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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 영봉(靈峰)에 오르다 !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처음 통일된 통일신라 때, 국토의 중앙을 상징하는 중앙탑을 충주(옛 중원)에 세웠고, 현재는 중앙탑을 국보 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은 대부분 유명산을 중심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북에도 속리산, 소백산, 월악산 국립공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바다가 없는 충북에서 ‘육지의 바다’라 일컬으며, 남한강을 꼬리 달고 있는 충주호를 품고 있는 월악산 국립공원은 지형적, 민족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심에 있다.
비운의 마의태자가 ”월악산 영봉이 넓은 물 위에 제 그림자를 비추면, 국운이 상승한다”라는 황당무개했던 말이, 지금 영봉의 그림자가 1984년에 완공된 인공호수 충주호에 비춰져,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 것일까?
이런 여세로 월악산의 영흠한 산세 받아, ‘한반도 통일이 한시바삐 재완성되었으면......‘ 하고 열망해 본다.
덕주사 안내판에 의하면, 우리나라 명산의 정상 중 ‘신령스런 봉우리’라는 의미를 가진 ‘靈峰’은 ‘백두산과 월악산밖에 없다’고 기록되어 있고, 북한산과 같이 '산악인들 영혼의 안식처'라는 의미의 영봉은 몇 군데 더 있다고 한다.
누구나, 산에 오르는 이유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에서는 반드시 내리막길을 거쳐야 완성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 산을 오른다지만, 깊이를 더해 본다면, 속진(俗塵)을 털고 배타적 자유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올라, 頂上의 마력에 심취되는 경우와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순수한 자연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리우고, 불변의 진리와 소리없는 가르침을 전해줄 친구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오르는 경우, 자연의 선물들을 오감으로 느끼며, 정신적 평화와 마음의 정화, 육신마저 평온하게 하여, 균형있는 건강으로 회복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산에 오르지 않을까?
남들은 등산일지 몰라도, 산행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우리 父子는 을미년 3월 9일 월악산 영봉을 향한다. 일상처럼 ‘어디쯤 가다보면 LPG주유소가 있겠지’하고, 송계계곡 입구까지 가서야 스마트폰을 검색해보니, 암담하게도 최단거리 주유소가 14km 거리의 수안보 외곽에 있단다. 그래도 몰라, 인근 휘발유 주유소에 가서 다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영봉, 중봉, 하봉을 비롯한 만수봉, 도락산, 제비봉, 금수산, 구담/옥순봉, 마패봉(마역봉), 북바위산, 포암산 등을 거느린 월악산의 최고봉인 영봉(1,097m) 등산로 중 가장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는 덕주사~영봉, 동창교~영봉 코스란다. 덕주사 등산로는 계단이 많고 동창교 등산로보다 1.7km 길어, 더 힘든 코스이기는 하나, 덕주사와 마애불등 많은 문화유산과 더불어 덕주계곡 주변 경관이 시원하고 아름다워 많이 찾는 코스란다.
덕주계곡 초입인 국립공원안내소에 들어서니, 직원이 안내판에서 다른 일행들에게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초행은 아니지만, 눈 덮인 산행인지라, 미리 몇 번씩 점검한 행로를 다시한번 물으니, 밥 먹는 시간까지 6시간 반에서 7시간이 걸린단다.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며, 바삐 발걸음을 덕주사로 옮긴다.
