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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의 듀이 비판
국내에서도 듀이 교육이론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교육학자는 이홍우이다. 여기서는 먼저 이홍우의 교육관을 개략적으로 밝힌 다음 그 토대 위에 이루어지는 듀이 이해의 기본적인 관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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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듀이 비판의 골자를 검토하고 그러한 비판이 지니는 문제점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이홍우에 의하면 교육은 지식의 형식을 전달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지식의 내재적인 가치를 음미하도록 하는 데 교육의 주안점이 있다. 이때 지식의 습득은 단순히 마음을 형성해 주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형이상학적인 실재와 관련을 지닐 때만 의미있다고 간주한다. 이 때문에 이홍우는 그의 교육논의에서 플라톤적 삶의 형식으로서의 형이상학적인 실재를 가정한다. 그리고 일체의 지식은 그 실재를 바라보게 하는 데 근본적인 의의가 있으며 교육은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홍우는 그의 교육관의 기본적 입장을 밝히고 있는 『교육의 목적과 난점(1984)』에서 형이상학과 교육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삶을 이어가는 활동으로서의 교육과 공동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교육과 형이상학은 각각 서로의 정당성을 확립해 주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53).
교육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형이상학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으며, 형이상학은 교육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74).
이 점에서 앞의 허친스나 마리땡과 유사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즉 이홍우에 따르면 교육의 존립 근거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가정하고서라야 가능하다. 이는 철두철미 전통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교육관으로, 교육학의 존재는 철학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는 타학문에의 종속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지향하는 교육은 그 방법적 측면에서 보면 주지적인 이론적 교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학, 수학, 문학, 역사 등 여러 교과는 모두 그 ‘절대수준의 논리적 가정’을 활용하는 일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그 일을 가르치되 점점 그것을 탐색하는 데에 접근 할 수 있도록 세밀히 계열화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오직 그 계열화된 단계를 성공적으로 밟았을 때입니다(73).
결국 이홍우의 주장은 형이상학과 교육이 지식을 매개로 불가분의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지식은 실재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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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적인 사다리로 그를 통해 실재에로 다가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전통철학에서 가정하는 표상주의, 즉 인간의 지식 혹은 그 지식을 담지하고 있는 마음은 실재를 표상 혹은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한다. 이러한 교육관은 실재론적 형이상학에 입각한 주지주의 교육관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이홍우의 교육관은 그가 수용하는 주지주의적 교육이론가들에 대한 재해석에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홍우는 교과관 혹은 지식관에서 ‘지식의 구조’로서 교과를 강조한 브루너와 공적인 전통에 반영된 분화된 개념의 체계화된 형태로서 ‘지식의 형식’을 주장한 피터즈의 관점을 충실하게 수용하고 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교육관을 반영하여 플라톤적 재해석을 시도한다. 즉 피터즈의 교과에 대한 정당화 논의가 보다 더 근본적인 정당화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의 근거로서 삶의 형식을 가정해야 하는 데, 그때 삶의 형식은 사회적 경험적 차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형식을 가정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이론적인 지식은 절대적인 표준으로서 이데아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는 브루너의 구조와 피터즈의 형식이라는 용어가 모두 플라톤의 이데아의 번역어로 될 수 있는 착상에 근거를 둔다. 즉 브루너의 지식의 구조와 피터즈의 지식의 형식 논의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단지 지식의 구조나 형식을 가르치는 경우를 넘어서 그것을 왜 가르쳐야 하느냐는 정당화의 차원을 확보하여야 하는 데 그것은 ‘실제적 효과에 의한 정당화’가 아닌 ‘형이상학적 정당화’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때 형이상학적인 정당화란 지식을 통해 이데아를 바라보게 하고 부단히 추구함으로써 그 자체의 내재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홍우는 실용적 의미의 교과관(여기서 듀이의 교과관을 의식하고 있다. 341)과 자신의 형이상학적 교과관을 구분한다.
이러한 교과 의미에 관한 형이상학적 정당화 작업은 주지주의적 교과 교육이 형식도야이론에 의해 정당화되어온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홍우는 이 작업을 통해 자신의 교과관과 교과 교육의 의미를 드러낸다. 전통적으로 형식도야이론에서 ‘형식’은 교과의 형식과 우리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일반적 정신능력을 동시에 지칭한다. 그리하여 형식도야이론은 교과를 공부하면 일반적 정신능력이 도야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런 형식도야이론은 교과의 두 측면인 형식과 내용 중에서 형식 즉 마음 혹은 정신 능력을 전적으로 편파적으로 강조하는 오류에 빠졌음을 지적한다. 그런 전제 아래 이홍우는 교과에는 형식과 함께 내용의 측면이 있는데, 만약 교과의 형식이 우리의 마음을 형성한다면, 교과의 내용은 그 마음이 지향해야할 방향을 지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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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그에 의하면 교육이 우리의 마음을 형성해 준다고 말하면서 그 마음이 지향해야할 방향을 말하지 않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론으로서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따르면 마음을 형성해주는 교과 교육이 온전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마음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전제 조건으로서 실재라는 것을 가정하여야 한다.
