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3등상 수상 이후 연속 10회 특선
1935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38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 참여
1942~44 반도총후미술전 일본화부 심사위원
1944 『모던 일본』사가 친일 작가를 위해 제정한 제5회 '조선예술상' 수상
1962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상 수상
1963 3․1문화상 수상
● 전통 화풍을 계승한 거장
청전(靑田) 이상범은 전통 화풍을 계승한 우리 근현대 화단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독창적 필묵법으로 새 경지를 개척한 그의 회화 세계는 흔히 수묵산수화에서 향토적 민족 정서를 일깨운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스승인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과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을 통하여 조선말의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에서 이어온 전통 회화를 공부하였고, 이를 토대로 주변의 친숙한 산천 들녘의 서정을 화폭에 우려내면서 수묵의 근대성을 이룩하였다.
그의 화려한 화단 활동 역시 거장(巨匠)이란 평가에 어울리는 것이다. 공모전에 주력하고 미술 교육자로서 걸어온 해방 전후의 예술적 행로가 그러하다. 또한 그 위상만큼 후배와 동료들로부터 존경과 대중적 인기를 가장 많이 누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미술계의 정치력과 인기에 걸맞게, 그의 회화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최대의 찬사를 받아왔다.
미술평론가 이구열(李龜烈)의 화평 <향토적 야취의 이상미와 득진(得眞)의 수묵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화집에 미술평론가 오광수(吳光洙)와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가 덧붙인 평가는 이상범 회화의 특질과 미술사적 위치를 가늠케 한다.
1950년대 이후 청전의 창조적 정형 산수는 그 전의 사실풍과는 현저한 변화를 보게 되는 수법의 양식화로 나타나고 있다. 수묵의 농담변환을 독특한 필의와 기법으로 특질화시키고, 구도에서도 다감한 조형적 질서에 역점을 두는 이 시기의 작품들의 공통적인 정석(定石)은 시골의 야산․수목․계류․인가․농부 또는 어부의 다섯 요소이다. … 정형의 산수풍경화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하나하나가 보는 사람에게 조금도 권태감을 줌이 없이 … 모든 한국인의 근원적 향수감과 정감을 자극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케 하는 시골 풍정의 내면적 훈기를 화면 가득히 표류시키는 만년작들은 그 분위기의 이상화와 전형적 야취의 유현경(幽玄境) 강조, 그리고 그 기법의 묘와 더불어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다(이구열, 《한국의 회화-청전 이상범》).
나는 청전의 일생과 예술 세계를 더듬어가는 가운데서 그의 위치가 영원한 한국미의 전형을 수묵산수로써 완성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이후의 최대의 화가임을 발견했다. 겸재나 단원과 같은 한국 산수의 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독자적인 자기 세계에서 또 하나의 한국미의 전형을 확립했기 때문이다(오광수).
청전 선생의 그림은 변하지 않는 그 분의 철학에 깊이를 두고 있다. 황량한 등성이나 벌판길을 외롭게 걸어가는 그 분의 그림 속 세계는 … 우리의 국토 그 어디에건 놓여 있음직한 평범하면서도 스산스런 언덕길이나, 소리치며 길게 흐르는 여울의 그림은, 아첨이 깃든 눈요기의 그림이 아니라 마음속 밑바탕을 건드려 주는 느낌의 그림, 그리고 평범한 한국 산하가 지니는 참마음의 그림인 것이다(최순우).
“한국의 풍경, 흙냄새, 그리고 그것들을 에워싸고 흐르는 한국적인 향토시(鄕土詩)를 그리고 싶다”며 자신의 회화 세계를 추구한 이상범은 이미 일제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는 화가이면서 평론 활동을 벌인 김용준과 윤희순의 화평에서 엿볼 수 있다.
‘격의 수묵’을 지닌 … 청전의 기법은 수묵의 선미(禪味)에서 체득한 것이며, 남화적인 기운이 높은 경지에서 소요할 줄 아는 용묵(用墨)의 인(人)이다. 그 유현한 공간에는 향토적인 정서가 표류한다(윤희순, 『신시대』, 1934년 8월호).
