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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믿는이들에게 주신 이생의 징계와 영원 안에서의 구원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첫번째 구분을 보았고, 이 메시지에서는 두번째 구분을 보기로 한다. 믿는이들에 대한 징계의 문제는 히브리서에 기재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징계하시며, 그분의 징계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보자.
히브리서 12장 5, 6절 :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여기서 우리는 징계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징계를 받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시지 않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방인을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징계하는 데에 힘이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결코 이웃집 아이들을 꾸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든 일을 잘 하지 못했든 우리는 그들을 꾸중하지 않는다. 당신의 자녀라야 꾸중할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의 범위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또한 징계의 동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징계하심은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계시록 3장 19절도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한다.
7, 8절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징계의 범위는 오직 자녀에게만 국한된다.
9절 :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받을진대,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의 징계를 더욱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10절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징계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기 좋아해서가 아니고 또한 우리로 고통당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목적은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지나치게 방자히 행동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손으로 그러한 사람을 무겁게 억누르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책하기를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목적은 그분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 그분은 징계를 멈추신다. 그러므로 징계는 우리가 주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주님께 속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주님은 그분께 속하지 않은 사람을 징계하실 필요가 없다.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야 징계받을 자격이 있다.
형벌과 징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은 그분의 자녀를 형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이 질책하신다 하더라도 이것은 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징계하시는 것이다. 징계의 전일한 목적은 우리로 매일 어리석게 생활하지 않도록하며,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려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은 후에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엄중한 매를 맞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후에는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 실패하고 넘어질 경우, 물론 영생을 잃어버리거나 영원히 멸망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께 매를 맞게 된다고 말한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이 땅에서 함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구원받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영영 요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이 방자히 행하고, 정욕대로 살며, 임의로 범죄하며, 더러움 가운데 떨어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환경과 가정과 건강에서 혹은 장래 갈 길에서 그분의 손으로 그를 징계하실 것이다. 그의 가정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하게 하거나 그의 몸에 어떤 질병이 생기게 하거나 그의 환경 가운데서 고통스런 일이 일어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형벌을 주려거나 의도적으로 어려움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여 부르심받은 은혜에 합당히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합당한 인식이다.
어느 누구도, 만일 당신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자녀로 보지 않고 개처럼 발로 걷어찰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역사를 보지 못했거나 주 예수님의 역사를 너무 가볍게 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이 영원한 것임을 보여 준다. 동시에 성경은 믿는이들에게 상당한 형벌이 있음도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상당한 형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예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분의 아들답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지옥으로써 우리로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위협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완전히 은혜에 속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거룩함을 추구하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가정과 육신과 사업과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우리로 많은 일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분에게로 돌아서게 하신다. 이것이 그분의 징계의 목적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극심한 징계를 받았다(행 5:1-10). 전에 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성경을 더 자세히 읽어보았을 때,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순절날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도 물질을 드렸다. 차이점은 그들이 약간의 헛된 영광을 탐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도박하거나 음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그들이 믿는이들이었음을 증명한다. 만일 그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장수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즉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그들이 우리 형제 자매였음을 증명한다.
고린도의 믿는이들은 만찬집회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의 몸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주님의 만찬을 대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고린도 전서 11장 29, 3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징계의 손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게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임의로 주의 몸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역사를 보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몸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이 마땅히 그들의 존중을 받아야 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들이 마땅히 서야 할 위치를 보지 못했다. 결국 그들 가운데에는 약한 자도 있고 병든 자도 있으며 죽은 자도 있었다. 그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을 징계하신 것이다.