전통적 교과는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고 그 마음의 근육은 인간의 모든 문제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적용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전통적 교과의 내용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내용이 사람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가를 알아내려고 했더라면 형식도야이론은 어떤 형태를 띠었겠는가? 모르기는 해도, 그것은 교과의 의미를 한편으로 인간의 마음과 또 한편으로 그 마음의 바깥에 있는, 그 마음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과의 관련으로 설명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흔히 ‘실재’(있는 그대로의 것)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인간 자신도 그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세계)의 참모습이다. 교과는 이 실재의 참 모습을 다양한 관점에서 그려내어 준다(1995, 202).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홍우는 일체의 지식을 상징하는 교과 교육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따라야 할 실재라는 불변의 절대적인 기준을 가정해야만 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는 실재를 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교과 교육은 필연적으로 실용적인 가치로 환원된다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대략적으로 『교육의 목적과 난점(1984)』을 중심으로 이홍우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지닌 교육관의 내용을 검토해 보았다. 그는 서양의 전통적인 자유 교육의 이념 즉 지식을 통한 삶의 이상 추구라는 전통을 이어받되, 현대의 자유 교육론자보다도 더욱 희랍적인 형이상학에 부착되어 있다. 즉 이홍우의 교육관은 철두철미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주지주의적인 교육관을 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교육관은 현재 학교 교육의 지나친 도구화 경향과 학문의 내재적 가치가 존중되고 있지 아니하는 데에 대한 문제의식과 통증을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교육이론이 지나치게 경험 과학으로 경도되고 그 결과 경험 기술적인 문제에 매달림으로써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 반성으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런 교육관은 듀이의 교육이론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교육이론을 전개하는 도처에서 듀이를 이론적 대항 논리의 대표적인 상대역으로 삼고 듀이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적인 정체성의 전열을 가다듬는다. 이하에서는 그 비판의 관점과 내용을 살펴본 다음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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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의 듀이 이해와 비판의 관점은 그가 번역한 듀이 저서 『민주주의와 교육』의 역자 『해설』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이홍우는 이 『해설』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교육관이 듀이의 교육관은 거의 정면으로 반대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듀이의 교육관은 철저히 극복되지 않고서는 교육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비판의 기치를 드높인다. 이홍우는 듀이 사상의 핵심으로서 두 개의 명제를 제시한다. 첫째, 이론은 실제에서 나오고 그 실제에 적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 둘째는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사회적 계층분열을 반영하며 그것을 영속화시킨다. [각주 24: 이 명제는 올바른 사회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명제에 의하면 듀이는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 즉 원래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의 전형은 희랍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전통이 오늘날에도 계승되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사회에서는 그런 교육관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듀이는 주장한다. 이런 이홍우의 해석은 대체로 타당한 듀이 해석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이의 민주적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홍우의 언급처럼(해설, ⅺ) 정치적 민주주의의 원리로서 평등의 의미보다는 듀이의 독특한 교육관의 분석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가 지식의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는 ‘인식론적 명제’라면, 둘째는 올바른 사회의 모습을 규정하는 ‘사회철학적 명제’라고 지칭한다. 본 논문의 주요관심사는 위의 첫째 명제에 대한 문제점을 검토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논의는 이에 한정한다.
“이론 혹은 지식은 실제에서 나오고 그 실제에 적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라는 명제는 이홍우가 듀이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이론과 실제는 관련 이전에 구분되어야 하며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이 명제에서 이홍우가 가장 문제시하는 것은 앞 문단보다 뒤의 문단에 있다. 즉 듀이는 학문이 실제적인 삶에서 나온 것을 주장할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적인 삶의 유용성을 위한 도구적 가치임을 주장하는 이론가라는 주장이다. 이홍우가 『해설』의 전반을 통해 듀이를 문제시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듀이가 삶의 실제적 유용성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교과 혹은 지식을 부정함으로써 삶 혹은 교육에서 지식이 차지해야 하는 응분의 지위를 박탈해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듀이는 교육에서 지식이 그 자체로 가치로운 것으로 응분의 대접을 받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지식을 상식의 세계에서나 중요시되는 실제적 결과의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며 심지어는 철학의 성격까지도 실제적인 결과로 환원시키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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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의 이런 듀이 이해는 『해설』이 나온 뒤 쓰여진 그의 저서 『교육의 개념(1991)』에서 그대로 유지·강화된다. 그는 이 책에서 피터즈의 성년식 개념, 정범모의 공학적 개념, 뒤르껭의 사회화 개념을 우호적으로 소개하면서 마지막 장에서 성장으로 상징되는 듀이의 교육이론에 대해 비판한다. 그 비판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듀이의 계속적인 성장이라는 교육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부정과 긍정의 내용을 갖는다. 그 정의가 부정하는 것은 교육에 ‘절대 불변의 고정된 목적’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 다음 그 정의가 주장하는 것은 교육에서 현재의 활동, 즉 학습자 개인의 관심이 달성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위대한 것’, ‘개인보다 큰 것’을 제거시켜 버렸다고 본다.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듀이의 ‘계속적인 성장’이라는 교육의 정의는 결국 교육이 겨냥하는 세계가 실제적인 문제해결과 관련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런 듀이의 교육관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하여 이홍우는 마침내 듀이는 ‘위대한 것에 대한 헌신’을 ‘개인 욕망의 충족’으로 바꿔치기 한 이론가로 혹은 위대한 것에 헌신해야 할 교육을 상식의 세계로 전락시킨 이론가로 규정하고 혹평한다.