청전의 작품은, 항상 그 유현의 구도와, 아담한 필치와, 참신한 발묵으로 관자(觀者)의 누구나 공감하는 바와 같이, 그는 우리 남화계(南畫界)의 중진이 되었다(『동아일보』, 1935년 12월 17일자).
청전은 차라리 꾸준한 노력의 화가일지언정 산뜻한 재주가 넘치는 화가는 못 된다. 그러나 무릇 화가가 되는 세 요소, 곧 예술에 대한 양심과 열애와 고집을 청전은 모두 갖춤으로써 … 그 평원한 취재로부터 고갈(枯渴)한 점획과 유현한 발묵법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청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김용준, 『문장』, 1939년 9월호).
● 가난을 딛고 화가로 입신
이상의 평가처럼 이상범이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고 명망 높은 작가로 부상하기까지는 남다른 역정이 있었다.
이상범은 충남 공주군 정안면 석송리 벽촌의 빈농 출신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나 생후 6개월 만에 아버지 이승원(李承遠)을 여의고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열 살이 되던 해인 1906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보통학교인 사립보흥학교와 주동학교를 겨우 마친다. 수재급으로 손꼽혔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힘든 형편이어서 찾은 곳이 학비가 없는 경성서화미술회 강습소이다.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열 여덟 살 때인 1914년의 일이다.
서화미술회는 이 왕가의 후원으로 전통서화가를 양성하기 위해 1911년에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미술 교육 기관이다. 수업과정은 3년으로 이상범의 선배인 김은호(金殷鎬)․이한복(李漢福)․이용우(李用雨), 동기생인 노수현(盧壽鉉)․박승무(朴勝武)․최우석 등 전통회화에서 근현대 화단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이상범은 1918년 4회 졸업생으로 화과를 수료하였다. 여기에서 이상범은 도제식으로 안중식과 조석진 등에게서 전통 화법을 익혔다. 졸업 후에도 동기인 노수현과 함께 안중식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 머물며 계속 지도를 받았다. 안중식은 자신의 아호인 '심전(心田)'에서 한자씩을 떼어 노수현에게 '심산(心汕)'을, 이상범에게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내릴 정도로 두 사람을 애제자로 여겼다고 한다. 해방 후 이상범은 홍익대에서, 노수현은 서울대에서, 각각 후진을 양성하여 현대 화단의 양대 인맥을 구축하게 된다.
서화미술회는 1919년 안중식이 3․1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운영이 어려워졌다. 강습소의 마지막 졸업생격인 이상범은 서화미술회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서화협회(1918)'에 참여하고, 1921년부터 조선서화협회전(이하 협전)에 출품하였다.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된 협전은 근대적 민족미술을 세우려는 단체전이었다. 또한 이상범은 이용우․노수현․변관식(卞寬植)과 함께 전통 회화의 새 방향을 모색하며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는 등의 의욕을 보였다.
한편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주관 아래 1922년부터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라는 공모전을 개최하였는데, 이상범은 1회 때부터 계속 출품하였다. 3회까지 입선하다가, 4회 때(1925년)에 3등상을 받은 이후 연속 10회 특선이라는 전무후무한 신기록을 세운다. 그는 1935년 14회 때부터 추천작가의 자격을 부여받았고, 1938년 17회부터는 조선인 화가로서 '심사 참여'의 영광을 얻는다. 가난을 딛고 화가로 입신하여, 전통회화 분야에서 채색화 계열의 김은호와 함께 남화풍의 수묵산수화가로서 화단의 쌍벽에 오른 것이다.
또한 이상범은 1927년 노수현에 이어 조선일보사에 취직하여 삽화 등을 맡게 된다. 다음해에는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동아일보 재직시인 1932년 아산 현충사의 이 충무공 영정을 제작하였다. 이 무력 효자동 자택에 '청전화숙(靑田畵塾)'을 마련하고 배렴 등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 역시 김은호의 '후소회(後素會)'와 함께 미술 교육 기관이 없던 시절 후진 양성에서도 양대 화맥을 이루게 된 것이다.
