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9
랠프와의 우정과 여자 문제로 인한 결별
런던에서 랠프와 나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리틀 브리튼에서 3실링 6펜스를 내고 함께 하숙을 했는데 당시에 우리 형편으로는 그 정도 집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 랠프는 영국에 친척들이 있긴 했지만 다들 가난해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때서야 랠프는 영국에 계속 있을 생각이며 필라델피아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털어놓았다. 그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져온 얼마 안 되는 돈은 뱃삯으로 모두 써버렸다. 내게는 15피스톨이 있었다. 랠프는 일자리를 찾는 동안 가끔씩 내게 돈을 빌려 생활비로 썼다. 처음에 그는 자기에게 배우의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고 극단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랠프가 지원한 극단에 있던 윌크스는 랠프에게 배우로 성공할 가망이 없으니 그만 포기하라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다음에 랠프는 페이터노스터 로의 출판업자인 로버치에게 <스펙테이터> 같은 주간지에 글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지만 로버치는 거절했다. 그 다음에는 법률 학교 근처의 출판사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문서 작성일을 찾아보았지만 역시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당시 바솔로뮤 클로스에서 꽤 유명했던 파머 씨의 인쇄소에 금방 일자리를 얻어 1년 가까이 일을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랠프와 함께 연극 구경을 가거나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번 돈의 대부분을 썼다. 결국 가지고 있던 금화마저도 바닥이 나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신세가 되었다. 랠프는 아내와 아이를 완전히 잊은 것 같았고, 나도 리드 양과 한 약속들을 서서히 잊었다. 그녀에게는 편지 한통 보낸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당분간은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실수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실수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랠프와 둘이서 돈을 너무도 헤프게 써댄 탓에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었다.
파머 씨의 인쇄소에서는 영국의 논리학자 윌라스턴의 <자연의 종교> 재판을 찍고 있었고 내가 식자 일을 맡았다. 그런데 윌라스턴의 논증 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런 점을 언급하는 추상적인 소논문 한 편을 썼다. 논문의 제목은 ‘자유와 필연, 쾌락과 고통을 논함‘이라고 정했다. 그리고 ’랠프에게 바친다‘라는 말을 넣어서 몇 부를 인쇄했다. 이 일로 파머 씨는 나를 꽤 똑똑한 청년으로 생각하면서도 내 논문에서 몇 가지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신랄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이 소논문을 인쇄한 것은 또 하나의 실수였다. 리틀 브리튼에서 하숙을 할 때 나는 근처에서 서점을 하던 윌콕스라는 사람과 알게 되었다. 그의 서점에는 헌책들이 굉장히 많이 쌓여 있었다. 그때는 순회도서관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의 서점에 있는 책들을 가져다 읽어보고 돌려주기로 그와 계약을 했다. 몇 가지 조건을 걸고 계약을 맺었는데 어떤 조건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때는 내게 유리한 계약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이용했다.
내 논문이 어떤 연유로 <인간 판단의 정확성>이라는 책의 저자이자 의사인 라이언스의 손에 들어갔고, 이 인연으로 우리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다. 라이언스는 나를 꽤 높이 평가해서 자주 찾아와 내 논문과 관련된 주제로 토론을 하곤 했다. 한번은 치프사이드 가에 있는 혼즈라는 허름한 술집으로 나를 데려가 <꿀벌의 우화>를 쓴 맨더빌 박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맨더빌 박사는 그 술집에서 모임을 갖는 어느 클럽의 핵심 역할을 했는데 농담도 잘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라이언스는 뱃슨의 커피숍에서 내게 펨버튼 박사도 소개해주었다. 펨버튼 박사가 언제든 기회가 되면 아이작 뉴턴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해서 나는 한껏 들더 그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영국에 갈 때 진기한 물건들을 몇 개 가지고 갔는데, 그중 가장 특별한 것은 불 가까이 대면 빛이 나는 석면으로 만든 지갑이었다. 한스 슬론 경[의사이자 박물학자. 그의 소장품이 기반이 되어 대영 박물관이 세워짐]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블룸스베리 광장에 있는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한스 슬론은 내게 온갖 희귀한 물건들을 보여주더니 내 지갑도 자신의 수집품에 넣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값을 후하게 쳐주었다.
우리 하숙집에는 T라는 젊은 부인이 있었다. 클로이스터에서 모자 가게를 운영하는 여자였다. 가정교육을 잘 받아 몸가짐이 얌전하고 현명했으며 성격도 활달했고 무엇보다 대화가 잘 통했다. 랠프가 저녁이면 그녀에게 희곡을 읽어주곤 하더니, 두 사람은 어느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여자가 하숙집을 옮기자 랠프도 따라가버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같이 살았다. 그때까지도 랠프는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여자의 수입만으로 아이까지 세 사람이 먹고살기에는 빠듯했다. 결국 랠프는 런던을 떠나 시골로 가서 학교를 열기로 했다. 글도 잘 쓰고 산수에도 능하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랠프는 그 일이 자기 수준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훗날에는 분명 더 그럴듯한 일을 하게 될 텐데 그때가 되어 예전에 초라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영광스럽게도 내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 랠프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편지에서 랠프는 작은 마을[버크셔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당 일주일에 6펜스를 받고 열 명에서 열 두 명의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친다고 했다]에 정착했다고 하면서 T부인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어느 어느 학교의 프랭클린 선생 앞으로 보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랠프는 그 뒤로도 자주 편지를 보냈다. 그때마다 지금 쓰고 있는 시라면서 긴 서사시를 함께 보내며 평가와 수정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이따금씩 시에 대한 평과 수정 내용을 보내면서도 랠프가 시 쓰기를 단념하게 만들려고 고심했다. 바로 그 무렵에 영국의 시인 영이 쓴 풍자시가 출간되었다. 나는 랠프에게 영의 시 대부분을 적어 보냈다. 뮤즈의 힘을 빌려 출세하기를 바라면서 뮤즈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한 시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랠프는 여전히 편지를 보낼 때마다 여러 장의 시를 동봉했다. 그러는 동안 랠프 때문에 친구도 일자리도 잃은 T부인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내게 와 돈을 빌리곤 했다. 나는 그녀와 있는 것이 점점 좋아졌다. 그때만 해도 종교에 얽매이지 않았고 T부인에게는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가 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이건 또 하나의 실수였다). T부인은 당연히 화를 내며 나를 거부했고 내가 한 짓을 랠프에게 고해바쳤다. 이 일로 우리 사이에는 금이 갔다. 그리고 랠프는 다시 런던에 돌아와서는 자신이 내게 지고 있던 모든 의무른 취소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랠프에게 빌려준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어차피 랠프는 그 돈을 갚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와의 우정이 끝난 것이 나는 오히려 짐을 벗은 듯 홀가분했다. 이제 돈을 조금식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벌이가 좋은 일자리를 얻을 마음에 파머 인쇄소를 그만두고 링컨스 인 필즈에 있는 와츠 인쇄소에 취직했다. 파머 인쇄소보다 규모가 훨씬 큰 곳이었다. 나는 런던을 떠날 때까지 이 인쇄소에서 일했다.