덕주계곡을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곳은 덕주루이다. 신라의 덕주공주가 부왕인 경순왕을 그리워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권토중래의 비장함으로 쌓았다는 덕주산성의 북문인 북정루, 남문인 월악루와 함께 동문인 덕주루는 구비쳐 내려오던 계류가 소를 이루면서 학들이 많이 살았다는 학소대, 그 옆에 층층의 반석들이 높다랗게 올려져 달구경했던 곳이라는 망월대와 손을 잡고 있다. 탐방로를 옆에 두고 잠시 걷다보니, 이마 위에 덕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587년(진평왕 9)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신라의 마지막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세우고, 금강산으로 떠난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의 덕주사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 마애불(德周寺 磨崖佛) 앞에 고색창연한 기도사찰인 상덕주사, 지금의 절을 하덕주사라 불렀다 한다.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 지점에 있었는데, 1951년 한국전쟁때 김일성이 남한에 쳐들어와 최남단 사령부를 설치한 곳이 덕주사에서 10여km 떨어져, 왕의 온천으로 널리 알려진 수안보이다. 이때 작전상의 이유로 덕주사를 소각하였다고 한다. 〗 -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
마애불로 가는 등산길은 조금 가파르고 바위도 많아, 걷기가 까다로운 편이지만,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터인지라, 잘 조성되어 있어 큰 불편은 없어 보인다. 군데군데 쌓인 눈이 족적에 눌리어 생긴 빙판길과 자갈 바닥이 얼어있어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고, 양지쪽엔 해설수들이 흐르면서 질펀한 곳도 있어 신경이 쓰이는 산행이다. 이런 길을 1.7km정도 걸으면, 상덕주사 자리에 닿는데, 초입에 덕주산성 문터를 지나치게 된다. 양쪽으로 뻗은 성벽은 많이 무너졌지만, 문이 있던 자리 근처는 비교적 잘 복원되어 있고, 바닥에는 돌쩌귀 구멍이 파인 지도리석(문기둥 받침돌)도 있다.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 높이 13m. 보물 제406호. ≪동국여지승람≫에 의 하면 덕주사는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누이 덕주공주(德周公主)가 건립한 절이라고 하는데, 한국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화강암 벽의 남면 가득히 부조된 마애불은 얼굴과 어깨는 도드라지게 새기고 그 아래는 선각으로 간 략하게 처리하였다. 법의의 옷주름도 도식화되어, 그 규모에 비하여 조형 수법은 졸렬한 편이다. (중략)
마애불의 양어깨 위 좌우에는 사각형의 건물 가구공(架構孔)들이 남아 있어, 조성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 거불 조성의 추세에 힘입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비만한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한 조형, 입체성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그리고 현저하게 도식화된 옷주름 등의 조형 수법은 상의 규모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제작 시기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
멀리, 대원사의 미륵불을 바라보는 마애불앞에서, 간직한 소망들을 열거하며 합장을 하고, 마애불 좌상단의 감로수를 한 잔 들이킨 후, 대웅보전 뒷 기단에 걸터앉아 배낭속의 음료수와 빵으로 땀을 식혀본다.
여기서부터는 자체가 높이는 150m정도, 둘레는 4km가량 되는, 여인네 젖가슴처럼 봉긋이 솟아오른 거대한 영봉의 바위를 오른다. 계단 난간에 신세 지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벌러덩~ 뒤집혀, 천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한 급경사로, 가파른 철 계단과 씨름하고, ‘흡흡, 하~아~’가 반복되면서 거칠어지는 호흡은 입에서 단내나게 만든다. 그래도 경사가 조금 있다는 북벽으로 300m정도의 계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설치되어 있지만, 거의 직벽에 가까운 계단들이 눈과 얼음에 점철되어 한걸음, 한걸음 내딛기가 만만치 않으니,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햐~~~ 이게 영봉이구나!!!!! 아무 말이 필요 없다.
바람이 귓전에 쌩쌩거려도, 사방에 펼쳐진 풍광은 나중이고, 배낭을 풀자마자 점퍼, 남방까지 벗어 제끼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지만, 금새 한기를 느껴 다시 주섬주섬 챙겨입고, 주위를 돌아보니, 먼저 올라 온 아들녀석은 건너 봉우리에서 한적하게 한반도를 조망하고 있는 듯하다.(^^-)
만사 시름을 잊은 채, 하늘과 구름과 산들이 펼쳐놓은 황홀경에 도취하여, 자신만의 색채로, 나래를 접었다 폈다 하는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충주호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조물락 거릴 수 있을 것 같은 만용도, 이곳에서만 허락되는게 아닌가 싶다. 폴짝 뛰면 하늘에 부딪힐 것 같은 망상에 실소를 머금으며, 땀을 삐질거리며 오른 보상을 충분히 받은, 훌륭한 산행임을 확인한다.
까까머리 교과서에 나왔던, 금강산의 여정과 감상을 담은 정비석님의 수필 ‘山情無限’의 일부를 인용하면, 〖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외·해(內外海) 삼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可惜)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海拔) 육천 척에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을 발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快勝)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에서처럼 주변의 온 천하가 발아래 깔렸으니, 마치 자신이 세상 최고인 양 착각케 하는 자신감을 느낄 수 있음이, 정상에서의 특권이자, 산행의 백미 아니겠는가~
느긋하게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을 챙겨먹고, 내려갈 일을 생각하니 막막하고, 갑자기 발이 천근만근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게 우리네 인생 인걸~~’
불현듯, 우리가 힘들게 산에 오르는 이유가 ‘어쩌면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연습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돈키호테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휘하 산하에 안녕을 告하고, 저녁을 갈비집에서 해결 할 생각으로 바꿔보니, 갈 길이 바빠진다.
대부분 아이젠을 신은 포항, 안성, 원주 등지의 산악회 회원들은 자기네 깃발을 배낭에 꽂고, 밀고 당겨주며 삼삼오오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멀찌감치 앞서 내려가는 아들녀석이 뒤를 힐끔거리며, 無言의 압력으로 재촉한다.