화단의 중진으로 떠오른 이상범은 윤희순이나 김용준 등의 당대 평가처럼 산수화에서 독자적인 사생풍 형식미를 창출하였다. 초기 강습소 시절부터 선전에 입선한 1920년대 초반까지 익힌 스승 안중식의 영향에서 완연히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1950~60년대 이상범식으로 정형화되는 야취가 물씬한 필묵법의 특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는 전통 화풍을 기초로 하여 근대적 민족 회화를 창출하려는 의도 아래 꾸준히 노력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상범의 수묵산수화는 당시에도 신랄한 비판이 없지 않았다. "정적한 보조로 막다른 골목을 걷는다고 본다. 반추도 비약도 몽상도 아무것도 없이 다만 눈에 익은 버릇을 되풀이한다〔김복진(金復鎭), 『개벽』, 1926년〕" "천편일률의 필치(금화산인,『매일신보』, 1930년)" "산수의 구성이 기계적인 것이 창작가로서의 빈약을 말하고 있다(『동아일보』, 1926년)" "회화에 끌어들이는 상식 범위가 몹시 적다. 미에 대한 창조력도 없고 따라서 변통성도 없다(『개벽』, 1934년)" 등의 지적이 그 사례이다.
이들 평가는 전통 화풍을 근대적 사생 기법으로 재창조해낸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상범의 산수화가 지닌 뚜렷한 한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추구한 향토색은 당시 선전의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조선인 화가에게 요구하는 경향과 연계된다. 또한 그가 선전에서 특선작을 낸 이후의 화풍은 황량한 분위기의 풍경 선택, 짧게 반복한 갈필의 언덕이나 산 처리, 나무나 안개의 표현 등 당시 일본 남화풍과도 무관하지 않다. 분위기를 우려내는 데 중점을 둔 이른바 '몽롱체'라는 화풍의 영향이 엿보인다. 더구나 그 잔영은 1930년대에 얻은 '천편일률'이라는 별명이 지속된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화면 운용과 필묵법이 난숙해졌지만 같은 비평을 받는 것이다. 그의 탄력 있는 모필선묘의 산수화가 얻은 인기는 왜색조에 물든 시대적 정서와도 맞물려 있다는 일부 젊은 평론가들의 비판적 시각에도 수긍이 간다.
이상범이 추구한 향토적 서정성이 지닌 한계는 실제 그가 살아온 지난한 역사 현실에 비견해 보면 더욱 역력해진다. 그의 회화가 주변의 친근한 풍경에서 느끼는 편안함을 전달해 주지만, 일제 강점기나 해방 후 그가 살았던 사회상이 구체적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나라 잃고 어려움에 처한 시대에 대한 치열한 갈등이나 민족혼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관이나 세계관이 민족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이상범이 빠져든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 훼절된 민족의식, 친일 미술의 나팔수로
청년 이상범이 민족 회화를 염두에 두었듯이 처음에는 그 나름대로 민족의식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1919년 스승 안중식이 3․1운동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났고, 초창기 민족지임을 내세우던 『동아일보』삽화 기자로 재직하면서 받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범의 그러한 의식은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전송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체육부의 이길용 기자와 후배 화가인 정현웅과 공모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상범은 일경에 잡혀가 40여 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결국 동아일보사를 사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그 바람에 『동아일보』도 1년 동안 폐간당한다.
그러나 40대 중반의 이상범은 그 민족의식을 자신의 회화에 구현하지 못한 채 훼절(毁節)하고 말았다. 사건 이후 직장을 잃고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 사회 활동의 제약이 따른 탓에 칩거한 양 술회(『신동아』, 1971년 7월호)한 바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 이후 이상범은 당시 쌍벽이었던 김은호와 함께 가장 앞장서서 친일파 미술인의 나팔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 회장인 경성서화미술회 출신으로 총독부가 주관한 선전을 통해서 화가로 입신한 기득권에 안주한 것이다.