그런데 위에서 검토한 이러한 듀이 이해의 관점과 비판은 정당한가? 과연 듀이가 말하는 계속적인 성장이 지향하는 바가 실제적 삶의 유용성만을 목적 삼고 있는가? 듀이가 철학은 그 결과가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교육을 필요로 한다고 했을 때, 그때의 결과가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해결을 통한 유용한 결과를 의미하는가? 바꾸어 질문하자면 듀이가 전통철학을 비판하고 자신의 새로운 교육관에 의해 철학을 재건하고자 했을 때, 그 교육이 과연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 해결을 의식하고 있었는가? 이하에서는 이홍우의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먼저 교육에 관한 이홍우의 관점과 듀이 관점을 전반적으로 대비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해설』에서 듀이 해석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는 명제(1)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분석·검토하고, 마지막으로 『교육의 개념』에서 개진하는 듀이의 계속적인 경험에 대한 해석의 문제점을 살피고자 한다.
먼저 교육에 관한 이홍우의 관점과 듀이의 관점을 전반적으로 대비해 보자. 이홍우는 “[플라톤적인 실재에 해당하는] 삶의 형식을 보도록 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는 부정의를 행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1984, 291)”이라는 주장을 통해, 삶을 가시적 현상과 비가시적인 실재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고 교육과 삶이 지향하는 가치의 근거를 현상을 초월해있는 실재를 바라보는 일에 둔다. [각주 25: 이홍우에 의하면 실재를 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만 인간이 그 실재 그 자체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그것을 늘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1984, 290). 그리고 국가론에 나오는 철학자의 교육과정이나 동굴의 비유로 표현된 인식의 단계는 한마디로 말하여, 점점 그 형식을 보는 것에 접근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본 교육의 과정이라는 것이다(1984, 291). 이렇게 볼 때 실재를 가정한 이홍우에게도 결국 교육은 아직은 미궁인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단지 이홍우의 교육관에서는 그러한 교육의 과정이 실재를 보는 수단으로 간주되며, 그것 자체가 가치롭게 규정되거나 혹은 이론적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교육의 과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듀이와는 전혀 상이하다.] 이런 형이상학적 관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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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각하여 이홍우는 지식은 실재를 바라보게 하는 수단 혹은 실재를 반영하는 매개로 본다. 그런 지식을 획득하는 교육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실재라는 불변의 절대적인 기준을 가정해야 한다. 그것을 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교과 교육 혹은 일반적인 의미의 교육은 필연적으로 실용적인 가치로 환원된다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삶을 초월하는 실재를 부정하는 듀이의 철학과 교육관은 절대적 의미의 인식과 가치를 부정한 셈이며 그 결과 인간 욕망이나 충족시키는 세속적인 실용적 차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
실상 듀이는 삶을 초월하는 전통적 의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실재를 반영한다는 대응설적 진리론도 부정한다. 그런데 전통적 의미의 실재를 부정하면 곧바로 진리의 가치가 실제적인 유용성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인가? 이홍우의 입장은 교과로서의 지식의 의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형이상학적인 실재를 가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인한다. 그러나 듀이가 볼 때 그것은 현상과 실재를 가치론적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실재관의 편견일 따름이다. 듀이에 의하면 지식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상황에서 탐구를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서, 인식주체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한 산물이다. 이때 듀이는 진리 혹은 지식의 유용성을 세계 또는 실재와의 대응으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실제적이거나 세속적인 문제 상황의 해결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유용성과 의미는 어디서 찾을 것 인가? 듀이의 대안은 바로 교육에 있었다. 듀이는 궁극적 실재를 가정하는 절대적 의미의 전통적 진리관을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철학의 과제를 얻어낸다. 그것은 바로 인식의 변화와 탐구 과정 자체를 중시하고 이를 통한 경험의 풍요한 이해와 경험의 부단한 재조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를 통해 삶의 질을 고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 듀이는 이런 인식과 경험의 공유를 위한 협동적인 공동체의 삶을 희구했다. 이것이 바로 듀이에게는 경험의 재구성 과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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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험의 공유라는 교육의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양자의 교육관은 크게 대비된다. 즉 이홍우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보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거기에 접근하고자 하는 일체의 교육적 노력과 과정을 수단으로 본다. 그리고 실재를 바라보게 하는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 내재적인 가치를 갖는다. 반면 듀이에게는 궁극적 실재란 성장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이 임의로 규정할 수 없는 영원한 미궁의 세계이며, 중요한 것은 현재의 경험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는 교육적 활동 그 자체이다. 듀이는 절대적 의미의 실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도 이전의 경험과의 대비를 통해 가치지향적 성장이 가능함을 믿었으며, 지식은 적어도 교육의 맥락에서는 그 자체로 가치롭거나 목적이 아니라 성장에 도움이 되는 한에 있어서 가치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이런 양자의 전반적인 대비를 염두에 두고 이홍우가 듀이를 비판하는 관점으로 제시하는 명제(1)를 검토해 본다. 우선 “이론은 실제에서 나오고 그 실제에 적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에서 먼저 앞의 문단, 즉 “이론은 실제에서 나오고”의 의미부터 검토하기로 한다. 듀이는 앞의 1절에서 검토한 대로 생물학적 통찰을 토대로 하여 지식이 실재의 반영 혹은 그림이라는 대응설적 지식관을 부정한다. 지식은 삶에서 겪는 문제사태에서 발생한다. 이런 삶의 경험의 사태를 이홍우는 실제라는 용어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서 이론이 나온다고 했을 때 그때 실제에 대한 개념은 무엇인가? 이홍우가 사용하는 실제는 언제나 현실적인 생활의 실제적인 사태로 환원하여 이해하고 있다. 즉 실제라는 말의 뉘앙스는 의식주의 문제해결로 이루어지는 생활의 현장을 함축하는 말로 그때는 이론적인 함축과 맥락이 탈락된다. 이홍우의 듀이 비판에는 플라톤적인 이론과 실제라는 경직된 이원론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홍우에게 있어서 실제의 영역이란 이론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생활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이며 그것은 “평탄하고 단조로우며 개념적 구분에 의해 명백하게 진술되지 않는 한, 바쁘게 돌아가는 삶의 소용돌이(1982, 14)”로 이해된다.
