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안주
제삿날 오랜만에 일찍 모인 형제들 (시간 죽이러)
호프집에나 가볼까(경건해야지, 애비 제사 전에 술이라니)
타박하시던 울 엄매 (술 좋아 하시던 당신 탓이려니)
그래도 요즘 세태 따라야지 눈 감고 모르는 척 울 엄매
안주로 나온 새우들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 딱딱한 것도 한 때 태평양을 유유히 즐기며
자유 만끽하던 한 작은 물결이었을거야
(아니, 바다의 무게 감당 못한 작은 파도였을지 몰라)
등이 휜 새우 씹으며 형제들 노랠 불렀네
공테프 찍찍대는 소리 흘러 갔었네
등이 휠 것 같은 삶이여 봄날은 잘도 갔었네
(그랬지 임종 날 아버지도 저렇게 등이 휜 새우 같았지)
자식들에게 생의 속살 죄다 내 준 채
허무의 등, 휘어져 떠난 아버지
제삿날 초저녁부터 우리 형제
등이 휜 아버지를 씹고 있었네
길 위의 명상
19번 국도, 무진장소방서와 장계고물상계량소 그리고 장계하수종말처리장 팻말이 연이어 보인다 재미있는 이름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다가 순식간에 뒷골을 치는 화두 하나!
오호라, 저 길 위에 열반의 수행방법이 있었구나 무진장소방서에서 무진장 눌러붙은 세속의 불을 고집멸도苦集滅道로 다스리고, 장계고물상계량소에서 내 영혼의 참된 무게를 달아보자 황홀하고도 서늘한 죄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썩은 놈은 장계하수종말처리장으로 가라는 것이겠지 길 위에서 불현듯 불쑥불쑥 나타나는 지지리도 못난 이름이라 여겼던 하수종말처리장, 지금에야 생각하니 영혼의 썩은 물 걸러내고 부활을 약속하는 성소聖所일까
장수군 장계면에서 진안으로 가는 19번 국도에서 생천生天의 도를 만났네
과녁
은해사 돌구멍절로 가다 장맛비에 새끼를 데리고 온 한쌍의 꿩을 보았다 순간 기름진 고기를 상상하며 다부지게 주워 든 몇 개의 돌멩이, 꿩부부는 뻣뻣한 과녁처럼 앞을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섭심을 놓아버린 가여운 중생, 불끈 힘 좋은 살기로 던진 돌멩이가 장끼의 꽁지깃 하나 가볍게 떨구고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대신, 과녁을 비껴간 돌멩이 하나, 내 심장 깊이 명중되었다
장맛비가 죽비처럼 등줄기를 때리는,
하늘 납골당
고품격 프리미엄 납골당이 있네
꿈에그린, e편한세상, 푸르지오
납골들은 모두
아카데미스위트 꿈꾸네
콘크리트 납골당 비추는 수은등 아래
비밀번호 잃은 치매 든 납골 하나
허무하게 무너져있네
우리집은 저기 하늘 납골당이라오
늦은 시각 성묘객들이
잘 마른 납골을 걱정하네
어떤 이는 젯밥을 차려주고
어떤 이는 향을 피우네
대도시 역세권 공중은
칸칸 납골당
미궁으로 높고 길쭉한
콘크리트함들이 허공에 걸려있네
뿌리의 교신
하늘길을 낸 나무들의 행렬
세월을 담금질한 시원始原의 바람
나무들의 몸 읽고 간다
나무는 제 몸이 나무다
나무는 제 영혼이 나무다
나무에 등을 기댄다
나무의 맑은 말씀 내 혈관을 타고 온다
나의 뿌리들, 나무 뿌리와 얽힌다
하늘의 길은 뿌리의 길
땅바닥에 발을 딛고 처음 하늘을 본다
묵언수행하는 나무 나무 나무들
땅 밑으로 혈관들, 은밀한 교신
꽃 피고 바람부는 까닭을
맑은 수액으로 타전한다
나무와 나
서로의 가슴에 돋을새김 남긴다
<당선소감>
내가 왜 시에 끌리게 되었는지는 말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갈비뼈 골속에 갇힌 시어들이 가슴을 자극하는 희귀한 병에 걸렸기 때문에 도리없이 천형天刑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습니다.