먼저 이상범은 '예술도 군수품'이라는 일제의 전시 문화 정책에 동조하여 1941년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 이한복․이영일․김은호와 나란히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발탁되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산하에 배치된 이 단체는 총독부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고, 그 성원은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작가들과 대부분 선전의 특선작가나 추천작가급 이상의 한국인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김은호와 함께 이상범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회에 걸쳐 개최된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의 일본화부 심사위원으로 선정된다. 이 전람회는 황국신민화와 군국주의를 선양하기 위해 선전보다 비중을 크게 둔 전시체제의 공모전이었다.
이어서 이상범은 대동아공영의 '성전(聖戰)'에 국방 헌금 마련을 위한 '조선남화연맹전(1940년)'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와 '일만화(日滿華) 연합 남종화전람회(1943년)' 등에 빼놓지 않고 출품함으로써 일제에 부역하였다. 당시 화단에 역량 있는 중진으로 주목을 받았던 만큼 친일 활동에도 앞장선 것이다. 이런저런 공적으로 이상범은 주요한과 함께 제5회(1944년) '조선예술상' 수상자가 되었다. 이 상은 친일파 문인과 화가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940년『모던 일본』사가 제정한 것이다. 화가로는 2회 때(1941년) 고희동이, 4회 때(1943년)는 노수현이 조선예술상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이상범은 일제 말 신문이나 잡지에 군국주의 경향성을 담은 삽화 등을 그렸다. 대표적인 예가 『매일신보』에 기고한 삽화 <나팔수>이다. 조선총독부의 대변지인 『매일신보』는 1943년 전쟁에 광분한 일제가 조선인 청년들까지 전선으로 내몰기 위해 조선인 징병제를 시행하게 되자 8월 1일부터 8일까지 1면에 연재 특집으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시화를 기획하였다. '조선징병제 실시 감사결의 선양주간'에 맞춘 것이다. 이 연재 시화는 8월 1일자에 고희동의 삽화 <호랑이>와 김기진(金基鎭)의 시, 3일 배운성의 삽화 훈련병의 <행진>과 김용제의 시, 4일 김인승(金仁承)의 기관총을 멘 <병사>와 김상룡의 시, 5일 김중현의 <운룡도>와 노천명의 시, 6일 이상범의 <나팔수>와 김종한의 시, 7일 김기창(金基昶)의 <입영>과 김동환의 시, 8일 이용우의 삽화 <신사와 벚꽃>과 이하윤(李河潤)의 시로 꾸며져 있다.
『매일신보』 8월 6일자에 다섯 번째로 실린 이상범의 <나팔수>는 일장기 아래서 기상나팔을 부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수묵풍의 삽화는 짧게 친 필치와 연한 담묵 처리의 언덕 묘사가 눈에 띄는데, 필법과 새벽 분위기 묘사는 이상범이 즐겨 구사한 산수화풍이다. 이 화풍은 일본 남화풍의 잔영으로 해방 후 그의 전형적 기법과도 연계된다. 이상범의 회화 세계가 지닌 한계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의 주제는 1면의 '솔로몬 해전 1주년'과 '태평양전국'을 다룬 기사에 상응한다. 또 김종한의 시 "몸을 바칠 수 있다는 제도기에/원시처럼 여릿여릿한 순수가 깃들다/남십자성만이 영원의 등대/조국은 수평선처럼 향기로운데/함푹 물방울에 젖은 기폭에는/아침해가 새론 책장처럼 미소하는" 분위기에 적절히 맞추어 그린 것이다. 이 『매일신보』의 조선인 징병을 부추기는 선전물에 참여한 것은 반민족적 친일을 넘어서 일제의 반인류적 살륙에 동조한 범죄행위와 같은 것이다.