실제에 대한 이런 이해 바탕에서 이홍우는 듀이의 실재(reality)는 실제(practice)로 간주하고(해설 ,ⅹⅲ), 그런 점에서 듀이 철학과 교육은 실제적 생활의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실용주의로 해석한다. 실상 듀이는 경험을 초월하는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듀이가 염두에 두는 실재는 실용적 차원의 실제가 아니다. 듀이의 실재는 실천과 성장을 그 특징으로 하는 경험 그 자체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듀이가 말하는 경험의 사태, 즉 경험을 기본단위로 하는 삶은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가지며 그 속성상 경험의 성장을 특징으로 한다. 즉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가능성을 상향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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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닌다. 또한 듀이의 프랙티스(practice, 실제 혹은 실천)는 듀이의 독특한 이론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며 따라서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 이 점은 명제(1)의 두 번째 문단의 검토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혀볼 것이다.
듀이에 의하면 이론 혹은 지식은 실재를 관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맥락에서 부딪히는 장애 혹은 문제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탐구활동의 산물이다. 듀이는 자신의 경험이론, 즉 상호 변환 작용으로서 경험 이론에 근거하여 지식의 관조자 이론을 부정하고 참여적 활동 혹은 실천으로서의 지식의 개념을 구성해 갔다. 이로써 듀이는 ‘보는 것’을 의미하는 이론과 ‘하는 것’을 의미하는 실천이라는 희랍적 의미의 이원적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듀이에게 일체의 지식은 일종의 실험적인 행위의 소산이며 따라서 과학이라는 전형적인 지식활동도 특수한 의미의 실천의 일종이다. 듀이는 이론과 실천의 구분은 이론 우위의 가치관의 편협된 산물로써 가치의 다원화 시대에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듀이에게는 이론만이 내재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영역, 예술, 도덕, 교육 등의 활동도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듀이에게 의미 있는 구분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지력의 작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 자체로 즐길만한 내재적인 가치가 없는 실천의 양식”과 “본질적으로 즐길만한 의미를 충만하게 지닌 실천의 양식”이라는 구분이 의미있다고 본 것이다(EN: 268). 따라서 듀이에게는 모든 삶의 사태가 실천적인 것으로 과학적 이론활동도 특수한 의미의 실천인 셈이며 그리고 그것과 구분되는 다양한 내재적인 가치가 있는 실천의 양식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론이 실제에서 나온다는 명제는 실제의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홍우의 해석은 전통적인 이원론에 근거하여 듀이의 실제를 생활의 실제적인 사태로만 환원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 대로 듀이의 실제 혹은 실천은 좁은 의미의 실제적 사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넓은 의미의 삶의 경험 전반을 포괄한다. 그런 경험의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해결의 과정이 지식의 형성과정이다. 이렇게 볼 때 듀이의 지식의 기원과 성격에 관한 이홍우의 이해는 듀이 지식론의 배경이 되는 경험의 충분한 이해 [각주 26: 듀이의 경험론은 폭넓은 듀이 후기 저서의 조사와 검토를 필요로 한다. 본 연구에서는 4장 듀이 지식론을 다룰 때 본격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개략만 소개한다. 듀이는 그의 후기 철학으로 갈수록 주지주의적 이론적 반성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질적 경험(qualitative experience)의 상황이 있음을 주목하였다. 이때 질적 경험이란 삶의 일차적 존재 상태로서 불확정성을 그 특징으로 하며 그것은 일차적으로 언어나 상징적 수단에 의해서 범주의 내용이 된 대상 이전에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듀이는 그의 철학에서 이런 질적 경험을 수용함으로써 전통철학이 서둘러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성향을 비판하고 오히려 불확실성을 그의 철학 체계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탐구되어야 할 부분으로 보았다. 지적 탐구는 이런 질적 경험의 배경,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확정적 성격을 띠는 경험의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더불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탐구의 결과가 다시 질적 경험의 사태를 이해하고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듀이가 말하는 이런 경험의 사태, 즉 경험을 기본단위로 하는 삶은 실용적 차원의 실제로 환원될 수 없다. 그때의 삶은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가지며 속성상 경험의 성장을 그 특징으로 한다.] 가 부재하며, 또한 이론과 실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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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희랍적인 이원론에 근거한 그릇된 이해로 보인다.