32절 :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에는 목적이 있다. 그분의 징계의 목적은 바로 장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세상 사람들이 받을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징계는 우리의 구원을 증명하고 우리의 구원을 지켜준다.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들이 자신을 풀어놓고 제멋대로 생활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아무런 제한이 없이 『저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이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로 범죄치 않고 제멋대로 자신을 풀어놓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그분의 징계는 우리의 죄 정함에 대한 일종의 대치이다. 사람들은 죄 정함이 우리로 범죄치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정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징계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징계로 말미암아 믿는이들을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게 하신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징계받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징계는 오늘날의 훈련일 뿐 우리의 영원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린도 전서에는 그리스도인이 징계받음이 오히려 그가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증명해주는 한 가지 좋은 본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극심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구원을 받은 것이다. 고린도 전서 5장은 한 그리스도인이 간음하는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한 음행은 이방인 가운데서도 없는 것인데, 이는 곧 자기 아비의 아내를 취한 것이다(1절). 모세 율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분명 이 사람이 필히 멸망하고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고린도 전서는 이 사람이 극심한 죄 곧 하류(下流)에 속한 죄를 범했고 이방인도 범하지 않는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의 권위로 이러한 사람을 사단에게 넘기워 그의 육신을 멸하게 했다고 말했다. 즉 사탄이 그의 몸에 능력을 행사하여 그 사람을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하며 심지어 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한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그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4-5절). 징계는 이생에 관한 것이다. 결코 이것은 영원 구원과 관계된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였다면 『나는 끝났다.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 이같이 큰 죄를 범했으므로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큰 죄를 범할지라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잠시 징계를 받겠지만 영원토록 멸망하지는 않는다. 비록 징계를 받아야 하겠지만 영원 안에서는 여전히 구원을 받게 된다. 신약에서 바울은 수차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여기의 「멸하는 것」이나 좀전에 말한 「잠자는 것」은 다 육신에 관련된 것이지 결코 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영의 문제와 영원 구원의 문제는 주님을 믿을 때 이미 해결되었다.
어떤 사람은 요한 일서 5장 16절에 대해 어렵다고 말하는데, 거기서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하여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서 말한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요한 일서 5장 16절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할 정도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세상에서 떠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린도 전서 11장의 죽음과 5장의 「멸하게 함」(부패케 함)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모두 육신의 면을 말하는 것이며, 영과는 무관하다. 이 징계는 다 육신에 관계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떤 곳에서 말한 것이 믿는이가 멸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들의 징계에 관해 말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째로 상급과 은사의 차이 혹은 왕국과 영생의 차이를 보기로 하자.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은 무엇이고 영생은 무엇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천국을 영생으로 생각하고 영생을 천국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섞어 천국을 얻는 조건을 영생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삼는다. 그럼으로써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을 곧 영생을 잃어 버리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구별은 매우 분명하다. 사람이 천국은 잃을 수 있어도 영생을 잃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상급을 잃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은사는 잃어버리지 않는다.
상급은 무엇이고 은사는 또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은사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므로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이다(엡 2:8-9). 또한 상급은 구원받은 후의 우리와 성령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었다. 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얻기에 합당치 않은 은사를 얻게 하였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우리는 성령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관계는 우리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상급을 얻게 한다.
만일 누가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생명으로 영접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구원받은 후, 즉시 그를 그의 앞에 있는 상급을 얻기 위해 경주하고 달릴 수 있는 길에 두셨다(고전 9:24, 빌 3:13-14, 히 12:1).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로 인해 구원받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날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이렇게 행한다면, 노정이 끝날 때에 이르러 그는 하나님의 하늘에 있는 영광과 상급을 얻을 것이다(딤후 4:7-8).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우리 노정의 첫 단계이고, 상급은 우리 노정의 마지막 단계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상급을 얻을 자격이 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이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 앞에 두신 것은 은사이고 그리스도인 앞에 두신 것은 상급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은사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를 따르면 상급을 얻게 된다. 은사는 믿음으로 얻는 것으로서 세상 사람에게 주신 것인 반면에, 상급은 충성과 선한 행실로써 얻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구원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생각하고 구원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과 천국을 하나로 보고,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행위의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분깃과 사람의 분깃을 둘로 나누었다. 한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고, 다른 부분은 천년 왕국 안에서의 영광이다. 구원은 행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단 당신이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은 즉시 두번째 것을 당신 앞에 두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구원 외에 내게는 또한 상급이 있다 네게 줄 장래의 영광과 면류관과 보좌가 있다.』 그분은 보좌와 면류관과 영광과 상급을 믿는이들 앞에 두셨다. 만일 사람이 성실하다면 이것들을 얻게 되고, 성실하지 않다면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행실이 필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는 선한 행실이 구원받는 일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선한 행실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행실이 나쁘다고 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행실은 상급의 문제에 있어서 필요하고 면류관과 영광과 보좌의 문제에 있어서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가 소용 없다. 하나님은 결단코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허락하실 수 없다. 또한 사람은 결코 믿음으로만 상급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가 나쁘다고 해서 그를 멸망당하게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아들을 믿는가 안 믿는가로써 그가 구원받을 것인가 멸망당할 것인가를 결정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아들을 믿는가 안 믿는가로 사람이 그분의 영광을 얻을 것인가 못 얻을 것인가를 결정하실 수 없다.