● 선전과 친일 명성이 국전으로 이어져
이상과 같이 선전에서 받은 영광(?)과 친일 부역을 통해 얻은 명성(?) 탓에 이상범은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김은호․김기창․심형구(沈亨球)․김인승․김경승(金景承)․윤효중(尹孝重) 등과 함께 제외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1946년 우익 미술인 중심으로 꾸려진 '한국미술협회(이하 미협)'의 전신 '조선미술협회(회장 고희동)'의 참가를 시발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미군정 아래서 해방 후 전국 규모로 개최된 첫 종합미술전(1947년)에 동양화부 심사위원으로 뽑혔다. 피난 시절에는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1952년)을 갖기도 하였다. 미군과의 각별한 인연은 계속되어 1959년에는 미8군과 정부공보실 합작으로 해외용 문화 영화 <한국의 전통화가 이상범과 그의 화실>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기지개를 편 이상범의 활동은 남한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추천작가로 참여하면서부터 더욱 왕성해졌다. 제2회(1953년)부터 16회(1967년)까지 추천․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10회 때(1961년) 편파심사 및 파벌 조성 등 문제가 일어 국전 개편시 고문으로 한 발짝 물러서기도 하였다. 그 탓에 몇 년간 실질적인 심사에 관여하지 못한 적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국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50년 창설된 홍익대의 동양화 실기 교수로 1961년 정년 때까지 재직하면서 그 역량을 발휘하였다 .현재 우리 미술계에 학맥 중심의 파벌이 조성되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이어서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고, 김은호․김기창․김인승 등 여타의 친일 미술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원상(1957년),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통령상(1962년),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1963년), 서울시 문화상(1965년) 등을 두루 받았다.
해방 후 이상범의 이런 화단 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그가 이룬 회화적 업적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 그의 개인적 성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는, 단신의 작은 체구에 겸손하고 소탈하며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성이 깃든 인품으로 한결같이 얘기된다. 특히 평생 정식으로 개인전을 갖지 않고 세상을 떠난 고집스런 작가로도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술은 즐긴 애주가에 재기 넘치는 재담가로 유명하고, 주변과의 무리없는 친화력이 커다란 장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그의 책《근대한국미술가논고》(일지사, 1975)에서 '대표적인 한국의 소시민'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그의 인간성은, 가장 지혜로운 한국의 서민 감정이 승화된 독특한 형이라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사고에 권위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 같은 것이 깔려 있고, 생을 그 나름대로 즐기는 생활의 철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평생 무학(無學)을 콤플렉스처럼 여겨 왔지만, 오히려 청전의 경우에는 섣부른 교양의 결여가, 순박한 심성으로 예술화되었는지 모른다.”
또한 "어떤 특별한 야심이나 물욕에 젖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자신을 성실히 가다듬어 가는, 그런 타입의 인간"으로 '청백하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오광수,《청전화집》)도 들었다. 이런 성품으로 이상범은 해방 직후 좌우의 갈등과 대립 사이에서 철저히 우익쪽의 세계관을 견지한 듯하다. 예컨대 월북한 아들 이건영이 좌익 활동을 벌이자 부자의 연을 끊었을 정도라는 일화가 그것을 잘 반증한다. 이상범이 지녔던 다감한 인간미의 이면인 것이다. 이런 성향은 미군정 이후 친미적 파쇼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한 미술계를 주도한 작가들의 보편적인 정치색이기도 하였다.
이상범의 친일 활동과 군국주의의 그림에 대하여는 20세기 한국미술사의 한 거장으로 향토적 서정성을 우려낸 수묵산수화의 예술적 성과에 가려지고, 그의 개인적 성품이나 정치적 성향에 감추어진 채, 이제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물론 이상범 생전에 자신의 양심고백도 없었다. 이런 현상은 우리 미술계에 어떤 의미를 던져 주는가.
수난의 시대에 그 민족 현실을 외면하고 자연미를 관조하며, '향토시'를 그려온 이상범의 예술성과 민족 배반의 친일 행위는 별개의 것인가. 결국 그 오점으로 얼룩진 우리 근현대미술사에서 이상범이 남긴 신화는 '순수 미술'이라는 미명아래 시대 정신과 무관하게 개인의 개성적 예술 세계만을 추구하면 된다는 왜곡된 예술관만을 뿌리깊게 풍미시킨 결과를 낳았다. 이는 지금 우리 시대 미술에 던져진 과제 중 그 무엇보다 엄정하게 반추해 보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