시월의 첫날 아침인 오늘, ‘아, 시월!’ 이라는 한 줄 시를 내뱉었습니다. (시월, 시월, 시월… 시월! 하고 내뱉으면 시가 되는 달이 시월이다)라고. 이제 시인으로 거듭난 이 가을날이 내 마음 속 텃밭, 영원한 시의 씨앗으로 잠입할 것입니다. 이후, 깊이 뿌리내려서 젖어있는 영혼들과의 교신을 통하여 울울창창한 시의 숲을 건져 올릴 것입니다.
이 영광의 순간이 오기 까지 에는 경주 불국사 석굴암 가는 길, 동리 ․ 목월문학관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에서 시와 인품을 가르쳐주시면서 참된 시인의 길로 접어들 수 있도록 불끈 손을 잡아주신 김성춘선생님 고맙습니다. 문학관의 초석을 다져주시고, 우리들에게 동리 ․ 목월사람들로서의 존재감을 심어주신 장윤익관장님 고맙습니다. 지난 한 해 주말마다 만나도 더 만나지 못해서 배고팠던 역사에 길이 남을 우리 <목월반>1기 동료들이여, 고마웠습니다. 더불어 동리목월문학관을 배후로 탄생한 <詩作나무>동인들이여, 주욱쭉 자라나서 크게 한 번 일냅시다.
영천이라는 변방에 머물러있던 나에게 시세계 만큼은 변방에 머물지 말라고 각별한 시의 골수를 심어준 평론가 백현국 형에게 마음 울컥한 인사 올립니다. 눈 내리는 새벽 2시에도 전화 한 통에 뛰쳐나올 수 있는 나의 친애하는 사조직 <경천동지>에도 한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냅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 가슴온도로만 프로포즈한 아내 이수진에게도 몇 마디 작정하고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시에 골몰할 수 있도록 좋은 서재를 만들어 준 것, 여행을 다녀야 좋은 시를 건질 수 있다고 내게 과분한 자동차를 사준 것, 저녁밥상 때 마다 생선가시를 발라준 것, 나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 마음의 고백, 훌륭한 시인이 되는 것으로 갚겠습니다.
목월선생님의 시정신이 유산으로 남아있는 <심상>을 통해서, 시인의 뿌리를 증명하는 뜻깊은 가을날입니다.
첫댓글 시상이 활달하고 스케일이 인간적으로 크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시가 언어 유희이기도 하지만 역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우선이지요. 가슴이 있는 시, 기대가 됩니다.
부족한 작품, 격려해주셔서 큰 힘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기만 형!
다섯 자 제목을 선호하시나 봅니다. 수평을 이루는 시소처럼 안정감이 느껴지지요. 등단 시를 읽으면서, 시적 비유와 독자와의 소통이 시소처럼 안정감 있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
아, 그렇네^^ 내도 몰랐네요, 다섯 자 제목인 줄~ 부족한 점 추슬러서 반 단계만 도약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 앞으로도 조언 아끼지 마세요, 선희씨!
지금 3시 15분 비는 여전히 당신처럼 내리고 있습니다. 각기 무엇인가는 하고 있을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벅찬 시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비는, 비는, 그리고 가을이 지나갑니다
태경형! 서로의 작은 힘과 격려가 모여서 우리는 큰 일을 해 낼 것입니다~서로에 대한 어깨 두들김으로 용맹정진~!
좋은 작품 배우는 맘으로 읽고 갑니다.샘님 다시 한 번 추카추카!!!부럽당.
해원씨, 시상을 많이 떠올리다보면 가슴뜨끔증이 생겨나기도 했다는 시인도 있었지요!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병명이지요, 그리고 편작이 온다해도 고칠 수 없는, 그런,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아요, 계속 밀고 나가보세요~!)
반사적으로 튀어오르는 봇물처럼, 우선 젊음으로 빚어진 感性으로 , 詩語들이 맑고 상큼한 산소같은 이미지와 패기가있어보여 마음에 와 닿네요,~ 祝賀 합네다 ~