당신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가 없는가는 당신이 영원히 구원받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멸망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에게 선한 행실이 있는가 없는가는 당신의 상급과 영광을 얻는 문제를 결정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은 결단코 공로가 있다고 해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없고, 또한 공로 없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실 수도 없다. 사람에게 공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결코 공로 없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직 의지할 데 없고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만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신실해야 하고 수고함으로써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한 행실을 가져야만 이 상급을 얻을 수 있다. 결단코 선한 행실이 조금도 쓸모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선한 행실이 구원받는 데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선한 행실은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다. 구원의 문제는 당신이 자신의 위치를 회개하기 원하는가, 자기의 과거를 통회하며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십자가의 역사를 믿고 그분의 부활을 당신의 의롭다 함 받는 근거로 삼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해준다. 행위의 문제는 상급과 관련된다. 행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상급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구원과 왕국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 있다. 성경은 구원과 왕국, 은사와 상급을 완전히 구분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것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교리에 대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상급의 문제에 관하여도 분명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상급의 문제를 구원받지 않은 사람 앞에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다만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은 후, 그 앞에 놓여진 것은 상급이다. 그들은 힘을 다하여 달음질하고 상급을 추구해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인 체험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첫단계이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앞에 있는 상을 얻기 위해 달음질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구원을 상급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죄인은 구원을 상급으로 생각하여 행위를 의지하려 하고, 그리스도인은 영광을 은혜로 생각하여 아무 목표 없이(어리석게) 생활한다. 행위는 상급에 적용되는 것이고 은혜는 구원에 적용되는 것임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을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로 구분하시고, 영생이 있는 자와 정죄받는 자로 구분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상급으로 그분의 자녀를 두 무리로 구분하신다. 구원이 세상 사람을 구분한 것같이 상급은 하나님의 자녀를 구분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로 구분하신다. 세상 사람에게 있어서는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충성스러운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세상 사람에게 있어서는 구원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의 문제이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상급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의 문제를 지나치게 큰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받지 못하고만을 주목한다. 그들은 행위가 좋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들은 상급을 추구할 여지가 없게 된다. 첫번째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두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우리는, 구원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고, 이 문제는 요동하지 않으며 주 예수님이 이미 완성하여 이루신 일이고 오늘 우리가 힘써 추구해야 할 것은 앞에 놓인 상급임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장래 왕국 안에서의 큰 차이는,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광을 얻고 어떤 사람은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상급이 무엇으로 인해 얻어지는가를 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상급이 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구원받는 문제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듯이 상급을 얻는 문제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성경은 구원이 죄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상급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상급이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에 있어서도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당신은 결코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4장 4절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라고 말한다. 「일하는 자에게 그 삯이 있다」는 말은 「일하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다」고 번역할 수 있다. 일하는 이가 상급을 얻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어떻게 해야 상급을 얻을 수 있는가? 상급은 일함으로 얻는 것이지 결코 은혜로 얻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 2장 23절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 구절은 주님이 교회들에게 그분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게 하신다는 것과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리라는 것 혹은 우리의 행위대로 상급을 주시리라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어떻게 갚아 주시고 상급을 주시는가? 우리의 행위대로이다. 물론 이 행위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옷을 피로 희게 씻었을 뿐이다(계 7:14).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 예수를 살아나타낸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내지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내지 않는다. 모든 자본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모든 능력 또한 그분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 역사하시게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보상과 상급을 얻는 문제가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합당한가에 달려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늘날 하나님은 자격 있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또한 결코 자격 없는 그리스도인에게 상 주시지도 않는다.