이제 보다 주목해서 검토해야 하는 대목은 명제(1)의 두 번째 문단, 즉 이론은 실제에 적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홍우의 모든 듀이 비판의 핵심적인 포인트는 여기로 집중되어 있다. 이홍우는 자신의 교육관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자리에서 자신의 이론의 대항 명제로서 이 점을 거론한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과연 듀이가 이론 혹은 지식의 가치를 오로지 실제적 생활의 문제 해결에 적용되는 한에서만 찾을 것인가라는 점으로 모아진다. 아닌 게 아니라 듀이에 의하면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삶의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에 있다는 도구주의를 표방한다. 그리고 특히 교육의 맥락에서 지식을 담고 있는 교과는 그 자체로 가치로운 것이 아니라 성장에 도움이 되는 한 가치로운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 뿐 아니라 듀이는 일상 삶의 경험을 충분히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고 반성적 지적 경험만을 중시한 주지주의적인 철학을 비판한다. 이러한 듀이의 주장들은 지식 자체의 내재적 가치에 집착하는 주지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대단히 급진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특히 지식이 삶의 문제해결의 수단이라는 듀이의 주장은 지식이 세속적인 차원의 실제적 생활의 수단으로 환원되는 실용주의적 해석의 여지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듀이의 주장들은 듀이 철학의 문제의식 혹은 그 철학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교육이론의 문제의식의 배경과 맥락에서 검토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듀이의 표면적인 주장들을 탈맥락적으로, 그리고 그 취지와는 관련 없이 해석하게 될 때 듀이는 철학 혹은 교육을 통해 세속적 문제 해결을 시도한 전형적인 실용주의자로 고착되어 오해되고 만다.
프래그머티즘 [각주 27: 철학적 세계관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전통철학의 형이상학을 거세게 비판하면서 나온 미국 특유의 사상이다. 프래그머티즘은 전통철학의 특징을 나타내는 세계에 대한 고정된 목적, 그리고 불변의 실재에 대한 이론적 가정, 이론의 실천에 대한 가치론적 우위 등을 모두 거부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세계의 부단한 변화, 다원주의적인 세계이해, 실재보다는 탐구 방법의 우위성, 그리고 교육에 대한 강조 등이 그 주장의 특징들이다. 듀이는 퍼어스, 제임스로 이어지는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프래그머티즘을 포괄적인 철학사상으로 성숙시켰다. 그러나 듀이는 이전 프래그머티즘과 연속성을 지니면서도 그의 경험의 개념이 성숙되면서 그들과는 상이한 면모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 그것은 듀이 특유의 경험론, 더 나아가서 교육론과의 관련 안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은 패러다임상 전통적인 철학과는 전적으로 상이한 가정을 지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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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오해는 어쩌면 불가피한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서로 다른 철학적인 입장의 세계관이 지니는 차이의 우열을 논하는 것보다는 단지 프래그머티즘의 어떤 특징이 교육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주장이 어떤 방식으로 오해되고 있는가를 이 논문의 맥락과 관련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프래그머티즘의 인식론은 전통 진리설인 대응설과 정합설이 지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특히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은 인식론상 전통적인 견해와 두 가지 차이점을 나타낸다. 그 첫째가 인식에서 실천 혹은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인식의 검증원리로서 결과의 중시이다. ‘인식과 행위의 관계를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확실성의 탐구』에서 듀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이론의 성과를 거론하면서 전통적인 인식론의 특징인 관조자적 인식론 즉 인식 주체와 대상의 이원적 구별,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눈이 불변의 실재를 그대로 관조할 수 있다고 하는 가정 등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이론으로 규정한다. 오히려 일체의 인식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참여적 활동이며 행위의 방식이다. 그 대상의 실재성은 정적인 관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험적인 탐구 활동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논구하고 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용어에서 함축되어 있는 실천(practice)은 일상적인 실제 생활의 차원을 일차적으로 겨냥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인식 활동이 일종의 특수한 행위로서 실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프래그머티즘은 인식의 검증은 이론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의해서 가늠한다는 주장이다. 즉 인식의 타당성의 검증은 관념이 그것과 관련있는 경험의 상황에 미치는 결과에 의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프래그머티즘이 전통 철학자들로부터 비판의 포화를 맞은 부분은 이 점이며 이홍우의 비판도 이 맥락에 위치한다. 이홍우는 이 결과의 의미를 몸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의식주 차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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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문제해결이라는 저차원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듀이는 이것이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오해임을 말한다. 듀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도구주의의 논리학이 받는 오해 가운데 가장 집요한 것은, 프래그머티즘의 지식을,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 실용적인 목적의 충족을 위한 ―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다. 그리고 그 실용적이라는 말을 물질적인 뜻으로 즉 빵과 버터를 위한 어떤 실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생각이다. ‘프래그머틱’(pragmatic)이라는 말이 습관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연상의 힘이, 이제까지 어떠한 프래그머티스트가 베푼 가장 명백하고 힘찬 설명보다도 아직 더 강한 것이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프래그머틱’이라는 말은 오직 모든 사고작용 즉 모든 반성적 고찰의 궁극적인 의미와 그 증명을 위해서 사고작용을 그것이 빚어내는 여러 결과들에 연결시킨다는 법칙을 가리키는 것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들이라는 것은 어떤 특수한 성질의 것들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성질에 있어서 미적일 수도 있고, 도덕적이거나 정치적 혹은 종교적일 수도 있으며, 또 그 밖의 우리가 원하는 어떠한 것일 수도 있다(EE: 366).