <성불모경>, 법천의 <길상지세경>, 시호의 <여래장엄경> 각1권이며 이것들은 모두 대장경에 편입되어서 개판 유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금지되었던 범본의 번역이 차츰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매년 신역불전을 진헌하였으며 신경은 모두 대장경에 입장하여 유행시키게 되었다. 송의 역경사업은 태종, 진종때부터 인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중 상부 8년(1015)에는 양억, 유정 등에 의해서 <대중상부법보록> 21권의 신역경전목록이 작성되었고, 그 속록으로서 경우 4년(1037) 유정 등에 의한 <경우신수법보록> 21권이 있다. 이를 전후하여 <천축자원>과 <신역경음의> 70권의 사서(辭書)가 저술되었으며, 천성 5년(1027)의 <천성석교총록> 3권은 당의 개원록, 정원록에 송대의 신역입장경전을 포함시킨 흠정대장경의 총목록이다.
불사와 승려의 증가에 따라 불전의 수요도 늘어나서 사경 외에 경문을 목판에 새겨서 그 판목으로 다량의 경전을 인쇄하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났다. 이 점에 만당(晩唐), 오대(五代)는 구식인 사경에서 신식인 인경(印經)으로 옮겨지는 과도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서력 10세기의 북송에 이르러서는 대장경의 출판을 보게 되었다.
송의 태조는 개보 4년(971) 고품인 장종신을 촉의 익주로 보내서 대장경판의 조조를 명하였다. 이 대사업은 그 후 12년이 걸려서 태종의 태평흥국 8년(938)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개원록에 수록한 경율론 등 5천여권, 그 판목수는 십만여판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것은 개판지의 이름을 따서 촉판이라고 부르며 북송의 칙판대장경이라고 불리웠다. 이 대장경의 판목은 태평 흥국 8년 익주 성도에서 수도인 동경 개봉부로 진상했다. 그래서 태종은 태평흥국사 역경원 서쪽에 인경원(印經院)을 창립하고 여기에 경판을 보관하고 인쇄하였다. 이 때에 인경원은 역경원과 함께 전법원(傳法院)이라고 총칭하기도 했다.
4. 원(元)의 불교
원을 일으킨 몽고족은 요, 금의 시대에는 외몽고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2세기말에 태무진이 몽고의 부족을 통일하여 내외몽고에 세력을 키워갔으며, 1206년에는 대한(大汗)의 위에 올라 징기스칸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그가 바로 원의 태조이다. 태조는 먼저 서하(西夏)를 멸망시키고 금을 압박했으나 봉선(鋒先)을 서쪽으로 돌려 대서정(大西征)을 시작하였다.
이 서정은 태종시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몽고군은 유럽에까지 진출하였다. 서하와 급도 몽고군에게 항복하였으며 한반도까지도 그 세력하에 들어갔다. 세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원조가 출현했던 것이다. 원은 징기스칸이 즉위하고부터 멸망할 때까지 162년간 국호를 원으로 바꾼 세조의 즉위부터는 11대 190년간 계속되었다.
원조는 그 지배 지역내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대해 평등하고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적어도 반몽고적 색채를 띠지 않는 한 종교에 대해 자유로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마교는 티벳에서 일어난 불교의 한 파이지만 티벳 재래의 봄보교와의 융합하여 독특한 밀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몽고에 들어온 라마승은 나마였다. 그는 헌종시대에 전 몽고제국내의 석교(釋敎)를 총령하고 아울러 국가의 추기(樞機)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원대의 라마승으로써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팔사파(八思巴)이다.
그는 사키야파의 승려로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국사가 되고 티벳 및 구서하령(舊西夏領)의 일반 행정권과 몽고 제국내에 전 불교계를 통섭하게 되었다. 그는 또 한편으로 세조의 명을 받아서 티벳문자를 바탕으로 하는 몽고신자 이른바 팔사파문자를 제정하였다.
이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는 원말 순제 때에 만들어진 거용관과가탑(居庸關過街塔)에 새겨진 다라니와 그 밖의 것으로 알려졌다. 팔사파의 활약으로 라마교와 원조정과의 관계는 밀접하게 되었다. 이후 원조정은 라마승을 제사로 존숭하고 역대 황제는 제사로부터 수계를 받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세조의 지원 6년(1269) 불교와 티벳 관계사항을 처리하는 기관으로서 총제원(總制院)이 설립되었는데 나중에 선정원(宣政院)으로 개칭되었다. 이것은 제사(帝師)에 직속하여 일반 행정기구의 중책인 중서성(中書省)과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사의 명령은 소칙과 같은 권위로서 시행되었다.
