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20일 월요일 지인들과 정읍 산내에서 새벽2시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한다. 이번 여행은 장사의 임시정부를 들러보고 장가계로 이동하여 숙박을 하고 천문산, 보봉호, 황룡동굴, 원가계, 양가계, 대협곡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인천공항 2터미널에서 08시55분에 창사로 출발하는 KE819편에 탑승하여 창사공항에 11시40분(창사는 한국시간보다 1시간
늦음)에 도착하여 중식을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했던 남목청 6호로 이동한다.
점심식사를 서호루에서 현지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사) 활동구지. 남목청 6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남경(난징)에서 이곳 장사로 옮겨 온다. 창사(장사)의 남목청 6호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1938년 5월 남목청 사건이 일어나 일시 지도부 공백 사태를 맞는다.
남목청 사건이란?
1938년 5월 6일 임시정부 수반인 백범과 현익철,유동열,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민족주의를 표방한 3개 정파인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조선혁명당이 합당을 논의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매수당한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에게 저격을 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구 선생은 중태, 현익철은 사망하였고 결국 임시정부는 광주(광저우)로 옮겨가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8년의 이동경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13년 동안 활동하다가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나 첫 번째로 자리 잡은 곳이 항저우였고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자싱에서 생활하였다.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까지 항저우에 머물다가 일본의 대대적인 추적을 피해 전장으로 이동한 뒤 난징을 중심으로 약 2년간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각지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잠시 창사에 모여 생활하다가 1938년 7월 광저우로 이동해 등산바이위안에 정식 청사를 마련했다. 중국 최남단에 위치해 일본의 공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고 국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광저우에서 약 25km 떨어진 포산으로 이동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마저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100명이나 되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이동 자금과 교통편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에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싼수이, 류저우 등을 거쳐 1939년 5월 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107명이었다. 1940년 9월에는 임정 요인 대부분이 전시 수도인 중칭으로 이동하여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지청천 장군의 침실.
현익철의 침실.
창사에서 4시간30분을 달려 장가계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는 한식으로 감자탕을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