아침 식사는 맥주 대신 영양 만점 죽으로
와츠 인쇄소에 들어가서 처음 맡은 일은 인쇄였다. 아메리카에서는 식자 일과 인쇄 일이 함께 이루어졌지만 영국에서는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동안 신체 활동이 부족해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일을 할 때 물만 마셨지만, 쉰 명 가까이 되는 다른 직공들은 맥주를 엄청나게 마셔댔다. 때때로 나는 커다란 활자판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지만 다른 직공들은 두 손으로 겨우 하나만 날랐다. 내 모습을 보면서 직공들은 ’물만 마시는 아메리카인‘(그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이 진한 맥주를 마시는 자신들보다 더 힘이 센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인쇄소에는 맥주집 점원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직공들에게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인쇄소 동료 하나는 매일 맥주를 아침 식사 전에 1파인트, 치즈 바른 빵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1파인트, 아침과 저녁 식사 사이에 1파인트, 저녁 식사 때 1파인트, 여섯 시쯤 1파인트, 그리고 하루 일을 마치고 1파인트를 마셨다. 내가 보기엔 아주 나쁜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힘든 일ㅇ르 하려면 진한 맥주를 마셔야 한다고 고집했다. 나는 맥주를 마셔서 얻는 힘이라고 해봐야 맥주 안에 녹아 있는 보리 알갱이나 가루 양만큼일 뿐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빵 1페니어치에 든 밀가루 양만큼도 안 되었다. 그러나 맥주 1쿼터를 먹는 것보다 물 1파인트와 빵을 먹는 편이 기운을 얻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얘기를 해도 그 동료는 계속 맥주를 마셨고 토요일 밤마다 술값으로 급료에서 4-5실링을 썼다. 나는 그런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그 불쌍한 사람들은 가난에서 언제까지고 헤어 나오질 못했다.
몇 주 뒤에 와츠가 나더러 식자실에서 일해달라고 해서 나는 인쇄공들과 헤어졌다. 식자실로 옮긴 첫날 식자공들은 나를 환영하는 술자리를 가져야 한다며 5실링을 내라고 했다. 나는 인쇄실에서도 그런 이유로 냈기 때문에 부당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주인인 와츠도 내 생각과 같다며 돈을 내지 말라고 했다. 나는 2-3주 동안 돈을 내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직공들은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고 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활자를 아무렇게나 섞어놓거나 페이지를 바꿔놓거나 활자판을 부셔놓는 등 온갖 심술을 다 부렸다. 그래 놓고는 모두 다 인쇄소 유령 짓이라면서 그 유령은 정식으로 들어오지 않은 직공에게 붙어다닌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인이 나를 봐준다 해도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할 사람들과 불편하게 지내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결국 그들이 하라는 대로 돈을 내고 말았다.
그제야 다른 직공들과 사이가 편안해졌고 이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도 되었다. 나는 직공들끼리 예배당이라고 부르던 인쇄소의 규칙을 합리적으로 고치자고 제안했고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실행에 옮겼다. 예를 들자면, 직공들 대부분이 맥주와 빵과 치즈로 이루어진 형편없는 아침 식사를 그만두고 나처럼 빵조각과 버터를 넣고 후추를 뿌린 따끈하고 큼직한 죽 한 그릇을 맥주 1파인트 값, 그러니까 1페니 반을 주고 이웃집에 주문해 먹었다. 이렇게 아침을 먹으면 돈이 적게 들 뿐 아니라 속도 편안하고 머리도 맑아졌다. 여전히 하루 종일 맥주를 달고 사는 직공들은 술값을 제대로 내지 않아 술집 출입을 할 수 없게 되면 내게 술값을 빌려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들 말을 빌리면 “불이 나갔다”고 했다. 나는 토요일 밤이면 경리 책상을 지키고 있다가 빌려준 돈을 받아냈는데 어떤 때는 일주일에 30실링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다 다들 나를 아주 익살맞고 말 잘하는 풍자꾼으로 여겼기 때문에 인쇄소에서 내 존재는 훨씬 더 중요해졌다. 내가 월요병을 핑계 삼아 쉬는 일 한번 없이 매일 출근했기 때문에 주인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식자 속도가 유달리 빨라서 급한 일이 들어오면 모두 내 차지가 되었고 그럴 경우에는 대개 돈을 더 많이 받았다. 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