선정원의 장관을 원사(院師)라 하였는데 2명을 정원으로 하여 그 하위자는 반드시 제사가 추거하는 승려로 하고, 동지(同知), 부사(副使), 참의(參議) 등도 각기 두 사람씩 승속병용으로 하였다. 그 후로 왕실의 라마교 우대가 고조됨에 따라서 이 기구도 확장되었고 명종의 천력 2년(1329)에는 원사가 10명까지 증원되게 되었다.
남송의 고토인 강남에 대해서는 세조 때에 항주에 강남석교총통소(江南釋敎總統所)가 설치되어 관내에 교단을 총령하고 그 장관인 총통에는 처음에 라마승이 임명되었다.
문종 때에는 불교통섭제도의 개혁이 행해졌으며 중앙의 선정원 밑에 전국적으로 16의 광교총관부(廣敎總管府)가 분치되어 불교교단을 획일적 조직으로 총령하였는데 이것도 얼마 안 가서 폐지되고 행선정원이 부활되었다. 지방의 주현에는 각기 승관이 설치되어서 그 지방의 불교일반을 감독하였다.
선정원과 함께 불교관계의 관부로서 중요한 것에 공덕사사(功德使司)가 있다. 공덕사사란 황제국가가 수공덕(修功德)을 위해서 행하는 불교적 사업을 처리하는 관부를 말한다. 지원 17년(1280)에 창설된 뒤로 때로는 중절한 때도 있었으나 문종시대까지 존속되어 불사집행의 추진역이 되었다. 공덕사사의 장관을 공덕사라 하여 10명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때로는 6명일 때도 있었다. 불사를 행하기 위한 기관으로는 따로 연경사(延慶司)가 있었다. 이것은 지원 21년(1361)에 설치되고부터 원말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은 주로 왕실의 사적인 불사를 집행하는 것이었다.
5. 명(明), 청(淸)의 불교
원말의 천재기아에 의한 사회불안 속에 미륵교비(彌勒敎匪) 한산동과 한림아 부자의 반란이 확대되어 드디어 송국(宋國)이라고 이름하였다. 곽자홍의 부하인 주원장은 원래 황각사의 승려였는데, 환속하여 병졸이 되었다가 부장이 되어 군옹을 파하고 금릉에 도읍하여 명(明)이라 호하고 제위에 올라 홍무(洪武)라고 개원하였다.
명조는 사원생활을 체험한 제왕의 독재하에 시정 또한 보수적이었으며 반란의 기반이 되기 쉬운 불교교단을 단속하면서 보호하였다. 원의 선정원의 제도를 본따서 불교통제기관으로서의 선세원(善世院)이 금릉의 천계사에 설치되었고 통령(統領), 부통령(副統領), 찬령(贊領), 기화(紀化) 등의 승관제가 정해진 것은 홍무 원년(1368)의 일이다.
홍무 15년(1382)에는 선세원이 승사록으로 바뀌었고, 선세(善世), 천교(闡敎), 강경(講經), 각의(覺義)의 승관을 두게 되었으며 지방의 부주현에는 각기 승강사(僧綱司), 승정사(僧正司), 승회사(僧會司)가 있어서 중앙집권적인 불교통제기관이 확립되었다. 또 홍무 6년(1373)에는 계율을 잘 지키고 경전에 능통한 자만이 도첩을 청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자는 40세를 넘어야만 출가하여 승니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제정되기도 했다.
송 이후 사원에서의 선(禪), 교(敎), 율(律)의 분류가 명대에서는 선(禪), 강(講), 교(敎)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이 분류에 따라서 홍무 15년에 선승은 다갈색인 옷과 홍조 옥색의 가사를, 강승(講僧)은 옥색 옷에 홍조 천홍의 가사를, 교승(敎僧)은 백의와 흑조 천홍의 가사를 착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명불교를 대표하는 선과 정토에 대해서 염불은 참선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참선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선정일치를 주축으로 하는 각 종파의 호융(互融)은 명대불교의 특색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에 불교 홍포에 힘쓴 주굉, 진가, 덕청, 지욱 등 사대사(四大師)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인 것이다.
운서 주굉은 절강 인화사람으로 화엄을 변융에게서, 선을 소암에게서 받아 정토에 귀의하여 지계 염불하였다. 그는 응경 5년(1571)에 항주 운서사로 들어가서 염불삼매에 들면서 교화에 전력을 다했다. 승속의 문제가 천여명이 되었으며 선정동귀설(禪淨同歸說)을 취하고 화엄교설에 의하여 설명하면서 제종융합의 신불교제창에 힘썼다.