고린도 전서 3장 14절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여기서는 그의 일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는다고 말했지 결코 그의 신앙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을 받는 문제는 일에 달려 있다. 성경은 구원과 상급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믿음으로 아니하고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좋은 행위로 아니하고는 사람이 상급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의 행위가 심판대에서 그대로 있고 불꽃 같은 눈의 감찰을 통과할 수 있어야만이 상급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누가복음 6장 35절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상급은 완전히 당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당신의 행위이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것도 당신의 행위이다. 이것들이 있어야만이 상급을 얻을 수 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당신이 원수를 사랑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 곳이 없으며, 돈을 빌려주면 형벌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 곳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선대하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 것이라고 말한 곳은 있다. 상급의 문제는 행위로 인한 것이지 결코 믿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당신으로 구원받게 할 수 있을 뿐 상급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
디모데 후서 4장 14절 :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여기서 성경은 하나의 본을 말한다. 여기 한 그리스도인은 바울에게 해를 끼치고 그에게 죄를 범했다. 여기서 말한 사람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다. 장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을 받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많은이들이 구원과 상급의 차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상급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했다. 성경에서, 주 예수님이든 사도들이든 상급과 왕국에 대해 말할 때 은사와 영생을 말할 때처럼 근거 없이 말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그분은 빈 말이 아닌 실제를 말씀하고 계신다. 로마서 6장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23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가 영생인 것이 매우 분명한 사실임을 볼 수 있다. 그럼 상급은 대체 무엇인가? 성경은 또한 상급이 면류관이요 보좌요 천국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천국이 바로 상급이다. 성경에서 천국은 세 방면을 갖고 있다. 첫번째 방면에서 천국은 오늘날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외형 곧 하나님의 주권의 외형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천국이라고 한다. 두번째 방면에서 천국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는 하늘의 통치와 제한인데, 이것도 역시 천국이라고 부른다. 세번째 방면에서 천국은 상급을 가리켜 말한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천국에 관해 말씀하셨다. 주님의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사람이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계속적으로 상급에 관한 것들을 언급하는데, 이것들은 우리에게 상급과 천국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다 알듯이 팔복(사실은 아흡 가지 축복이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3-6,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10절). 앞의 몇 가지 축복에서는 천국이라는 단어가 두차례씩 언급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1-12절)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급이 곧 천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시작에서 주님이 어떠어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고서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어떠어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에서 저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구는 우리에게 천국이 곧 하나님의 상급임을 보여준다. 이 양자는 서로 구분될 수 없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상급의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여기서 그분이 다루시는 것이 왕국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5장 46절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6장 1, 2절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절 :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절 :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4절 :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6절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절의 마지막 문구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수훈의 주제가 천국임을 시인한다. 이 세 장은 계속적으로 상급의 문제를 언급했는데, 이는 천국이 곧 상급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6장 27절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구원받은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행한 대로 상 주시거나 질책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8절).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사람이 갚으심을 얻는 것은 행위에 근거한다. 상급은 완전히 행위에 근거한다. 둘째 각 사람이 갚으심을 받을 때는 언제인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그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그 때가 바로 이 땅에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때이다. 그러므로 왕국이 시작될 때가 바로 상 주실 때이다. 세째로,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예표가 있다. 변화산상에서의 주님의 변형은 주님이 장래 왕국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을 말해준다. 그 때에 어떤 믿는이는 상을 받을 것이다.
좀전에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6장의 구제에 대한 보응과 기도에 대한 보응과 금식에 대한 보응은 모두 상과 관계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대한 보응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주 예수님이 다만 너희가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살피고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면, 기도에 대한 보응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를 말한 문장 앞에서 구제를 언급하고 그 뒤에서 금식을 언급하실 때에도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서 살피고 갚으시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갚으심은 반드시 장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주님은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면 저가 은밀한 중에 보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신다고 하지 않고 보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은 그분이 보신 것에 근거한다. 그분은 눈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상급은 장래에 속한 것이다.
또 계시록 11장 15절을 보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8절 :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왕노릇 하실 때, 곧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가 바로 온 성도들이 무론 대소하고 다 상을 얻을 때임을 본다. 환언하면 왕국의 때가 바로 상을 받을 때이다. 언제이든 왕국이 임할 그 때가 바로 상급을 얻을 때이다.
