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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당시 독립운동계의 거목이며 임청각의 주인인 이상룡(李相龍)선생(본명 象羲, 호는 石洲이다)의 유해가 중국으로부터 봉환되었던 것이다. “슬퍼말고 옛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는 고별시를 남긴채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을 떠난 지 실로 79년만의 소리없는 귀국이요, 귀가였다.
“무력으로 독랩쟁취”만주항일투쟁 이끌어
▲ 석주 선생 생가 안동의 임청각, 보물 182호 |
그러던 중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하여 외숙인 권세연(權世淵)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진, 행동하는 척사유림(斥邪儒林)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선생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눈뜸과 참여는 1905년 을사조약을 맞아 1만5천금을 투자,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코자 하는 계획으로 계속 되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선생은 무기의 열세, 근대적 군사훈련의 부족 등으로 인한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고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때마침 인근지역의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 혁신 유림적 인사들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워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자 이에 합류하여 칸트․홉스․루소․부른 출리 등 서구근대사상의 비판적 검토를 통한 1907년경 계몽주의자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선생은 50세였다.
안동의 전통사회에서 명가의 후손으로 이미 뚜렷한 입지와 명망을 얻고 있던 선생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새롭게 자신의 의식세게를 전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이는 선생의 사상이 구국의 차원에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전통유교적 사고의 바탕에서 새롭게 밀려드는 서구의 신사조를 흡수함으로써 동양이냐 서양이냐의 극단적 양자택일을 더나 이 둘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선생이 이렇듯 혁신된 유림의 행보를 걷게 됨에 따라 안동지방 특유의 친족적 연대감으로 인해 이 지역 집단개화의 선두에 자리잡게 된다. 1908년경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會報發刊)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에 대한협회 중앙본부가 점차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자 본부에 통렬한 비판을 가해 구국계몽운동이 갖는 본래적 모습을 지키고자 했다. 계몽운동은 어디까지나 구국의 방편으로 활용될 때 그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서는 조국의 망국사태를 맞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개척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진수와 황만영을 통해 이 계획을 전해들은 선생은 이에 찬동, 1911년 1월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일가를 거느린채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이미 50이 넘은 고령에 자신의 삶이 어우러진 고향, 안동을 떠나 새로운 생활을 결심하고 이를 주저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선생의 결단은 결코 범용한 것이 아니었다.
▲ 경학사취지문 |
선생은 가도가도 드넓은 벌판만이 이어지는 땅, 바람찬 간도땅에 이주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였다. 이회영․이시영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개척을 시작하였다.
▲ 신흥강습소 |
▲ 훈련받는 학생들 |
3․1독립운동의 함성이 전세계의 잠자는 양심을 두드리던 1919년(3․1독립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터어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교훈이 되었다) 한족회는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군정서 독판(督辦 : 總裁에 해당)을 맡아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서로군정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갔다.
독립군 단체 통합주도, 임정 초대 국무령 역임
그러나 선생으 활동에서 무엇보다도 뜻있고 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한 점이다.
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조직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에 참가,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 등과 군사기구 통합의 방안을 협의하였으며 1923년에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대표 약 120명이 모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김동삼 등 4명을 대표로 파견하여 각 독립운동 계열의 의견조정과 단합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기대와는 달리 임시정부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자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대표들을 소환하여 독립운동게의 분열을 막기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또한 선생은 국외독립운동의 요람이라 할 중국 동삼성 지역의 군사 통합에도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1922년 6월 동삼성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여 각기 개성이 다른 독립군 조직을 묶어, 통군부(統軍部)를 조직하였고 이를 다시 확대 개편하여 대한독립군단 등 소위 8단 9회(17개 독립운동단체)의 거중 조정에 성공,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궁극적 전위대인 독립군의 군세 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일반적으로 볼 때 완고하고 확고하게 자기 세계를 지켜왔던 유교의 본고장 안동에서 생장(生長)한 선생이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독립운동의 방안에서 각기 개성과 주장이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전통적인 유가적(儒家的) 생활속에서도 서구의 신사조를 흡수 통합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의 이러한 줄기찬 노력은 독립운동계에서 선생의 위상을 그만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확고한 독립운동의 방략을 잃지 않았다. 즉 조국독립의 방안은 무력항일투쟁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다양했던 외교론․준비론․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선생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산업교육우선론과 아울러 독립전쟁론이었다.
조국광복운동은 결국 일제 무력과의 싸움이었고 이를 위해 선생은 그다지도 독립군 조직, 즉 무장력을 갖춘 항일조직의 결집에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미 의병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해 두가지 독립운동 방안의 장단점을 터득하고 있었다. 의병운동의 한계였던 근대적 군사력의 미비와 계몽운동의 한계인 힘의 부족을 통감한 선생은 이 양자의 통합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책무를 자임(自任)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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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를 다시금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곧추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과 연대감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선생은 우선 일본군과의 접전 속에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 동삼성 지역의 김좌진․김동삼․오동진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여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뜻과 같이 이룩되지는 못하였다. 상해와 간도는 각기 처한 독립운동의 상황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 석주 선생 교육 기념비 |
그러나 선생은 국민부(國民府)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룬채 1932년 5월 12일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다.
▲ 국립묘지 임정 묘역에 마련된 이상룡의 묘 |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유족과 국가보훈처 관계자들로 구성된 유해봉환반에 의해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