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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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마카베오 상권 6,1-13
그 무렵
1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2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3 안티오코스는 그 성읍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읍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4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우니 오히려 그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며 그곳을 떠나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5 그런데 어떤 사람이 페르시아로 안티오코스를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갔던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6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던 리시아스가 유다인들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치고, 유다인들이 아군을 무찌르고 빼앗은 무기와 병사와 많은 전리품으로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7 또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8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깜짝 놀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9 그는 계속되는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친 것을 느꼈다.
10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11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
12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3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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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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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그제 이틀에 걸쳐서 우리 성당에서는 김장을 했습니다.
물론 본당의 행사 때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본당 구역 내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김장 김치를 나누기 위한 것이지요.
사실 배추 300포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을 언제 다 김장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김장철이라 집집마다 김장을 해서 힘든데, 본당까지 와서 김장을 도울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저의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40여분이 넘는 교우들이 오셔서 김장이 어제 오전으로 모두 끝났거든요.
날씨도 우리를 도와주더군요.
오전 내내 흐려서 무엇인가가 쏟아질 것 같더니만, 김장 끝내고 함께 점심을 하려고 하니까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교우들이 적게 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오후에는 비 맞으면서 힘들게 김장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했기에 좋은 날씨에 딱 맞춰서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함께 한다는 것은 이렇게 좋습니다.
빨리 끝내는 것은 물론, 얼마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모릅니다.
김장을 하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거든요.
서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서 함께 하는 것이기에, 작은 일 하나에도 크게 웃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 좋은데, 실제로 함께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아 보입니다.
4~50여명이 나오셔서 정말로 많이 나왔다고 이야기했지만, 본당 신자 수가 5,300명인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요.
또한 본당의 많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을 볼 때,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인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함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대한 불신과 미움 때문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 논쟁을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들어서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함께 한다는 것이 공동체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하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제시한 ‘사랑의 길’과 정반대의 길로 힘들게 걸어갈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여 말씀하시고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면,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정반대의 개념인 미움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과 떨어져서 홀로 힘들게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사용하지 않으면서 여분의 것으로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웃과 나누세요.
시장을 선점한 힘, 창의력(‘행복한 동행’ 중에서)
전 세계 전기면도기 시장의 47%를 차지하고 있는 필립스의 성공 비결은 ‘역발상의 창의력’이었다.
필립스만의 창의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은 ‘면도기의 주 고객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점이다.
면도는 남자의 점유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술값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면도기 살 돈은 아까워하는 게 남자들이다.
게다가 전기면도기는 습식면도기보다 비싸지 않은가.
이 부분을 고민하던 필립스는 마케팅 포인트를 뒤집었다.
다름 아닌 여자 고객의 심리를 겨냥한 것이다.
평소 짠순이처럼 굴던 여자들도 사랑하는 남자나 아버지의 선물을 살 때는 쉽게 지갑을 연다는 점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 결과 현재 필립스 면도기의 51%가 이른바 ‘선물용’으로 팔리고 있다.
LG전자가 러시아에 에어컨을 판 얘기도 재미있다.
모두들 러시아는 추운 나라이니 에어컨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LG전자는 이 같은 상식을 깨고 창의력의 승리를 일궈 냈다.
러시아 시장을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일단 LG전자는 시장 조사를 통해 1년에 45일 정도가 여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추위에는 강해도 더위는 참지 못한다는 사실까지 간파했다.
그리고 즉각 판매 전략을 세우고 에어컨 수출에 나섰다.
그 결과, 러시아 에어컨 시장의 35% 이상을 LG전자가 차지하게 되었다.
- 간석 4동 성당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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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루가 20,27-40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살아있음, 눈물겨운 환희>
장수(長壽)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 시대 사람들이 다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300살까지 살았다고 가정해보시죠.
나이가 300살 정도 되면 그 분은 사람이 아니라 유령일 것입니다.
숨만 붙어있다 뿐이지, 사람으로서의 형상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다 빠져나간 미이라 같은 존재, 하루 온종일 누워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식물인간일 것입니다.
동고동락했던 사람은 다 떠나고, 이제 손자의 손자, 그 손자의 또 손자들과 살아야만 하는 고독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끼치는 민폐는 또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눈만 뜨면 기자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도대체 저 인간은 언제 죽을 것인가, 잔뜩 기대하면서 해외토픽이나 기네스북에 실으려고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쯤 되면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입니다.
적당히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것은 자연의 순리이고, 서로를 위해서 좋은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소규모 피정이 있어서 잠시 바닷가를 다녀왔습니다.
내려갈 때 일부러 바다를 낀 한적한 국도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한적한 국도를 타며 주변 경관을 살펴보니 이미 가을이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도로변에는 밤새 떨어진 낙엽들로 가득합니다.
잎사귀들을 떠나보낸 늦가을 나무들은 무척이나 외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무성했던 나뭇잎들을 떠나보낸 자리에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최근에 새로 생긴 큰 방조제 2개를 만나게 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차를 갓길에 주차시켜놓고 방조제 위로 올라갔더니,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잔잔한 서해바다 위로 무수한 철새들이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아래 펼쳐지는 ‘특별 쇼’를 오랫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절경 위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환희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이로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개똥밭을 굴러도 살아있는 것이 낫다.
죽은 정승보다 살아있는 강아지가 더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단 살아있어야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단 목숨이 붙어있어야 회개할 수도 있고, 새 출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어야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습관처럼 눈을 뜨기에 당연한 일이려니 하고 생각하지만, 오늘 아침에만 해도 다시 눈뜨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비록 고달프다 하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일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눈부신 환희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표시입니다.
이아침 우리가 다시 눈을 떴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표시입니다.
오늘이란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아직도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비를 거두지 않으셨다는 표현입니다.
우리 평생의 과제는 삶이 눈물겹게 소중한 것임을 아는 노력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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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베트남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533년입니다. 중국으로 가던
유럽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이 임금으로 있었습니다.
1615년 예수회가 베트남에 정식으로 파견되면서 베트남의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베트남의 사도’로 불리는 예수회의 로드 신부는 20년을 베트남에 머물며
수만 명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해는 산발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박해를 끝낼 목적으로 베트남을 침공하였고,
1883년 마침내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음으로써 박해를 종식시켰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베트남의 수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안드레아 둥락 신부를
비롯한 117위를 1988년 성인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이 가운데 96위가 베트남 사람이었고, 21위가 다른 나라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성직자는 58명이었는데, 37명이 베트남 출신의 사제들이었습니다.
베트남 교회는 한국 교회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숱한 박해를 견디어 낸 것이 그렇고,
103위 순교 성인을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117위의 순교 성인을 모신 것도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둥락 안드레아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세례명도 같고,
순교한 사연도 비슷합니다.
두 나라 순교자들에게 평화의 기도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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