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듀이의 지적대로 그 사고의 결과라는 것이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서의 실용적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성질에 있어서 미적,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인 것들을 망라하는 삶의 다양한 제반 가치 영역들을 포괄한다. 이 점에 대해서 번스타인(Bernstein, 1971,ⅹ)은 듀이 철학에서의 실천의 의미가 지나치게 실용적 차원으로 곡해되어왔음을 지적하고 이를 새롭게 재해석한다. 번스타인은 듀이 철학의 골격을 해설한 그의 책 『존 듀이(1966)』에서 듀이가 사용하는 실천적이라는 개념은 이론 지향적 전통철학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듀이 철학의 근본 취지를 드러내는 핵심 개념이며, 그것은 물질적 생활의 유용성과는 구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에 맞닿아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는 철학을 실천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듀이의 점증적인 욕구를 잘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언명은 듀이가 이른바 실천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즉 ‘실천적이라는’ 용어는 종종 일상적인 의미에서 어떤 물질적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써 유용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실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일상적 의미는 듀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과 거의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듀이는 실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유물론적인 강조를 항상 비판하였다. 그런 만큼 실천적인 것에 대하여 듀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 속에서 실천적이라는 용어는 윤리학, 정치학 및 시학을 포함시키고 있는 이른바 행하고 만드는 기술 ―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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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행동들과 관련된 기술 ― 을 언급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철학을 실천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가운데 듀이는, 철학이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모든 행위들을 어떻게 더욱더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자 하였다(1966/1995, 56-57).
이런 번스타인의 해석대로 듀이가 말하는 실천이 생활의 실제적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프락시스(praxis), 즉 삶의 다양한 실천영역에서의 ‘도야된 활동’을 뜻하는 것이라면, 삶의 문제상황을 해결하는 도구라는 말의 의미도 폭넓게 해석되어야 한다. 즉 듀이가 지식이나 사고 등을 도구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좁은 의미의 실제적 문제해결의 도구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문제와 장애가 있는 실천적 상황이 문제가 해결되어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바꾸어 놓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듀이가 말하는 문제라는 것은 매우 넓은 의미의 것이며 어떤 삶의 영역과 종류에서든 간에 경험의 흐름에서 장애가 생겨난 것은 문제 상황인 것이다. 이때 문제와 관련된 듀이 철학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의 문제 해결은 그것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출현을 낳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듀이의 문제 해결의 의미를 이홍우가 해석한대로 실제적 생활의 문제 해결로 보게 되면 그것은 문제해결 자체로 상황은 종료되고 더 이상 새로운 문제사태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듀이는 지적 탐구를 즐기기 위해 과학자는 문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한 문제가 해결되면 그 뒤를 이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최종적인 해결이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해결은 어느 정도의 새로운 불안정상태의 조건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현저해진 발달 단계에서, 문제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일이 탐구의 목표이다(LTI: 42).
이렇게 볼 때 듀이가 말하는 문제 해결이 실제적 차원의 문제 해결이라는 오해는 어느 정도 해명된 듯하다. 더 나아가서 듀이의 지식관의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아니라 듀이의 전체적인 경험철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듀이 지식론은 전통적인 지식론의 입장에서 오해되거나 폄하될 가능성을 지닌다. 듀이는 지식을 지고의 가치로 보는 주지주의적 철학을 벗어난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 자체가 궁극적인 가치가 아니다. 듀이 철학의 일차적 관심사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삶의 세계이다. 그리고 삶의 세계에 대한 듀이의 강조는 인간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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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것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가능한 의미의 탐구라는 것이다. 진리 혹은 그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지식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의미의 풍요한 이해와 감상을 위한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은 삶에 있어서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지식의 가치를 삶의 실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봄으로써 지식과 교육의 가치나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한 이홍우의 관점은 듀이의 의도를 벗어난다. 즉 지식이 수단이되 무엇을 위한 수단이냐에 따라 그 지식의 유용성의 의미는 완전히 상이한 해석을 띠게 된다. 지식이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언제나 전통적 입장에서 오해되어 온 점을 듀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용성이란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인데 이때 두드러진 인간의 필요는 사물의 의미를 소유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이런 유용성의 개념은 전통적 유용성의 개념에서는 무시되었고 만족되지 않았다. 즉 유용성을 어떤 사건과 행동들이 그들의 산물인 다른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외적 관계로 간주함으로써 유용성의 아이디어의 본질적인 내용, 즉 경험 안의 위치와 의미를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이다(EN: 272).