그의 저서로는 당시 승풍숙정을 강조한 <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을 비롯하여 <아미타경소>, <왕생집>, <범망경계소발은>, <죽창수필>, <선관책진>, <자지록>, <수륙의궤>, <운서공주규약> 등 교의, 일상생활, 의궤 등 각 방면에 걸친 저술이 매우 많다.
자백 진가는 강소오강 사람으로 화엄의 변융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었으며 주굉과는 동문이다. <아미타불찬>, <무량수불찬> 등에 의해서 염불을 고취하고 있다. 그는 만력 후반기의 정치적 대사건이었던 광해사건에 연좌되었고, 또한 황태자 책봉에 관한 요서(妖書)의 와중에 휘말려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불전의 보급이야말로 불법흥륭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 번독(飜讀)에 편리한 <방책본대장경>의 출판에 힘썼다.
감산 덕청도 변융, 소암, 운곡 등에게서 배웠으며 뒤에 여산에 초암을 짓고 염불행에 힘썼다. 그에게는 <법화경통의> 7권, <원각경직해> 2권, <조론약주> 6권, <감산대사몽유집> 55권, <감산어록> 20권 등의 저술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선, 화엄, 염불의 회융에 의해서 모든 종파가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었다. 또 <중용직해>, <노자해>, <장자내편주> 등도 불교사상에 의해서 유, 도의 전적을 해석하고 3교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우익 지욱은 강소목독 사람인데 앞의 세 사람들보다 약 50년 후에 태어났다. 그는 천태를 종으로 하였다. 사명 지례의 설을 계승하여 <교관강요>, <대승지관석요>를 저술하였고, <아미타경요게>, <능가경의소>, <점찰경의소>, <범망경합주>, <열장지진> 등 40부에 이르는 저술도 있다. 그는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 말씀이며, 율은 부처님의 행이며, 이 세 가지가 구비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한 불교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천태종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정토종을 종(宗)으로 하여 선, 교, 율의 사상실천을 융합한 신불교의 제창자로서 명대불교의 귀결을 대표한 인물이다.
또 <사서우익해>, <주역선해> 등 유교에 관계되는 저서도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주굉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배격을 하였으며 <천학초징>, <천학재징>과 같은 저서도 있다.
명의 만력 44년(1616) 만주에 있었던 여진족의 부족을 통일한 노이합적(弩爾哈赤)은 한위(汗位)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천명(天命)이라 개원했다.
그 후 30년 동안에 명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고 순치제(順治帝)에 이르러서 입관하여 북경을 국도로 정하였다. 청의 왕들은 만주시대를 포함하여 불교(라마교)에 대해서는 이번정책(理蕃政策)의 입장에서 존숭하였다. 특히 옹정제는 황태자가 살고 있는 궁전을 불교사원으로 만들어서 옹화궁이라 이름하였고, 스스로는 원명거사라고 칭하며 선불일관설(仙佛一貫說)을 취하여 3교를 함께 행하기를 주장하였으며 선법에 대해서도 교(敎), 선(禪), 정(淨)의 조화를 설하였다.
순치 중에 불, 도 2교에 대한 국가통제의 기관으로서 승도관(僧道官)을 두었으며, 불교측에서는 승록사, 승강사, 승정사, 승회사가 중앙에서부터 지방의 각 행정기관에 설치되었다. 불교교단은 승관에게 속박되고 사원의 신축, 출가득도나 승니의 사행(私行)에 대해서까지 엄중한 제한을 받게 되었고 종교적 활동의 자주성을 상실한 법제하에 놓여졌다.
청초에는 명대 불교계의 추세를 이어받아 선종, 특히 임제종이 성행하였다. 그 중에도 천동 원오, 경산 원수, 동계 성충 등의 세 파가 역대 군주의 존숭을 받았으며 많은 명승을 배출하여 청대 불교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 진강 금산사, 고민사, 상주 천녕사의 세 총림을 비롯하여 서천목산 선운사, 항주 영은사, 영파 천동산 홍법사 등은 강남의 대표적인 명찰로서 이들 세 파의 사람들이 활약한 곳이다. 이 파의 대표적인 승려는 천동 도민, 감박 성총, 옥림 통수 등이다.
한민족의 문화정책의 입장에서 이미 강희제 때에 명의 만력판에 이어지는 <속장경>, <우속장경>이 보각되었다. 이어서 칙판 한문대장경이 옹정 건륭년간에 북경에서 조각되었고, 건륭 13년(1748) 2월에는 <어제중간장경서>가 하사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7838권의 완성을 보았다. 이 밖에도 건륭제는 한문대장경의 만주어역을 계획하여 건륭55년(1790)에 완성하였다. 이것들은 모두가 만주 조정의 문화정책과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상은 김경동, ‘중국불교의 역사’ 네이버 지식 iN에서 인용한 것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