더 나아가 상급은 곧 면류관을 얻는 것이요 또한 보좌에 앉는 것이다. 한번은 어느 외국 선교사가 나에게, 『내가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최소한 왕국은 소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영국 왕에게, 그가 면류관을 잃어도 여전히 왕국을 소유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 면류관이란 무엇인가? 면류관은 금으로 만든 모자 같은 것에 보석 몇 개를 박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면류관은 돈만 있으면 얻을 수 있다. 그럼 면류관이란 무엇인가? 면류관은 왕국 안에서의 지위와 왕국 안에서의 영광을 대표한다. 만일 면류관이 어떤 물건에 지나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신에게 돈이 많다면 금으로 만들 수 있고, 내게 돈이 많지 않다면 동으로 만들거나 철로 만들 수 있으며, 그것도 없다면 천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장래 당신의 면류관은 크고 내 것은 작을 수가 없다. 당신의 머리 위에는 보석이 몇 개 더 많고 내 머리 위에는 적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 면류관은 그 대표하는 것이 있다. 면류관을 잃었다는 것은 곧 그것이 대표하는 바를 잃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면류관이 곧 왕국의 표징임을 보아야 한다.
보좌는 무엇인가? 성경은 사도들이 열 두 보좌에 앉게 될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마 19:28). 면류관은 이기는 자를 위한 상이고 보좌도 역시 이기는 자를 위한 상이다. 그러므로 보좌도 역시 왕국의 표징으로서 왕국 안에서의 지위와 권위와 왕국 안에서의 영광을 나타낸다. 결단코 면류관을 잃은 사람이 왕국을 얻을 수 없다. 또한 보좌를 잃고서 왕국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보좌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왕국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면류관을 잃어버리는 것도 역시 왕국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보좌와 면류관은 다른 뜻이 없고 다만 왕국을 대표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므로 상급은 곧 왕국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급이 곧 왕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가? 우리가 상을 얻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때이다. 베드로는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벧전 4:17). 그러므로 장래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심판하시기 전에 그분은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을 심판하시는가?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멸망할 것인가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영원 구원과 영원 멸망)은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되었다. 당신과 나의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고 영원 멸망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래 또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왕국에 참예할 것인가 아니면 참예치 못하고 매를 맞을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는 심판대를 세우시고 그 심판대에서 그분을 믿는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제 보다 분명한 성경 구절을 두 군데 읽기로 하자. 고린도 후서 5장 10절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의 「우리」는 모든 믿는이를 가리킨다.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 여기의 심판대는 원어에서 「베마(bema)」 로서 땅보다 조금 높은 단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중국어에서 「대(臺)」로 번역한 것은 원뜻에 가깝다. 「베마(bema)」는 가정에서 일을 결정하는 장소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한다. 영원히 사는가 멸망하는가는 믿음의 문제이고, 상과 벌은 행위의 선악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이다.
왕국에 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일들이 더 있다. 당신이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한 가지 문제이나, 설령 당신이 왕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왕국 안에서 당신의 지위의 높낮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만일 당신이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바깥 어두운 곳에서 매를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좋은 행실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으나 주 예수를 믿은 후 우리가 왕국 안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결정해준다. 우리의 영원히 살고 죽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장래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여전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인가 멸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 안에서의 우리의 지위를 결정해준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우리에게, 믿는이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분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절들 중에서 고린도 전서 3장이 가장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은 심판대에서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실 것인지를 매우 분명히 보여준다. 8절 :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이 구절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일한 대로 상을 얻는가를 말한다. 10절 :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각 사람의 공력은 각 사람이 어떻게 그 위에 세우는가에 달려 있으며, 어떻게 세울 것인가는 어떤 재료로 세우는가에 달려 있다.
12-15절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기서는 우리에게 이 터 위에 세우는 자는 다 구원받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어떤이가 이 터 위에 세운 것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얻지만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나 여전히 그는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장래 우리 앞에 심판이 놓여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우리의 멸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을 받을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워치만 니 [워치만니 전집 29, 하나님의 복음 제 20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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