또한 듀이는 『철학의 재건』에서도 유용성의 의미가 오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진리를 유용성이라 정의할 때, 그것은 순전히 사적인 목적이나 특정한 개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떠한 이익에 유용하다는 뜻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흔하다. 진리를 개인적 야심과 확대의 도구로 생각하는 진리관은 불쾌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건전한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비판가들이 생각하는 것은 기이하다. 그러나 사실을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유용성으로서의 진리란 특정한 관념이나 이론이 경험의 재조직을 가져온다고 할 때 그것이 새로운 경험의 조직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유용성을 뜻한다(RP: 170).
첫째 인용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듀이가 사용하는 유용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실제적인 생활, 즉 경험 외적 차원의 결과적 산물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의 의미, 즉 사물의 의미를 소유하고 감상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둘째 인용문의 지적처럼 하나의 이론 혹은 진리가 유용성을 가진다는 것은 개인적 이익이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세속적인 의미의 실제적인 유용성이 아니라 그것이 경험의 재조직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듀이가 지식의 유용성을 말하고 그 수단성을 논할 때 언제나 그의 철학적 핵심 개념인 경험의 맥락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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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경험의 맥락 혹은 상황 [각주 28: 여기서 말하는 경험의 상황이라는 용어는 듀이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이며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주체와 환경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장(場)을 의미하며 이는 경험의 범위가 역동적이며 활발하게 변화함을 강조하려는 데 있다. 여기서 탐구의 문제가 도출된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과 설명은 4장 듀이의 탐구이론을 설명할 때 다루기로 하겠다.] 에서 발생하며 그 지식은 다시 그 지식이 생겨나게 된 경험의 의미의 풍요화와 재조직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의 재조직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교육적인 차원을 겨냥하고 있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듀이의 체제 안에서는 이론 혹은 지식은 그 자체로서 목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재구성이라고 하는 교육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기여한다. 듀이는 지식 혹은 교과의 유용성을 경험 의미의 증대로서 교육의 맥락과 관련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에서 지식이 차지하는 올바른 위치가 좀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한마디로, 지식의 기능은 한 경험이 다른 경험에 자유롭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지식은 또한 경험에 들어 있는 의미, 또는 의미의 경험을 증대시켜 준다(DE: 509-512).
교과의 유용성도 삶 자체의 경험 내용을 증대시킨다는 점에 의해서만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DE: 379).
이렇게 볼 때 듀이의 지식, 혹은 교과의 유용성은 실제적 생활의 외적 필요의 충족이 아니라 경험 내에서 이루어지는 사물에 대한 내재적인 의미를 위한 감상의 도구로서의 유용성이며, 그것은 결국 경험의 성장 혹은 경험의 재조직으로서 교육과 긴밀한 관련을 지닌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건대 이홍우의 듀이 비판의 관점인 명제(1)의 의미는 듀이의 아이디어를 충분히 드러내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홍우는 이론과 실제라는 플라톤적 이분법의 구분에 집착한 나머지 듀이가 인식론에서 강조하는 실천 혹은 행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전통철학의 극복 과정에서 지식의 의미를 전적으로 재구성하고 지식은 경험의 맥락에서 경험의 이해와 재조직을 위한 유용성을 가진다고 하는 듀이의 교육적 아이디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지주의적 관점을 일방적으로 부과하여 듀이를 속물적 실용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상과 같은 듀이 이해의 입장에 있는 이홍우는 듀이가 ‘경험의 계속적인 성장’을 통해 의도한 본래적인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듀이의 교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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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경험의 계속적인 성장’에 대한 이홍우의 해석은 철저히 앞에서 검토한 명제, 즉 “이론은 실제에서 나오고 그 실제에 적용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에 근거한다. 이 관점에 근거하여 듀이의 계속적인 성장은 개인에게 당장 관심 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제적 문제해결의 차원을 겨냥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류의 지적 유산이나 사회적 차원의 정신적 요소들은 그 자체의 세계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제적 문제해결과 관련하여, 그것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고 해석한다(152). 이런 관점을 지닌 이홍우는 듀이의 ‘end-in-view’를 ‘예견되는 결과’로 번역하고 그것은 아동의 개인적인 흥미나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는 교육을 받지 않아도 능히 가질 수 있는 상태를 교육의 목적으로 삼은 것이며 따라서 교육의 실패를 오히려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1991, 144-155).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과연 타당한가? 듀이는 2절에서 언급한 대로 새로운 교육관으로 전통철학을 치유·해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전통철학은 삶의 궁극적 목적을 직관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성실한 탐구 과정을 무시하고 결론으로 비약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듀이는 이런 전통철학의 안이함과 미숙함의 극복을 위한 출구로 자기 변형적 실천 활동인 교육을 의식했다. 말하자면 현재의 위치에서 세계를 임의로 규정하려는 무모함보다는 자기가 변해가면서 세상을 알아 가는 과정을 더욱 중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교육은 교육 활동을 하기 이전에 최종적인 목적이나 도착점을 미리 규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결과적인 산물에 의해서도 교육은 정의되거나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결과와는 구분되는 그 자체 가치로운 활동 원리를 가지고 있는 과정으로 정의해야 한다. 이런 의미맥락에서 경험의 계속적인 성장이라는 아이디어가 생겨났다.