내려갈 때 오를 때와 풍광들이 다르게 비춰지는 건,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있겠지만, 오르막의 부담이 덜해졌고, 주차장엘 도착하면 편안해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해져서일까?
차근차근 신륵사 삼거리를 지나, 송계삼거리 영봉대피소에 도착하여, 그냥 올랐던 덕주사 코스로 하산하느냐? 아니면 거리도 짧고, 난코스가 없는 동창교 코스로 하산하느냐를 고민하다가, 새로운 경험이 될 동창교 코스를 선택하여 하산을 서두른다.
몇 구비 돌아, 앞서가던 산악회원 중 여성회원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찢자, 일행들은 깔깔대기 바쁘다. 우리도 덩달아 웃으면서 “부상을 안 당했다면, 이것도 재미입니다!” 라고 던지자, 또 깔깔댄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처럼 상쾌하게 내려오면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다시한번 돌아보면서, 산행을 하는 이유가 ‘뒤돌아보는 연습을 위함은 아닐까?’ 라는 억측도 해본다.
게을러서, 삐뚫어지고 펑퍼짐해진 도심인근 야산의 나무들과는 달리, 푸른 꿈을 품고 하늘을 찌를 듯 근심없이 자란 나무들이, 남들과 비교하면서 뒤틀린 내 심사를 평온하게 해준다. 산허리를 휘감은 낙락장송은 유구한 세월을 대변하듯 고고함을 뽐내고, 뭉툭한 바위틈새에서 수절한 여인의 절개인양 외로이 서서, 월광의 부름을 기다리는 소나무와 억겁의 세월을 지키다 쓰러져, 새로운 잉태를 갈망하는 고사목은 애닯은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가지사이로 한웅큼씩 쏟아지는 햇살이 피아노 건반처럼 비치우고, 군데군데 산죽들이 산등성에서 내쳐부는 바람에 스삭거리는 소리가 우리 가락처럼 들리며, 흩어져 내려온 바위 파편들이 등산로를 무시하듯 사방에 널부러져 있다. 얼마를 내달렸을까~ 아담한 산신각이 나타나고, 뒤를 이어 자광사라는 현대식 사찰이 하늘팬션과 이웃해 있다. 입구 매점에서 다시 음료수를 하나씩 사들고, 차가 주차된 덕주사 입구 주차장으로 향한다. 비교적 너른 송계계곡에 맑은 물이 제법 풍부한 유량을 흘려보내고, 건너 이쁘장한 팬션이나 민박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여름 피서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시계는 4시 반을 가리킨다. 여름날 같이 몽실몽실 솟아난 뭉개구름 아래로 지나치는 습한 공기가 땀을 식혀주는데는 그만이지만, 금방이라도 어둠이 내릴 것 같아 서둘러 벚나무 가로수길을 걸어 솔밭야영장을 지나 덕주사 입구에 도착하니, 전국의 산악회에서 모여든 관광버스들이 고속도로 휴게소를 방불케 한다.
휴~~~
송계계곡에서 야영장으로 유명한 닷돈재를 거쳐, 전국에서 손꼽는 자연탐방로를 자랑하는 만수계곡, 좌회전을 하면, 미륵대원사와 영남 땅과 이어주는 하늘재(계립령)의 분기점인 미륵리 삼거리를 지나, 하늘재를 질러간다는 지릅재를 넘어서니, 계곡을 끼고, 예전엔 보지 못했던 팬션, 카페, 식당, 민박집들이 우후죽순 지어져 있고, 그 앞에는 제법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걸 보니, 찾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았다. 4차선으로 새로 난 3번 도로를 타고 수안보를 지나면서 LPG주유소에 들르고, 살미면 단양삼거리에서 신호대기 중, 맛집 정보에서 보았던 ‘산더미 탕수육’과 ‘짬뽕’을 맛보기로 하고 기수를 돌려, 중산리 저수지 아래, 호젓한 농촌마을 상촌리에 있는 중국집, 상촌식당엘 찾아가니, 오후 2시반까지만 영업한단다. 쓴웃음으로 대신하고 발길을 돌린다.
술엔 젬병인 아들에게 핸들을 넘겨주기로 하고, 반주도 한잔하면서 산행의 소회를 나누고, 자주 못하는 여행이지만, 다음 여행은 작년 몰디브 여름 휴가때처럼 ‘휴식과 체험’을 주제로, 장소는 그때 정하기로 하면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머릿속에 재워두며, 이번 산행을 마무리 한다.
첫댓글 너무 생생한....
글 읽는 내내 봄이오면
월악산 다시 오르고 싶어지네.요
몇분만 읽기가 아까운글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