이 때문에 듀이는 교육의 맥락에서 ‘절대 불변의 고정된 목적’을 부정한다. 듀이는 역사적으로 그런 의미의 목적을 주장한 사례를 들면서 그것들은 모두 상이한 형이상학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 진위를 현재의 입장에서 검증할 도리가 없다고 본다. 그 대신 듀이는 보다 실제적인 교육활동을 이끌 수 있는 교육목적으로서의 ‘예견되는 목적’을 제안한다. 이 목적은 현재의 진행중인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다음의 수준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잡이로서의 수단이 되는 목적이다. 그 목적은 아동의 현재 단계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되 한 단계 위의 수준으로 나아가게 하는 지향점을 가진 것으로서,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그 상태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목적이 설정되는 움직이는 목적이다. 말하자면 계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목적이며 학습자의 활동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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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나고 행위자의 자발적인 의지가 담긴 목적이다. 이런 의미에 비추어 볼 때 듀이의 ‘예견되는 목적’이 학습자의 현재 수준의 관심과 흥미만을 반영하고 실제적 문제해결의 차원에 고착되어 평면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이홍우의 해석은 그리 타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홍우는 ‘예견되는 목적’으로 규정되는 듀이의 교육목적론은, 현재의 실제적 삶의 문제 해결을 중시한 결과, 진정한 교육의 목적이요 이념인 ‘위대한 것에 대한 헌신’이라는 이상적인 목적을 ‘개인 욕망의 충족’으로 바꿔치기한 이론임을 주장하고 있다(1991, 153). 바꾸어 말하자면 결국 듀이의 교육이론은 교육에서의 형이상학적인 측면 혹은 이론 그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고 상식의 세계로 교육을 끌어내린 교육관의 전형으로 규정된다(1987, 해설). 그러나 이는 듀이가 그렇게도 극복하려고 했던 확실성에 대한 집착 혹은 최종적인 가치에 의해 교육의 가치를 규정하려는 입장에서 가해지는 비판이다. 듀이의 교육목적의 설정에 있어서 절대적 확실성의 부정이 곧 바로 물질주의적 차원의 실제적 실용성으로의 전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듀이는 현재의 수준에서 확실한 것을 자의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반교육적으로 간주한다. 듀이는 확실성에 대한 자의적이고 미숙한 규정보다는 자신의 체계 안에 불확실성을 의미있게 수용한다. 그리하여 교육은 미지의 세계, 아직 불확실한 세계에 대해 자신을 열어놓고 그 세계를 부단히 알아가려는 치열한 시도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듀이는 현재의 수준에서는 예단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미궁의 실체로 간주되는 것을 부단히 추구하려는 과정의 성실성을 중시했다. 교육은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활동이다. 듀이는 위대한 것과 가치로운 것을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그것의 위대함과 가치를 확인해 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현재의 수준에서 한 단계 더 전진하려는 과정 자체에 교육적 가치를 부여하는 듀이의 관점은 지식의 항구적인 가치 혹은 형이상학적인 최종점에 의해 교육을 정의하거나 가치평가를 하려는 관점에서 바라 볼 때, 마치 교육을 아동의 현재적 차원이나 일상적 삶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교육의 전락으로 오해되었다. 그러나 그 관점이 바로 듀이가 극복하려했던 점임을 상기할 때 그 비판은 겨냥하는 포인트를 잃게 될 것이다. 즉 듀이가 비판하고 부정한 것은 수준 높은 지식이나 가치로운 삶의 형식 그 자체가 아니다. 듀이가 전통교육에서 문제시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배우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부과됨으로 스스로 자기의 것으로 인격화하고 감상(appreciation)할 수 있게 하는 과정적 활동이 박탈되는 반교육적 과정이다. 이홍우의 듀이 해석은 이러한 점을 간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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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홍우의 듀이 비판에는 듀이의 교육관이 지니는 전통철학의 극복에 대한 취지와 그 대안인 경험의 개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다. 단지 전통적인 지식중심의 교육관 혹은 형이상학에 기초하는 교육관에 의하여 듀이의 과정 중심의 새로운 교육관을 오해하거나 부당한 비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듀이는 전통철학의 문제를 극복·치유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육관인 경험의 계속적인 성장을 거론하고 있는 반면 이홍우는 그러한 듀이의 의도와는 역행하여 전통철학적인 관점에 기초를 둔 주지주의적 교육관에 입각하여 듀이의 새로운 교육관을 저압제(低壓制; oppression from below) [각주 29: 저압제는 교육본위론의 전문적 용어로서 후진이 선진의 높은 품위를 몰라보고 오히려 열등하게 평가하는 사례를 의미한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전의 패러다임으로 발전된 패러다임을 저압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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